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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문_comments

안전책임자의 지시에 따라야 하나?

by transproms 2014. 4. 30.

‘매뉴얼대로하면 죽을수도…’ 착해지지 마라. 매뉴얼대로 하면 목숨이 위태로운 끔찍한 아이러니, 현대문명이 가져온 안전의 사각지대 / 한겨레21 

http://h21.hani.co.kr/arti/cover/cover_general/36954.html



역대 한겨레21 기사 중, 이렇게 동의하기 어려운 기사는 처음이네요. 신윤동욱 기자나 코멘트를 한 고미숙 선생, 이동연 선생은 모두 제가 참 좋아하는 분들이지만, 이 기사 만큼은 정말 동의하기 어렵네요. 취지를 선해해서 읽어도, 오해의 소지가 너무 많은 기사라고 보여집니다. 


매뉴얼대로 했다가 생명을 빼앗긴 것을 아이러니로 지적한 것 까지는 충분히 공감할만 합니다.  기사의 표현 그대로 정말, "끔찍한 아이러니"입니다. 하지만, 위기상황의 대안은 좋은 매뉴얼로 체계적으로 준비하고 반복훈련해서, 위기 상황에서는 모든 사람이 안전책임자의 지시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게 맞습니다. "질서와 훈육만 강조하는 매뉴얼"(이동연)이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습니다. 위기상황에서는 훈육받은대로 안전책임자의 지휘에 따라 질서있게 움직여야죠. 이건 근대적 훈육이나 자본주의적 훈육의 문제와는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절차가 복잡해지면서 우리가 그것을 시작한 이유인 근본은 없어져버렸다"(고미숙)고요? 이번 사건이 무슨 복잡한 매뉴얼에 따르다가 근본을 읽어버린 문제인가요? 매뉴얼대로 움직이지 않은 선장과 선원들, 매뉴얼대로 점검하지 않은 배, 매뉴얼대로 펼쳐지지 않은 구명보트가 일차적인 문제죠. 매뉴얼 내용의 극히 일부인 "선장 지시에 따르라"는 것만 지켜졌고, 안타깝게도 그것이 참사를 부른 원인이 되었지만, 그것은 매뉴얼 내용 중 '문제'라고 지적될 수 없는 부분이라는 겁니다. 물론 "매뉴얼대로 해야한다"는 테제 자체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은 끊임없이 고민해 봐야겠지만, 최소한 이번 세월호 사건이나 한국의 일반적인 안전불감증 문제를 놓고 이야기될 수 있는 주제는 아니라고 봅니다. 차라리 신자유주의의 야만이 근본(인간존중)을 상실하게 했다고 한다면, 인문학적/사회과학적 비판으로는 충분히 의미가 있을 겁니다. 그런 근본문제를 건드리는 것도 의미가 있으니까요.


또한, 매뉴얼에 따르는 것을, “인간의 무의식적 야생성을 죽여버린 사회”(고미숙)라거나, "스스로의 판단에 대한 존중"(신윤동욱)의 문제로 보면서, 창의성이나 자율성과 대비시키는 것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창의력은 유연하면서도 잘 짜여진 매뉴얼을 만드는 과정에서, 또는 위기책임자가 예외적인 상황에서 매뉴얼에 없는 판단을 해야 할 때, 또는 안전책임자가 없는 고립된 (재난영화에 흔히 나오는) 상황에서나 필요한 것이지, 위기상황에서 일반인은 매뉴얼과 책임자의 지시에 따라 움직여야죠. 그 위급한 상황에서, 수십, 수백명의 사람들이 자체 판단에 따라 "야생성"을 발휘하거나 "스스로의 판단"으로 각자 움직인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거야말로 끔찍한 일입니다. 위기상황에서 일반인에게 필요한 덕목은 구명조끼 입는 방법이나 산소호흡기 장착하는 방법을 잘 숙지해 놓고 있다가, 선장/기장이 지시를 내리면 재빨리 이행하는 것 뿐입니다. 육지가 아니라, 하늘이나 바다와 같이 일반인이 상황판단을 하기 어려운 환경에서 운행되는 교통수단이라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매뉴얼과 안전책임자에 대한 신뢰가 무너진게 이번 사고의 또다른 큰 손실이고, 그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해야지, "착해지지 마라", "위기 상황에서 스스로 잘 판단해라"가 대안일 수는 없다고 봅니다. 신뢰받는 안전책임자를 사회 곳곳에 배치하는 것, 이번에 무너진 신뢰를 회복하는 일이 결코 쉽지 않겠지만 그것만이 대안이라고 봅니다.


이 문제에 관련해서는 박권일 선생이 공교롭게도 '한겨레신문' 지면에서 기고한 글이 있더군요. 더하고 뺄 것도 없이,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럼에도 논점을 지시이행 여부로 좁혀버리는 이런 관점에는 두 가지 이유에서 동의하기 어렵다. 첫째, 사태의 인과관계를 뒤틀어 버린다. 피해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진 직접적인 원인은 승객의 고분고분한 순응이 아니라 선장의 치명적인 판단 착오였다. 더 명확히 말하자면 ‘선장 지시를 따랐기 때문에’ 사람들이 죽은 게 아니라, ‘선장이 잘못된 판단을 했기 때문에’ 그들이 죽었다. 둘째, 이런 관점은 자력구제를 승인하고 강화하는 기능을 한다. 책임자의 지시에 순응하는 바람에 죽었다는 서사는, 풍자나 역설일지라도 결과적으로 ‘자력구제 하라’는 메시지를 정당화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선박과 항공기처럼 고립된 운송수단에서 사고가 발생할 경우 지식과 경험을 지닌 운항 책임자의 명령에 따르는 것은 대체로 반대의 경우보다 생존 확률을 높인다. ‘세월호 이후’에도 마찬가지다." (박권일, 자력구제가 답인가?, 한겨레신문, 링크)


아울러,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재난을 예비하고 생명을 살리는 일에 자본과 관료가 돈을 들일 아무런 동력이 없다”(고미숙)는 지적도 일면적이라고 생각됩니다. 쉽게 말해서, "사고 낸 기업은 망하도록" 시스템을 짜 놓으면 자본이 이윤추구를 위해 스스로 안전에 신경을 쓰게 됩니다. 이런 구조가 잘 갖춰지면, 관료가 어설프게 일일히 통제하는 것보다 자본은 스스로 더 지독하게 안전문제에 조심하게 되죠. 그런 자본의 속성도 이용해야 합니다. 실제로 안전선진국에서 기업들이 안전을 중시하는 것은 안전을 경시하는 것이 자본의 이익에 반하도록(엄청난 벌금이나 손해배상, 또는 사회적 비난으로 장사가 안되도록) 구조화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렇게 시스템을 짜 놓아도, 자본은 멍청하게 (즉 이윤추구에 역행하는데도) 사고를 냅니다. 그래서 자율규제에만 맡길 수는 없고, 국가의 강제적 규제도 필요한 것이고요. 이 두 가지가 잘 병행되어야죠. 안전문제에 관한 한, (이윤추구밖에 모르다가 사고를 내는 멍청한) 자본을 적절히 규제하는 것도 필요하고, (이윤추구를 위해 사고예방을 위해 노력하는 합리적인) 자본의 속성을 적절히 잘 활용하는 것도 필요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