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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의 차별금지법 포기 발언, 무엇이 문제인가?

by transproms 2017. 2. 20.

문재인의 차별금지법 포기 발언, 무엇이 문제인가?

왜 성소수자들은 '절차를 무시해가며' 따져 물었어야 했나?


이론적으로나 (국제인권)실무에서 자유권에 관한한 어떠한 유보도 인정되지 않습니다. 예컨대, 여건이 미성숙되었다거나 사회적 합의가 덜 되었다는 것은 '변명'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죠. 하지만 개별 국가의 현실에서는 자유권을 단계적, 점진적으로 추진되어야 하는 경우가 있기는 합니다. 그런데 이런 유연성은 궁극적으로 자유권을 온전히 보장하기 위한 '전략적' 차원에서만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이죠. (사실 정당화된다기보다는 그냥 그런 현실이 있다고 보는게 맞겠지만요) 또한 이러한 전략이 핑계가 되어 기약없이 유보되는 경우도 허다하기 때문에, 전략적 후퇴/유연성에는 늘 엄격한 비판과 감시가 뒤따라야 하고, 그걸 추진하는 자는 그 비판/감시를 겸허히 수용해야 합니다.


문재인 후보의 발언을 최대한 선의로 해석하면 (저는 원래 선의 해석을 좋아하는 착한 사람입니다^^;;), "차별금지법 제정이 현실적으로 어려우니, 국가인권위원회법에 차별금지 조항을 최대한 강화하는 식으로 유연하게 문제를 풀어가 보자" 정도가 될 겁니다. 사실 차별금지법이 국가인권위원회법의 확대/강화인 것은 맞고, 입법기술적으로 인권위법을 강화하는 식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건 아닙니다. 물론 바람직하진 않습니다. 국가인권위원회법은 (인권위 설립을 위한) 조직법이고 그 조직의 권한으로 차별금지 내용을 포함시키고 있는건데, 차별금지의 내용은 별도의 법에 규정하는 것이 바람직하긴 하죠. 실질면에서 그렇지만, 단일 차별금지법은 차별금지에 대한 국가의 의지를 확인한다는 차원에서 그 의미가 결코 적지 않고요. 그래서 참여정부에서도 차별금지법 제정을 추진했던 겁니다.


2017년 현재 문재인 후보는 일종의 '우회전략'을 제시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근데 이 우회전략이 정당화되려면 두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첫번째, 입장 선회에 대한 설명이 뒤따라야 합니다. 분명히 참여정부는 차별금지법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적극 추진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와서 그 입장을 폐기한다면, 그 이유를 설명해야 합니다. 두루뭉실 넘어간다면 너무나도 무책임한 일입니다. 더욱이 문재인 후보는 참여정부의 계승자 아닙니까?


두번째 조건. 우회전략을 활용할 때 누구에게 가장 먼저 이해를 구해야 할까요? 누구의 신뢰를 얻어야 할까요? 차별금지법에 관한한 당연히 '차별받는 소수자'입니다. "차별금지법 제정은 포기하되 차별받지 않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건 사실 믿기 어려운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시겠다면, 소수자들에게 먼저 신뢰를 얻어야 합니다. 차별금지법 없이 차별없는 세상이 될 수 있다는 비전과 구체적인 계획을 제시하고, 당사자들을 직접 만나가며 정중히 양해를 구하고 신뢰를 얻어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법을 제정하라! 우린 못믿는다"라는 반론도 겸허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충분히 그렇게 비판하실만 하지만, 이 문제만큼은 저를 믿어주십시오"라면서 돌파해야 합니다. 근데 문재인 후보가 이런 식으로 책임있게 '전략적 우회'를 얘기한 것인가요? 아니면 무책임하게 느닷없이 '차별금지법 제정 없음'을 천명한 것인가요? 더욱이 <여성정책포럼> 이전에, 최초로 차별금지법 포기 선언을 한 것은 바로 기독교계 지도자들과의 만남의 자리였습니다. 과거의 (참여정부 시절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해 함께 하던) 동지들은 안중에도 없는 거죠. 그 상황에서 그들이 느낄 수밖에 없었던 좌절감과 분노가 이제는 이해가 좀 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차별금지법은 이미 여러 차례 입법발의되었던 것이고, 특히 참여정부의 법무부도 입법발의한 적이 있는 법안입니다. 이걸 폐기한다는 것은 누가봐도 '후퇴'입니다. 새로 추진을 하지 않는 것과 기왕에 추진하던 것을 되돌리는 것은 다른 문제니까요. 이게 사회에 부정적인 메시지를 주는 것은 명약관화합니다. 차별주의자들에게는 "우리 주장이 계속 먹히고 있다"는 자신감을 줄 것이고, 소수자들에게는 국가/정치로부터 보호받지 못하고 있다는 불안감을 주게 됩니다. 세계의 정치지도자들은 소수자 문제에 대해서 명확한 입장을 내는 것을 매우 중시합니다. 공식적으로 소수자의 편이라는 사실을 천명하는 것이 문제해결의 출발점이니까요.


오바마 대통령이 흑인증오범죄 장례식에 가서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직접 선창했던 것이나,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이 (재직 시절에는) "나는 소수자의 편이다"를 입버릇처럼 말했던 것은 다 그런 이윱니다. 문재인 후보가 설사 '전략적 후퇴'로 차별금지법 제정을 포기하더라도, "나는 소수자의 편이다"를 분명한 신뢰를 주는 것은 결코 게을리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러한 신뢰가 "차별에는 반대하지만..."는 말 정도로 형성되는 건 아닙니다. "동성애를 지지하는 건 아니다"라는 말은 그 신뢰를 바닥에 떨어뜨리는 말이고요. 이런 상황에서 "차별금지법 제정없이 차별없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말을 믿으라고요? 이 정도에 '안심'하고 문재인 대통령의 인권정책을 기대하면 되는 건가요? 요즘 유행하는(?) '선의'를 믿으면 되는 문제인가요?


사실, 문재인 후보는 매우 어려운 로드맵을 제시한 것입니다. 정책 난이도로 보면 차라리 차별금지법 제정을 밀어붙이는게 쉬워보입니다. 차별금지법 제정 없이 유연한 전략으로 차별을 일소하는 것, 이거 정말 쉽지 않은 일입니다. 고도의 정치적 전략이 필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문 후보가 이걸 하겠다는걸 믿기는 어렵습니다. 수차례 확약하고 구체적인 프로그램을 제시해도 믿을까 말까인데, 확약도 없고 프로그램은 전무합니다. 저는 유연한 전략을 싫어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유연하게 그러나 최종목표를 위해 조금씩 나아가는 '정치'의 본질을 결코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정치하는 사람을 욕하면서도 존중합니다. 정치인이란 그런 직업이고, 저 같은 책상물림이 할 수 없는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긍정적으로 생각해도, 차별금지 문제에 관한 한 문재인 후보의 입장은 도저히 존중되거나 신뢰될 수 없습니다. '당선도 중요하니까', '보수기독교계 눈치도 봐야 하니까'라는 식으로 선해할 여지조차 없다는 것이죠.


이상이 문재인 후보의 차별금지법 포기 발언에 그토록 분노하는 이유입니다. 아울러 문제의 그 자리에서 '절차를 무시해가며' 회의장에서 항의발언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기도 합니다. 소수자 정책, 만만하게 보면 안됩니다. 현실적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눈 앞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고난에 맞서 수십년을 싸워왔습니다. 그 엄중한 역사 앞에 어떤 입장을 낼지 고민하고 또 고민해야 합니다. 이번 사태가 오히려 차별금지 문제를 새롭게 의제화하는 계기였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