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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문(법)_comments(law)

형벌 포퓰리즘에 대하여

by transproms 2014. 4. 30.

형벌포퓰리즘에 대한 제 글입니다. 발표용으로 제출된 미완성 초고이니, 참고만 하시고 인용은 저자와 상의해주시기 바랍니다. 두 글은 포인트가 살짝 다를 뿐 취지는 유사합니다. 아래 텍스트는 특강 내용이고, 두 글은 각각 pdf 파일로도 보실 수 있습니다.


1. 홍성수, 한국의 형벌 포퓰리즘과 사형제도, <세계 사형폐지의 날 세미나> 토론문, 사형폐지 국회의원 모임 주최, 2012년 10월 30일, 국회의원 신관 2층 소회의실 

Penal Populism and Death Penalty in Korea (Hong).pdf


2. 홍성수, 형벌포퓰리즘: 언론-정치-여론의 삼각연대, 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 특강, 2012년 11월 7일 

Penal Populism - Inha Univ (Hong).pdf






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 특강, 2012년 11월 7일



형벌포퓰리즘: 언론-정치-여론의 삼각연대*



* 이 글은 <세계 사형폐제의 날 세미나: 법의 이름으로 행하는 사형을 폐지하라>(유인태 의원실 주최, 2012.10.30, 국회 의원회관 소회의실)에서 발표된 글을 수정보완한 것임. 인용은 저자와 상의바랍니다 (sungsooh@gmail.com).



홍성수 (숙명여자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1. 한국의 범죄현실


언제부터인가 한국에서는 흉악범죄가 발생할 때마다 동일한 스토리가 반복된다 (*이하의 4개 단락은 다음의 글 참조. 홍성수, “괴물을 없애는 방법”, 시사IN, 261호, 2012.9.19).  “사형시키자!” “거세시키자!” 범죄에 대한 대중의 분노가 하늘을 찌른다. 분노는 당연하다. 이 상황에서 이성적인 대응을 주문하는 것은 전혀 이성적이지 않다. 이 때 언론이 나선다. 언론은 범죄에 관련한 여러 가지 사실들을 선정적으로 보도하면서 특히 범죄자의 개인적 배경을 상세히 보도한다. 그리고 이러한 괴물들을 사회에서 격리시켜야 한다고 선동한다. 언론보도는 대중들의 분노에 기름을 붓는다. 언론은 시민들의 분노를 더욱 자극하고, 괴물들을 사회에서 격리시키자고 선동한다. 차분하게 사태를 직시하고 건설적인 대안을 제시해야 할 언론의 사명은 온데간데없다. 그들에게 범죄는 판매 부수나 페이지뷰 수를 늘리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슬픔에 잠긴 피해자 가족에게 ‘얼마나 슬픈지 얘기해보라’고 재촉해 헤드라인을 뽑는 언론이 우리의 현실이다. 언제부턴가 성폭력 관련 보도가 언론지상에 빈번히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한 연구에 따르면, 2008년 이후 아동성폭력 사건 보도가 급격히 증가하여, 2007년까지 100건에서 200건이다가, 2008년 이후 두 배 이상, 2010년 다섯 배 이상 증가했다 (*권인숙/이화연, “성폭력 두려움과 사회통제: 언론의 아동 성폭력 사건 대응을 중심으로”, 아시아여성연구, 50-2, 2011 참조).


 단순히 사실보도만이 문제가 아니다. 대부분의 보도는 언론의 정도에서 벗어난 말 그대로 ‘선정보도’였다. 실제로 한국여성민우회가 2012년 8월 31일부터 1주일을 선정하여 성범죄 보도를 모니터한 결과, 신문은 평균 30건, 방송은 평균 20건 정도를 보도했는데 그 중 절반의 기사가 한국여성민우회가 제정한 ‘성폭력 보도 가이드라인’을 따르지 않은 것이었다(“기자들, 성범죄 보도 부끄럽지 않습니까?”, 미디어오늘, 2012.10.16.  여성민우회의 성폭력 범죄 보도 가이드라인은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61026171834 &Section= 참조. 그 외에도 한국성폭력상담소가 만든 “성폭력 피해 생존자의 보도과정에서의 권리” http://www.sisters.or.kr:8000/violence/rights_04.php; 이외에도 한겨레신문사에서는 “범죄 수사 및 재판 관련 취재보도 시행세칙”을 제정한 바 있으며 (http://blog.naver.com/jirirang?Redirect =Log&logNo=20097692402), 얼마 전 경향신문에서도 “성범죄 보도준칙”을 제정하여 발표했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10162224485&code=990403; 해외의 범죄보도 가이드라인에 대해서는 김한균, “강력범죄 보도와 피해자보호를 위한 가이드라인”, 형사정책연구, 122권, 2012, 2-6쪽 참조).


“‘짐승’을 다스리지 못한 나라” (중앙일보)

“미안하다 나영아” (조선일보)


어처구니 없는 일이지만, 흉악범죄는 정치권에 ‘호재’로 기능한다. 언론이 불을 지른 대중의 분노가 극에 달했을 때, 정치권이 나서서 나서 강경 대응을 천명한다. “사형 집행을 검토하겠습니다!” “물리적 거세 법안을 제출합니다!” 정치권이 모처럼 대중의 요구에 화답하는 순간이다. 땅에 떨어진 지지율을 단숨에 올려놓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여아는 앞다투어 강경대응책을 내놓는다. 법정형은 계속 상향 조정되고, 화학적 거세, 물리적 거세, 신상공개제도, 전자발찌 등 신종 형벌들이 쉴 새 없이 제시된다. 언론이 정치권이 이렇게 성의를 보이고 나니, 이제야 국민들은 안도의 한숨을 쉰다. 그놈 면상이라도 봤으니 속이 시원해졌고, 분 단위로 자세히 묘사된 범죄 보도를 보며 욕을 퍼부었더니 그제야 마음이 좀 풀리는 것 같다. 정치권에서 경쟁하듯 범죄대책을 내놓는 것을 보니 이제야 공포와 분노로 가득했던 마음이 좀 누그러지는 것 같다. 

하지만 문제는 이제부터다. 언론은 신문 몇 장을 더 파는데 성공했고, 정치권은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는 성과를 얻어냈고, 시민들은 안도할 수 있었다. 시민-언론-정치의 ‘삼각 연대’가 형성된 것이다. 하지만 그 성과는 ‘사이비’였다. 실제로 이런 식의 문제해결은 문제를 해결한 것이 아니고, 사회를 안전하게 만든 것도 아니다. 그저 안전하다는 ‘느낌’만을 선사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 불온한 삼각 연대의 최대 피해자는 ‘안전한 사회’를 원했던 시민이다. 


삼각 연대의 결말이 비극으로 끝난 이유는 간단하다. 괴물 몇 명을 사회에서 추방해봤자, 그 괴물을 낳은 구조가 바뀌지 않는 한 새로운 괴물이 또 등장하기 때문이다. 돌봄을 받지 못하고 각종 범죄에 무방비로 노출된 ‘나 홀로 아동’이 70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벌써 몇 년째 지적되고 있는 문제지만 뚜렷한 진전은 없다. 성폭력 가해자들은 대부분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조차 모른 채 “억울하다”고 말한다고 한다. 이런 자들에게 중형을 선고하고, 전자 발찌를 채우고, 신상공개를 하고, 화학적 거세를 해봐야, 어차피 그 집행기간이 끝나면 다 무용지물이다. 재범을 막는 가장 확실한 길은 교도소에서 어떻게든 교화해서 내보내는 것이다. 교도소 교화 프로그램의 중요성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성범죄 신고율이 10% 남짓이고, 아는 사람에 의한 성폭행이 80%에 육박한다. 성폭력은 몇몇 악마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일상이라는 얘기다. 성범죄자에 대한 강경 대응에 사람들이 호응하는 내막에는 자신의 일상이 그 악마들과는 분리되었음을 애써 확인하려는 몸부림이 숨어 있다. 그렇다면 이 일상의 성폭력을 수면 위로 드러나게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쉽지 않은 문제지만, 성교육 등 다양한 기제를 활용하여 지속적인 노력을 해야 한다. 범죄학은 사회의 빈곤과 불평등이 범죄의 근본 원인이라는 점을 일관되게 지적해왔다. 가장 효과적인 형사정책은 좀 더 평등한 사회를 만드는 일이라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러한 구조는 비단 성범죄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범죄와 형사정책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권위주의 정권에서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며 조폭과의 전쟁을 벌였던 것이 최근에는 “주폭과의 전쟁”으로 계승되고 있으며, 최근 십수년 동안, 성수대교 붕괴, 삼풍백화점 붕괴, 대구지하철 방화사건 등 대형 참사에 대한 대응에서도 우리는 항상 범죄자를 호명하고 그들을 공개처형장에 끌어냄으로써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좀 더 넓게 보면, 신용카드 연체나 가사분쟁, 개인채무 등에서까지 ‘형벌’을 투입해온 역사와 무관하지 않다.)


 현대사회의 위험은 대개 ‘구조적 위험’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형사사건화하여 범죄를 저지른 개인에게 모든 문제를 집중시키는 전략이었다. 이것이 때로는 응징과 보복의 감정을 충족시키는데 효과적이고 정치적으로도 일정한 효과를 거두지만,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문제해결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2. 형벌 포퓰리즘의 등장


서구의 범죄학에서는 이러한 현상을 이른바 “포퓰리즘적 형사정책”(populist penal policies) 또는 “형벌 포퓰리즘”(penal populism)이라고 부른다. 포퓰리즘은 가치중립적으로는 민중주의, 즉 민중들의 생각을 따르는 정치노선을 말하지만, 부정적인 의미로는 대중추수주의 또는 인기영합주의, 즉, 민중의 즉자적 감정과 단기적 이익을 이용해서 정치인이 자신의 정치적 이익(당선, 지지율 상승)을 얻지만 그것이 민중의 궁극적이고 장기적 이익에 반하는 것을 말한다. 형벌포퓰리즘은 후자의 부정적인 의미, 즉, 국민들이 진정으로 바라는 형벌을 통한 범죄예방보다는 정치인들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복무하는 형사정책을 통칭한다. 그러니까 형벌포퓰리즘을 추구하는 정치인들은, 정의를 실현하거나 범죄율을 낮추려는 것에는 관심 없고 오로지 선거에서의 승리를 목적으로 하는 일련의 형벌정책을 사용한다(*J. V. Roberts, Penal Populism and Public Opinion, Oxford University Press, 2003, 5쪽)형벌포퓰리즘은 범죄의 원인에 대한 과학적 분석보다는 감정과 직관에 호소하여 분노를 자극하고, 이를 미디어를 통해 극대화시키고, 합의보다는 불화와 적대에 근거하여 범죄자와 시민을 대립시킨다(*J. Pratt, Penal Populism, Routledge, 12-13쪽). 포퓰리즘이 단기적으로 국민들의 지지에 편승하지만, 궁극적이고 장기적인 국민들의 요구를 거스르는 것이라면, 형벌포퓰리즘 역시 시민들의 진정한 바램(범죄예방과 범죄척결)에 부합하지 않는 정책이라는 것이 문제의 본질이다. 형벌포퓰리즘의 진정한 수혜자는 언론과 정치권이지 국민이 아니다. 중요한 점은 최근 몇 년 동안 한국에서도 이러한 형벌포퓰리즘의 징후가 확실하게 감지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형벌포퓰리즘은 ‘법치’, ‘질서’를 강조하는 흐름과 일맥상통한다. 이종수, “이명박 정부의 "법질서 정책" 평가”, 법과 사회, 36권, 2009 참조). 엄벌주의 경향은 이미 군사정권 시절부터 배태된 것이었지만 (*김일수, 전환기의 형사정책: 패러독스의 미학, 세창출판사, 2012, 64쪽 이하.)언론, 시민, 정치의 삼자연대를 통해 기능하는 전형적인 형태의 형벌포퓰리즘은 최근 몇 년 간 더욱 뚜렷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형벌포퓰리즘이 영국과 미국에서는 “법질서 정치”(law and order politics)라는 이름으로 등장했다(*김한균, “법질서정치와 형사사법의 왜곡”, 민주법학, 제37호, 2008 참조). 법질서 정치는 범죄로 인한 위기를 과장하고 범죄에 대한 두려움을 정치적으로 이용했다. 범죄현실을 범죄자의 잘못으로 단순화시키고, 피아를 구분하여 적을 배제함으로써 국민들의 사이비 통합을 강화하는 정책을 실시했다. 미국에서는 1960년대, 영국에서는 1980-90년대 보수정당권이 주로 활용했던 정책이다. 한국의 법질서정치는 1990년 이전에도 이미 초보적인 형태로 등장했다. 통행금지, 복장/두발 단속, 연예인 마약사건, 경범죄처벌법, 불심검문 등으로 공포분위기를 조성했던 것이 대표적이다. 구체적으로는 5.16 이후의 깡패 소탕, 1980년 삼청교육대, 1990년 범죄와의 전쟁 등이 대표적이었다. 이것은 형사특별법의 제정으로도 나타났는데, 폭력행위처벌 등 처벌에 관한 법률 (1961), 특정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1966),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1983), 특정강력범죄의 처벌에 관한 특례법 (1990), 사회보호법 (1980, 2005년 폐지, 치료감호법 신설), 경범죄처벌법 (1954) 등이 대표적인 법률이다. 1990년 대 이후에도 환경범죄의 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법 (1991), 마약류관리에 관한 법률 (2000), 법죄수익은닉의 규제 및 처벌 등에 관한 법률 (2001), 성폭력범죄의 처벌 및 피해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 (1994), 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 (2000), 아동∙청소년 성보호에 관한 법률 (2009), 성매매알선 등 행위의 처벌에 관한 법률 (2004), 성매매 방지 및 피해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 (2004), 가정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법률 (1997), 가정폭력방지 및 피해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 (1997),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2001),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소비자 보호에 관한 법률 (2002), 기타 경제관련 범죄 등이 입법화되었고, 신상공개제도, 전자발찌, 화학적 거세 등 새로운 강성형벌정책이 등장했다. 특히 이명박 정권 들어서는, 유난치 법치를 강조하곤 했는데 (*“우리사회에서 법과 절차를 무시하고 떼를 쓰면 된다고 생각하는 의식도 가시지 않고 있다” “어떤 이유에서든 법치를 무력화하려는 행동은 더 이상 용인하지 않을 것” [이명박 대통령 2008년 8월25일 한국법률가대회 축사]; “법치를 바로 세워 일류국가로 가는 기반을 다질 것” [이명박 대통령 2009년 1월2일 신년 국정연설]), 몇몇 법정형을 상향 조정하고 공소시효제도를 축소하는 조치가 뒤따랐으며, 용산참사, 미네르바 사건, 유언비어(연평도, 천안함, 촛불시위), G20, 불법집회시위 대응, 불법파업 대응 등에서 복면착용금지 (집시법), 불심검문 거부시 지문 채취 (경찰관직무집행법), 불법집단행위에 관한 집단소송법, 비영리민간단체지원법, DNA 신원확인정보의 이용 및 보호에 관한 법률, 국정원법/통신비밀보호법/테러방지법, 사형제와 사이버모욕죄 도입 논란 이른바 무관용정책(zero tolerance)이 등장했다 (*자세한 것은 이종수, “이명박 정부의 "법질서 정책" 평가”, 법과 사회, 36권, 2009 참조).

 


2. 형벌포퓰리즘의 문제점


형벌포퓰리즘은 이른바, 강벌주의(punitivism), 엄벌주의, 중형주의라는 경향과 연결된다. 이것은 언론, 여론, 정치가 더 강한 형벌을 요구하고, 이에 따라, 합리적 형사제재의 수준을 일탈하는 경향을 말한다 (*김일수, 전환기의 형사정책: 패러독스의 미학, 세창출판사, 2012, 29-30쪽 참조).

 범죄와 형벌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은, 범죄가 많아지고 강력해질수록 형벌을 더욱 더 가혹하게 집행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강한 형벌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일종의 악순환의 구조를 갖게 된다: “범죄 → 형벌 → 범죄 증가 → 강한 형벌 → 범죄 증가 → 더 강한 형벌 → 범죄 증가”. 그리고 그 정점에는 바로 사형제가 있다. 형벌포퓰리즘이 공포심을 자극하여 진정한 문제해결책이 아닌 강한 형벌로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국민들을 현혹시키는 것이라면, 그 ‘강한 형벌’ 중 가장 강한 것이 바로 사형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국에서의 사형집행은 1997년이 마지막이었으나, 최근 들어 사형집행을 재개하려는 흐름이 끊임없이 형성되고 있다. 2009년 2월에는 강호순 사건을 빌미로 정부여당이 사형제를 재개하려는 논의를 한 바 있고, 2010년 3월에는 이귀남 법무부 장관이 사형 재개를 시사하는 발언을 해서 논란이 커진 바 있다. 그리고 2012년 9월에도 나주 초등생 성폭행 사건 등 성범죄가 발생하자, 청와대 차원에서 사형제에 관한 논의를 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청와대 ‘사형집행 재개 초보적 논의 중’”, 조선일보, 2012.9.4.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09/04/2012090400102.html). 동시에 한 대선 유력후보가 반인륜적 흉악범에 대해 사형을 집행할 수 있다는 뜻을 내비추기도 했다 (*“‘대통령 되면 사형집행?’ 묻자…박근혜 “예전에도 그렇게 주장”, 한겨레신문, 2012.9.4. http://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550219.html)

 

문제는 사형의 형벌포퓰리즘의 사이비 효과를 더욱 강화할 것이 분명하다는 점이다. 형벌포퓰리즘을 비판하는 이유는 전자발찌, 신상공개, 거세법안 등의 일련의 강벌주의 형사정책이 범죄의 진정한 예방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형 역시 이 여러 연구가 밝힌 바와 같이 사형의 범죄억제력은 입증된 바 없다. “대부분의 사회과학연구는 사형과 종신형을 비교한 결과, 사형이 범죄를 억제한다는 증거를 찾지 못했다” (*S. C. Hicks, “Death Penalty”, Encyclopedia of Law & Society, Sage Publications, 2007, 388쪽; 홍기원, “사형제도의 범죄억지력에 관한 최근 미국 법경제학의 연구성과에 대한 검토”, 고려법학, 제57호, 2010; 김도현, “헌법재판소의 사형제 결정과 사회과학적 논증: 사형의 억제효과를 중심으로”, 법과사회, 41권, 2011 참조). 그리고 이들 강성형벌은 오히려 진정한 문제해결을 가로 막는 역할까지 한다. 대중의 관심이나 정부의 범죄대책에도 일정한 ‘총량’이 있을 수밖에 없는데, 강성형벌정책에만 매몰되게 되면 범죄가 발생하는 구조적인 문제의 해결에는 아무래도 관심이 떨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순혁, “범죄 포퓰리즘”, 한겨레신문, 2012.9.4.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 /550135.html) 그런 식으로 사형은 정부정책의 실패를 은폐하는 기능을 한다 (*박주민, “사형, 국가의 실패 숨기는 가장 쉬운 방법”, 프레시안, 2012.9.27.,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20120927102422). ‘사형’은 그런 사이비 효과를 더욱 극대화시킨다. 미국에서 사형장면이 언론에 보도되는 모습을 보면, 그것은 마치 이벤트와도 같다. 신문지면은 사형 소식으로 도배되고, 9시뉴스의 톱기사는 당연히 사형집행 소식으로 채워진다. 그러한 언론보도는 분노의 총량을 상당 부분 흡수해 버릴 것이며, 그에 비례하여 진정한 범죄대책에 필요한 여유분은 더 소진될 것이기 때문이다. 



3. 형벌포퓰리즘의 악순환을 끊는 방법


이른바 ‘강성 형벌정책’을 주문하는 정치권과 언론은 엉뚱하게도 그 포퓰리즘적 폐해를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반론을 제기한다.


“... 그런데 의외로 이 사건에 침묵하고 있는 곳이 있다. 4년 전 '전자팔찌법' 도입을 반대했던 일부 '인권' 단체들이다 ... 전자팔찌 정도에 성범죄자의 인권 보호를 걱정했던 사람들이다. "징역 12년은 너무 약하다"고 분노하며 '피해보상'을 촉구하는 청원에 찬성 댓글을 단 국민 수십만 명을 "파시즘 같은 여론재판"이라고 앞장서 비판해야 앞뒤가 맞을 것이다. '나영이 사건'을 보고 그들이 무슨 말을 할지 몹시 궁금하다.” (*정우상, “기자수첩: '나영이'엔 침묵하는 '인권단체'들, 조선일보, 2009.10.02.)

 


(전자팔찌제도 도입과 관련하여) "더 이상 얼마나 더 우리 아이들이 희생을 당해야 그 한가한 가해자 인권 타령을 그만둘지 되묻고 싶다" "인권 선진국이라고 하는 미국과 유럽에서도 이 제도를 도입하고 있다" (진수희 의원)


그런데 형벌포퓰리즘에 반대하는 것은 범죄대책에 무관심하자는 얘기도 아니고, 범죄현실에 무책임한 태도를 보이는 것도 전혀 아니다. 범죄자의 인권을 이야기하는 것은 범죄자의 인권이 어떠한 경우에도 제한될 수 없는 불가침의 영역이라서가 아니라, 필요한 수준을 넘어서 과잉침해되어서는 안된다는 것 뿐이다. 흉악범죄를 저질렀다고 해서 범죄아의 인권이 아예 없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헌법 제10조)고 되어 있는데, 범죄는 인권이 없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고, 흉악한 범죄를 저지른 것에 비례하여 강한 처벌이 필요하겠지만, 그것은 필요최소한이어야 하고, “모든 자유와 권리”는 본질적인 내용까지 침해될 수 없다는 것(헌법 제37조)이 엄연한 헌법정신이기 때문이다. 


형벌포퓰리즘에 반대하는 것은 오히려 범죄현실에 대해 무거운 책임을 지자는 것이다. 쉽게 가자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려운 길을 가자는 것이다.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해서 문제를 해결하자는 것이다. 사형을 통해 문제가 해결된 것 같은 사이비 효과에 만족하지 말고, 사형이 아닌 다른 범죄대책을 세우자는 얘기다. 사형이라는 손쉬운, 그러나 별 효과가 없는 중형 대신에 다른 범죄대책들을 모색해 보자는 것이다. 


범죄피해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이른바 피해자 가족들의 격한 분노와 함께, 사형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김성규, “유족 恨 덜어주는 것도 사법부 역할인데”, 동아일보, 2012.10.21., http://news.donga.com/3/all/20121019/50249130/1; “수원 오원춘 사건 유가족 인터뷰”, CBS <김현정의 뉴스쇼>, 2012.9.5., http://www.nocutnews.co.kr/show.asp?idx=2291320) 사형폐지론을 주장한다고 해서 이들의 분노에 무관심한 것이 결코 아니다. 그렇다고 피해자들로 하여금 관용을 베풀고 가해자의 인권을 존중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도 아니다. 가해자를 용서하지 않고 사형을 내려달라고 간청하는 피해자들의 요구가 잘못되었다고 하는 것도 아니다. 그들의 요구는 그 자체로 정당하며 범죄피해자들을 하루 빨리 사회에 복귀시킬 수 있는 사회정책이 꼭 피룡하다. 요구한다. 다만, ‘사형’이라는 수단을 통해 이루어져서는 안된다는 점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도리어 사형제도가 존치하고 사형이 집행된다면 이들 범지피해자들의 사회복귀문제에 더 무관심해질 수 있다. 실제로 엄벌주의의 정당성을 강하게 강조했던 여론, 언론, 정치 중 범죄피해자의 문제에 진지한 관심을 가지는 이들은 많지 않다. 오히려 사형에 반대하고 강성 형벌정책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범죄피해자의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는 경우가 더 많다 (*예컨대, 이호중, “엄벌주의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 33호, 2008년 7-8월호).



중형주의와 형벌 포퓰리즘에 대한 반대는 보다 우리를 과학적인 형사정책의 길로 이끈다. 첫 번째는 범죄는 어디까지나 ‘사회구조’에서 기인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범죄원인에 대한 복합적인 사회과학적 이해는 범죄의 원인을 단순히 ‘범죄자’로 원원시키는 우를 범하지 않는다. 불평등하고 억압적인 사회가 범죄의 가장 큰 원인이라는 범죄학의 기본 테제를 다시 한 번 확인한다. 그리고 범죄를 줄이는 데 직접적으로 기여한다고 평가되는 검거율 개선이나 최근 각광을 받고 있는 범죄예방환경설계(CPTED: Crime Prevention through Environmental Design)나 공동체 치안(community policing) 등의 중요성을 다시 확인한다. 예컨대, 아동성범죄와 같은 범죄예방환경설계나 공동체 차원의 돌봄시스템의 마련은 그 어느 범죄대책보다 효과적인 대안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법적 차원에서 또 하나의 대응은 형법에 대한 법치국가적 제한원리인 책임원칙과 비례성원칙을 공고히 하는 것이다. 법치국가 형법원리를 공고히 하는 것은 형사피의자의 인권이 부당하게 침해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형법이 권력에 의해 남용되고, 정당하지도 효과적이지도 않은 형벌의 강성화와 포퓰리즘화를 막는 것에도 기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