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언론기고_mass media

[칼럼] 좋은 판결, 나쁜 사회

by transproms 2014. 4. 29.

[아침을 열며/2월 26일] 좋은 판결, 나쁜 사회



며칠 전, 과거사 재심 사건에서 무죄구형을 했다는 이유로 정직 4개월의 중징계 처분을 받은 임은정 검사에 대하여 징계 취소 판결이 내려졌다. 비단 이 문제뿐만 아니라, 세상의 오류를 바로 잡는 것은 법원의 중요한 임무 중 하나다. 법원이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시각에서 문제를 바로 잡아 주기에 사회가 갈 길을 잃고 방황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반가운 마음을 진정시키고 나니 왜 자꾸 이런 일이 법원에 의해서 해결되어야 하는지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법원의 역할은 생각보다 제한적이기 때문에 드는 생각이다. 첫 번째는 시간의 문제다. 재판은 기본적으로 느리고 원칙적으로 사후판단에 한정된다. 1심만 해도 수개월이 걸리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2심을 거쳐 최종판결이 확정되려면 3년 넘게 걸리는 경우도 허다하다. 늦게라도 잘못이 바로 잡힌다면 다행이지만, 최종판결을 받았을 때는 시기를 놓쳐서 이미 되돌릴 수 없는 피해가 발생한 경우도 많다. 그 기간 동안 당사자는 수많은 고통에 노출되기도 한다.


두 번째는 판결의 효과가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재판은 문제가 되는 모든 쟁점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법에 규정되어 있는 내용을 법리에 따라 다툴 뿐이다. 현대의 재판관들은 솔로몬처럼 관련된 모든 쟁점을 남김없이 고려하여 기발한 해법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잘 짜여져 있는 규칙을 해당 사안에 반영하여 결정을 내린다. 이 때 다소 간의 재량이 발휘되긴 하지만, 법적으로 쟁송화될 수 없는 것까지 판결에 고려하여 결정에 반영할 수는 없다. 징계무효소송이 대표적이다. 징계무효소송은 징계가 유효인지 무효인지를 다투는 소송이다. 재판관은 징계가 절차를 지켰는지, 과도하지는 않은지 등을 세심하게 살펴 징계의 유ㆍ무효를 판단한다. 하지만 징계가 유효하다는 판단이 내려졌다고 해도 법관이 그 징계가 최선이었다는 점을 보증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저 무효일 정도로 나쁘지는 않았다고 소극적으로 판단할 뿐이다. 어떤 수준의 징계가 바람직한지에 대한 판단은 여전히 법원이 아니라 사회가 짊어져야 하는 몫이다.


또한 징계에 대해 무효판결이 내려진다고 해도, 그것은 해당 징계를 소극적으로 무효화할 뿐 어느 정도의 징계가 적절한지를 적극적으로 제시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징계가 무효가 되었는데, 좀 더 약한 징계가 다시 내려지는 경우도 있다. 예컨대, '해임'이라는 중징계를 받고 3년 넘는 법정투쟁을 벌여서 간신히 무효판결을 받아냈는데도, '정직 6개월'의 징계처분을 재차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무효화시키려면 또 지난한 법정투쟁을 벌여 또 한 번의 무효판결을 받아내야 한다. 


법원이 문제를 시원하게 해결하지 못하는 것이 답답해 보이지만, 법원이 이렇게 자기제한적인 기능을 수행하도록 설계되어 있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실제로 민주적 법치국가가 사법부에 제한적인 기능을 부여한 것은 의도적인 것이었다. 만약 이런 제한장치가 없다면, 세상만사에 대한 실질적인 판단권한을 사법부가 갖게 되는 '사법통치 사회'가 될 것이다. 이럴 바에는 아예 사회의 모든 결정을 법원에 의해 사전심사를 받게 하거나, 아예 법원이 모든 문제를 대신 결정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든 문제는 정치와 사회가 1차적으로 결정하고, 사법부는 그것을 사후적이고 소극적으로 통제하도록 업무를 분담한 것이 민주적 법치국가의 대전제였다.


잘못된 징계, 잘못된 결정이 법원에 의해 바로 잡히는 것에 환호하는 것은 당연하다. 법원이 그런 역할을 해주기 때문에 우리 사회가 이만큼 굴러가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 환호 이전에 잘못된 결정을 내리는 나쁜 사회 자체를 바꾸는 것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나쁜 기관이 나쁜 마음을 먹고 당사자를 골탕 먹이려고 한다면 좋은 법원이 제 아무리 훌륭한 역할을 수행해도 그 효과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좋은 판결이 사회를 좀 더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주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좋은 판결이 나쁜 사회를 뛰어넘을 수는 없다.



홍성수 (숙명여자대학교 법학부 부교수)



출처: 한국일보, 2014년 2월 26일자

http://news.hankooki.com/lpage/opinion/201402/h2014022521042124370.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