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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기고_mass media

[기고] 현병철 연임은 인권에 대한 도전

by transproms 2012. 7. 18.


[왜냐면] 현병철 연임은 인권에 대한 도전



홍성수 숙명여대 법학부 조교수



청와대가 현병철 국가인권위원장을 연임시킨다고 한다. 귀를 의심했다. 그의 취임 때부터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현병철 위원장의 퇴진을 위해 싸워 왔는가. 그것은 그들에게 그저 ‘소음’에 불과했던 모양이다. 최소한의 법적 자격도 충족하지 못하는 인물을 위원장에 임명해 놓고, 그것도 모자라 연임까지 시키겠다니, 분노하기에 앞서 헛웃음이 나올 정도다.


개인적으로, 지난 몇 년 동안 “왜 우리는 현병철 같은 인물이 국가인권위원장이 되는 것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는가”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한 연구를 해왔다. 국가인권위원회법에는 “인권문제에 관하여 전문적인 지식과 경험이 있고 인권의 보장과 향상을 위한 업무를 공정하고 독립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고 인정되는 사람”이라고 인권위원(장)의 자격요건이 명시되어 있다. 하지만 이러한 법규정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인권위 또는 인권 현장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고 자백한 인물이 버젓이 위원장에 임명되어 직무를 수행해 온 것이다. 법이 현실에서 전혀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 것이나 다름없다.


본격적인 분석을 위해 국외 사례부터 뒤져봤다. 인권위원 인선과 관련하여, 꽤 민주적이고 개방적인 추천·임명 절차를 갖추고 있는 사례들을 찾을 수 있었다. 모범적인 몇몇 모델을 이런저런 기회에 소개해 보았다. 한국의 현실에 맞는 인선 절차의 새로운 모델을 제안하기도 했다. 다행히 지난 3월 국가인권위원장에 대한 인사청문 절차가 도입되었다. 민주적 추천 절차가 없어 여전히 불만이지만 최소한의 인사검증 절차가 마련된 것은 중대한 진전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우리와 비슷한 방식의 임명제도를 두고 있는 나라도 적지 않다. 심지어 대통령이 별다른 절차 없이 인권위원 전원을 임명하는 나라도 있다. 하지만 그런 나라들도 우리처럼 인선 절차가 자의적으로 운영되지는 않고 있다. 절차가 잘 마련된 곳에서는 그 절차에 따라서 인선이 이루어지고 있었고, 절차가 부실한 곳에서는 임명권자가 스스로 적절한 인물을 임명하는 정치문화가 자리잡혀 있었다.


우리도 인권위원장에 대한 인사청문 절차를 도입했으니 제도적으로 보면 꽤 괜찮은 축에 속한다. 하지만 문제는 현실에서 이 제도가 적절히 작동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언제부턴가 청와대는 인사 문제에 대해 고집불통이다. 인권위원장의 경우에도 반대 목소리에 아랑곳하지 않고 임명을 강행할 가능성이 높다. 임명‘권’이 대통령에게 있는 이상, 국회의 반대를 무릅쓰고 대통령이 임명을 강행해도 불법은 아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아야 정상이다. 국회가 실시한 인사청문회 결과 부적절한 인사라는 것이 드러난다면, 임명권자가 그 결과를 존중하여 임명을 스스로 포기하는 게 법의 ‘취지’에 맞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성숙한 정치문화다.


현병철 위원장에 대한 인사청문회의 결과는 이미 자명하다. 무자격 위원장이 인권위를 지휘하는 동안, 인권위는 심하게 망가졌다. 용산참사나 <피디(PD)수첩> 사건처럼 인권위의 목소리가 필요한 곳에는 나서기를 주저했고, 성과를 내기도 어렵고 인권위 위상에도 맞지 않는 북한인권 문제에만 열을 올렸다. 국내외 인권단체들이 이러한 인권위의 행보를 여러 차례 비판했고, 최근에는 인권위 직원의 90%가 사실상 연임을 반대한다는 설문조사 결과도 나왔다. 정상적인 인사청문회라면 당연히 부적격이라고 판정할 것이고 청와대는 이러한 인사청문 결과를 존중해서 임명을 포기해야 마땅하다. 그것이 인사청문회가 도입된 취지를 살리는 길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와대가 현병철 위원장의 임명을 강행한다면 그것은 인사청문회의 도입 취지를 무시하는 일이고, 더 나아가 인권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하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다. 인권위의 독립성을 훼손시킨 인물을 연임시킨다면 그동안 세계 각국에 독립적인 국가인권기구를 만들고자 했던 국제사회의 노력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다. 당연하게도, 이런 불행한 사태가 벌어져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


출처: 한겨레신문, 2012년 7월 10일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