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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기고_mass media

[칼럼] '황제 노역'과 자유의 가치

by transproms 2014. 4. 29.


[아침을 열며/4월 9일] '황제 노역'과 자유의 가치



벌금 249억원을 몸으로 때우겠다고 나선 사람이 나타났다. 이른바 '황제 노역'이다. 국민들의 분노가 하늘을 찔렀다. 법원장이 책임을 지고 물러났고, 법원 국회 검찰 등 관계기관에서 대책 마련에 나섰다. 당사자가 직접 나서 대국민사과와 함께 벌금을 납부하겠다고 약속했으니 일단 이렇게 일단락되는 모양이다. 하지만 이 사건은 우리 사회에서 '자유'가 어떤 대접을 받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그래서 한국사회의 여러 문제들의 단면을 드러내는 징후적 사건이라는 점에서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현대국가에서 정당성을 인정받는 형벌은 자유형(징역 등), 재산형(벌금 등), 자격형(자격정지 등) 뿐이다. 세계적인 추세는 사형을 형벌에서 배제하고 있으니, 현실적으로 가장 중한 형벌은 자유형이다. 이것은 '자유'가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가치라는 것을 상징한다. 아무리 중한 죄를 저질러도 자유를 빼앗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여기는 것이니 말이다. 몇몇 나라에 '호화 교도소'라 불릴 만큼 괜찮은 시설의 교도소가 있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교도소 시설이 아무리 좋아도, '자유'를 빼앗긴 삶은 충분히 고통스러운 것이기에 굳이 열악한 수감생활로 추가적인 고통을 줄 이유가 없는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범죄자에 대한 자유의 제한조차 가능하면 최소화하는 것이 세계적인 추세다. 교도소 내 자유를 늘리거나(개방처우), 아예 출퇴근을 시키거나(반자유처우), 심지어 교도소에서 구금을 하지 않는(사회내처우) 쪽으로 방향을 잡고 있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우리 사회에 매우 이례적인 현상이 하나 있다. 벌금형을 선고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벌금 납부 대신 스스로 감금되는 것을 선택하는 사람이 매년 4만 명이 넘는다는 것이다. 이른바, '환형유치'다. 여기에는 정반대의 두 가지 사연이 있다. 첫 번째 사연은 돈이 없어서다. 환형유치를 선택한 사람들의 대부분이 여기에 속한다. 이들은 대부분 직장을 잃었거나 저임금노동을 하는 사람일 것으로 추정된다. 충분한 벌이가 있는 사람이 생업을 팽개치고 스스로 유치장행을 택할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사연은 거꾸로 돈이 너무 많아서다. 국가는 돈을 많이 버는 사람에게 일당을 넉넉하게 계산해주고, 그 덕에 수백억대 벌금을 유치장에서 때우는 사람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런 선택을 한 사람들은 아마 자유를 빼앗기는 충격이 그리 크지 않은 생활을 영위하고 있을 것이다. 환형유치는 하루라도 일을 쉬면 손님이 끊기고 업무에 차질을 빚는 사람들이 택할 수 있는 선택지가 아니다. 반면 불로소득으로 손쉽게 돈을 벌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까짓 '자유'를 희생하고 잠시 생업을 멈추는 것쯤이야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 어처구니없는 세태를 바꾸기 위한 가장 직접적인 방법은 벌금제도의 개혁이다. 벌금형을 받은 사람이 돈이 없어서 구금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핵심이다. 벌금 납입기한 연장, 분할납부, 신용카드 납부, 대체형으로 사회봉사 도입 등 이미 시민사회에서 충분히 논의된 건설적인 대안들이 많이 있다. 이참에 경제력에 따라 벌금을 차등 산정하는 일수벌금제를 도입한다면 보다 근본적인 해법이 될 수 있다. 경제력의 차이에 따라 형벌의 고통이 달라지는 제도 자체를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자유는 근대인들이 목숨을 걸고 쟁취해낸 인류의 최고 가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자유가 어떤 상태에 놓여있는지에 따라 그 사회의 현상태를 가늠해볼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보다 많은 자유를 누리고 있고 자유의 가치가 높이 평가되고 있다면 그만큼 괜찮은 상태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아무리 일당을 많이 쳐줘도 '황제 노역'일 수 없고, 교도소시설이 아무리 좋아도 '호화 교도소'일 수 없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얘기다. 그런데 한 쪽에서는 벌금 낼 돈이 없어서, 다른 한 쪽에서는 돈이 많아서 그 소중한 자유를 스스로 포기하고 있는 것이 우리 현실이다. 불행히도 현재 우리 사회에서 '자유'는 이런 수준의 대접을 받고 있는 것이다.



홍성수 (숙명여자대학교 법학부 부교수)



출처: 한국일보, 2014년 4월 9일자

http://news.hankooki.com/lpage/opinion/201404/h2014040821020924370.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