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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기고_mass media

[기고] 위험사회와 인권, 민주주의

by transproms 2014. 6. 27.



위험사회와 인권, 민주주의



홍성수 (숙명여대 법학부 교수, 천주교인권위원) 



세월호 참사 등 계속되는 대형사고를 두고 ‘위험사회’라는 담론이 다시 관심을 끌고 있다. 그 대표적인 논자인 울리히 벡(Ulrich Beck)의 통찰을 요약하면 대략 이렇다. 근대시민혁명을 통해 성립된 근대국가의 제 1목표는 시민의 안전이었다. 한편으로는 발전된 과학기술을 통해 자연재해 등의 위험요소를 통제할 수 있게 되었고, 다른 한편 근대시민혁명을 경유하면서 국가는 시민 안전을 보호할 의무를 떠안게 된 것이다. 실제로 대부분의 국가들은 시민의 안전을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그것이 국가의 존재이유이고, 국가가 안전보장에 실패한다면 국가와 시민이 맺은 사회계약은 무효가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위험사회론이 빛나는 이유는 근대사회에서의 위험이 성공적으로 통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발전된 근대사회, 이른바 ‘2차 근대’의 시기에는 새로운 위험에 직면하게 된다는 점을 지적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것이 원전, 광우병, 신종 전염병, 유전자조작식품, 기후변화, 지구온난화, 금융불안, 국제테러 등이다. 이러한 위험에 대해 국가는 통제할 의사도 능력도 없고, 보험제도 등을 통한 통제 역시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 위험이 잠재되어 있고 직접적이진 않아서 시민들이 그 위험을 잘 인식하기 어렵고, 특정인에게 책임을 묻기도 어려우며, 국경을 넘나드는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통제가 쉽지 않기도 하다.


하지만 한국사회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고들은 이러한 2차 근대의 위험에 해당한다고 보기 어렵다. 건물과 다리가 무너진다거나, 가스가 폭발한다던가, 배가 침몰한다는 것은 현대과학기술로 얼마든지 통제할 수 있는 문제고, 근대국가가 충분히 예방할 수 있는 사고들이기 때문이다. 한국이 OECD 산재사망 1위, 자살률 세계 1위, 교통사고 사망률 세계 1위라는 불명예를 뒤집어 쓰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에 놓여 있다. 요컨대, 한국이라는 국가는 구시대적인 위험조차 통제하지 못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한국이라는 국가는 구시대적인 위험조차 통제하지 못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그렇다고 한국사회가 위험사회론에서 얘기하는 새로운 위험으로부터 자유로운 것도 아니다. 이미 한국사회의 경제발전, 과학기술발전의 수준은 2차 근대의 위험을 창출하는데 있어 부족함이 전혀 없는 수준이다. 실제로 광우병소고기가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기도 했고, 원전 수출이 가능한 6개 국가 중 하나이며, 세계 2위의 유전자조작식품 수입국가이면서, 세계금융위기, 기후변화, 지구온난화로부터도 결코 자유롭지 않다. 즉, 한국사회는 여전히 1차 근대의 위험을 통제하는 수준에 이르지 못했으면서도, 2차 근대의 위험에 동시에 직면했다는 점에서 ‘이중고’를 겪고 있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위험이 결합되어 시너지 효과를 내면서 그 위험의 정도가 더욱 증폭된다. 위험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면 시민사회는 구시대적 위험과 새로운 위험에 모두 무감각해지고, 시민적 통제의 가능성도 점점 낮아진다. 2차 근대의 위험 그 자체가 증대되기도 한다. 예컨대, 원전을 아무리 잘 관리해도 위험이 있을 수밖에 없는데, 원전의 도입·관리·감독과정이 비리와 부정부패로 얼룩져 있다면 그 위험은 더욱 증폭되기 마련이다.



여전히 1차 근대의 위험을 통제하지 못하고, 동시에 2차 근대의 위험에 직면해있는 한국사회


위험사회론 자체가 상당히 발전한 서구국가의 현실을 두고 발전시킨 논의이기에 한국의 현실에 적용하기에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논자들은 한국사회를 놓고 ‘악성 위험사회’(홍성태), ‘특별한 위험사회’(울리히 벡)라는 식으로 위험사회 앞에 수식어를 붙이기도 한다. 한국사회가 이렇게 고도의 위험사회가 된 이유는 무엇보다 압축근대화다. 다른 나라가 100년 넘는 기간에 걸쳐 달성한 근대화를 불과 20-30년 만에 완수하다 보니 곳곳에서 구멍이 생긴 것이다. 차분하게 성찰하고 대비할 기회를 충분히 갖지 못한 채 다음 단계로 넘어가게 된 것이다. 즉, 국가가 시민의 안전을 지키는 과업을 달성하는데 성공하고 난 후에도, 새로운 위험의 창출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 위험사회론의 핵심인데, 우리는 그 수준에 도달하지 못한 상황에서 새로운 위험에 직면하는 수준으로 급격하게 발전해 나갔다는 얘기다.



한국사회가 고도의 위험사회가 된 이유는 무엇보다 ‘압축근대화’ 


이렇게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는 중층적이고 복합적이지만, 해법은 비교적 명확하다. 한편으로는 압축근대화에서 후순위로 밀렸던 가치를 재복원하는 것이다. 즉, 경제성장의 논리에 희생되어왔던, 생명, 안전, 행복 등의 삶의 가치를 다시금 최우선적 가치로 내세워야 한다는 것이며, 실은 이것이 바로 ‘인권’이다. 통제가능한 사고에 의해 비극적인 죽음을 당하지 않고 소중한 생명을 보존하는 것이야말로 인권의 가장 기본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목표가 ‘사고예방’에만 한정된다면 사고조차 예방하기 어렵다는 점에 있다. 물론 사고위험을 막기 위한 기본적인 사회시스템을 짜는 일이 1차적으로 중요한 일이겠지만, 자기가 선택한대로 말하고 행동할 수 있고 (자유권), 인간다운 삶이 가능한 조건을 제공받고 (복지권), 치료가능한 질병에 고통받지 않고 (건강권), 노동자로서 존중받으며 일하다가 다치는 일이 없으며 (노동권), 소수자가 차별받지 않는 (평등권) 사회가 되어야, 인간존엄의 가치가 확고하게 자리잡을 수 있고, 이 때 인간의 안전‘도’ 자연스럽게 확보될 수 있다는 것이다.


 

통제가능한 사고에 의해 비극적인 죽음을 당하지 않고 소중한 생명을 보존하는 것이야말로 인권의 가장 기본 


다른 한 편으로는 이러한 인권의 이념들이 국가에 실질적으로 영향력을 가져야 한다. 다른 말로 하면 ‘민주주의’를 심화시키는 것이다. 어떠한 쟁점이건 정부는 자신의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해야 하고, 시민들은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하고 토론하고 그 과정에서 도출된 의견들이 국가를 실질적으로 제어할 수 있어야 한다. 실제로 울리히 벡 같은 이들도 위험사회를 극복해나가는 대안으로 일반 시민들의 ‘참여’를 통해 국가를 시민들의 통제 하에 놓는 ‘성찰적 근대화’를 제시한다. 사실 이러한 과제들은 우리 시민사회가 끊임없이 수행해 왔던 일들과 일맥상통한다. 제주에 해군기지를 건설하고 밀양에 송전탑 설치하겠다는 국가에 맞서, 노동자들의 권리를 탄압하는 기업에 맞서, 아래로부터 형성된 힘으로 삶의 가치를 지키겠다는 나선 운동들이야말로 민주주의의 과제에 정확히 부합하는 것들이다.



경제성장의 논리에 후순위로 밀렸던 생명, 안전, 행복 등의 가치- 즉 인권을 복원해야 한다


세월호 참사를 겪은 직후, 인권에 우선적 가치를 부여하던 사람들이 더욱 적극적인 행동에 나서고 있다.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안전문제는 그 자체로 인권과 민주주의의 문제이고, 세월호 참사에 분노하고 시민행동을 조직하는 것은 항상 해오던 실천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몇몇 사람들은 분노와 더불어 극심한 무력감, 자괴감이 겹치면서 극도의 심적 고통을 겪고 있기도 하다. 아마 그동안 그렇게 분투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 사회의 가치 정향을 바꿔놓지 못했고, 그것이 세월호 참사로 이어진 한 원인이 되었다는 점에 대해 무한한 책임을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한 책임감을 느끼고, 그 생각을 행동에 옮기는 사람들의 숫자가 늘어나는 정도에 비례해서 우리 사회는 좀 더 ‘안전’해질 수 있을 것이다. 





* 출처: 교회와 인권 (천주교인권위원회 월간 소식지), 216호, 2014년 5월 

http://www.cathrights.or.kr/news/articleView.html?idxno=52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