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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사회_UK

지상 최대의 정치쇼, 영국 여왕 의회 개원 연설 (Queen's Speech)

by transproms 2015. 5. 29.


지상 최대의 정치쇼, 영국 여왕 국회 개원 연설 (Queen's Speech)



2015년 5월 27일, 영국 여왕 의회 개원 연설 (Queen's Speech)이 거행되었다. 의회 개원 행사(State Opening, 의원내각제 국가에서 의회 개원은 곧 행정부가 일을 시작하는 것과 동일)의 하이라이트는 여왕이 의원들 앞에서 주요 입법/정책과제를 발표하는 연설이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직접 읽지만, 내용은 정부여당에서 작성하는 것이다."왕은 군림하나 통치하지 않는다"


여왕의 연설 중 거의 모든 문장은 “나의 정부는 ~~을 할 것이다”(My government will ~)로 시작된다. “나의 정부”라니 ^^;; (여왕의 연설 전문 링크) 이 때 발표된 입법/정책 과제들을 놓고, 1년간 의회가 토론을 벌이고 법안을 통과시키게 된다. 여왕의 연설은 귀족원에서 거행되며, 귀족원, 평민원 의원들 뿐만 아니라, 판사, 대사 등의 손님도 초대된다. 영국의 3대 권력인 군주, 귀족원, 평민원이 한데 모이는 유일한 날이기도 하다.


이 연설은 단순히 낭독식이 아니라, 다양한 의식을 통해 영국 의회의 전통을 보여주는 정치‘쇼’다. BBC는 '여왕의 연설'이라는 이 거대한 정치쇼를 "영국 의회 개원 행사에서 가장 영국적인 장면"(the most British bits)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쇼 자체가 영국 의회 정치의 역사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 의회 개막행사는 16세기에 기원을 두고 있고, 지금과 같은 세레모니는 1852년부터라고 한다. 여왕의 연설 행사는 대략 이런 순서로 진행된다.



1. 여왕이 오기 전에 의회 지하실을 수색한다

여왕이 도착하기 전에 여왕의 호위병(Yeomen of the Guard)이 폭발물이 있는지 살펴본다. 이것은 영국 가톨릭 교도들이 제임스 1세와 의회를 폭발하려는 시도(Guy Fawkes’s gunpowder plot of 1605)를 재현하는 것인데, 이건 어디까지나 ‘쇼’이고 아마 실제 보안점검은 별도로 진행될 것이라고 생각된다.


호위병들의 수색 장면. 나름 진지하다 (*사진 출처: UK Parliament, 링크)



2. 여왕이 무사히 귀환할 때까지 왕궁에 의원을 인질로 잡아 놓는다

여왕이 버킹검궁을 나서기 전에 하원의원 중 한 명을 버킹겅궁에 인질로 잡아 놓는다. 여왕이 의회에 갔다가 다시 궁에 돌아올 때가지 감금하는데, 이것은 의회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찰스 1세 때부터의 전통이라고 한다. 의회에 출두한 왕이 무사히 귀환할 때까지 의원 한 명을 인질로 붙잡아두는 것이다. 오늘날 불쌍하게도(?) 인질 역할을 하는 사람은 보통 여당 측 원내 대표단 막내다. 당연히 현직 의원이다. 



3. 드디어 여왕의 의회 출두

여왕은 버킹검궁을 출발하여, 호위병들을 거느리고 의회의 "군주의 입구"(Sovereign’s Entrance, 빅벤 반대쪽 빅토리아 타워)에 도착한다. 여왕은 왕관(Imperial State Crown)과 제복(Robe of State)을 입고 귀족원 앞자리에 착석한다. (*런던에 오면 다들 '근위병 교대식'을 보려고 하는데, 사실 별 거 없다. 만약 이날을 맞춰서 올수 있다면, 이 흔치 않은 여왕의 행렬이 더 볼만 할 것이다)




백마가 끄는 마차를 타고 의회 출두 중인 여왕. 이 마차의 이름은 "The Diamond Jubilee State Coach". 여왕 80세 생일 기념으로 제작되어 작년부터 운행을 시작한 신형 마차다. 역사/전통을 활용하여 이야기 거리를 만들기 좋아하는 영국스럽게도, 이 마차에는 뉴튼의 사과나무의 일부, 수상 관저의 나무문 일부, 런던탑의 일부, 넬슨제독이 탔던 배의 나무조각 등이 활용되었고, 자동창문, 난방장치, 유압식 완충장치 등 '현대적'인 기술도 접목되었다고... 평소에는 London Mews에 전시되어 있고, 국빈초청을 받아서 가면 여왕하고 함께 탑승해볼 수도 있다고 하니, 탑승해 보고 싶은 분들은 왕실에 국빈초청을 요청해 보시면 되겠다. (*사진 출처: © Press Association, 링크)



의회에 진입하고 있는 여왕 행렬(Royal Procession) (*사진 출처: UK Parliament, 링크)



4. 평민원 의원들을 불러온다

여왕은 귀족원에 앉아 있는 상태, 블랙 로드(black rod, 의회에서 여왕의 대리인으로서 귀족원 의원)에게 평민원 의원들을 불러오라고 명령한다. 하지만 블랙로드의 면전에서 평민원의 출입문은 굳게 닫힌다. 이것은 군주로부터 독립된 평민원의 위상을 상징하는 것이다.시민대표인 평민원 의원은 군주가 마음대로 오라가라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뜻이라고나 할가? 블랙로드가 정중하게(!) 3번 노크를 한 후에야 문이 열리고, 블랙 로드는 평민원 의원들에게 여왕이 부른다고 알린다.


아주 진지하게 문을 세 번 두드리고 있는 블랙 로드 (*사진 출처: UK Parliament, 링크)


평민원에 가서 여왕의 호출을 전하고 있는 블랙 로드 (*사진 출처: UK Parliament, 링크)



5. 평민원 의원들 귀족원 입실과 여왕 연설

이제 드디어 의원들은 블랙로드를 따라 귀족원으로 향한다. 수상과 야당 당수가 앞장서고, 나머지 의원들이 걸어서 이동한다. 평민원과 귀족원은 약간의 거리를 두고 일직선상에 있기 때문에 그냥 주욱 걸어가면 된다. 귀족원에 도착한 의원들이 여왕이 있는 자리의 반대편에 서서 연설을 듣는다. 여왕이 연설을 마치고 버킹검 궁으로 떠나면, 이제 본격적으로 의회가 활동을 시작한다. 첫번째 토론 의제는 당연히 "여왕의 연설"에 담긴 내용이다. 



화려한 의자에 착석한 여왕. 왼편에는 남편인 필립 공이 앉아 있고, 오른 편에는 70세가 다 되어가도록 아직 왕위를 이어받지 못한, 고 다이애나의 전 남편 찰스 공. 영국 역사상 최고령 왕세자 기록을 게속 갱신 중이다 (http://www.bbc.co.uk/news/uk-politics-32894214)


연설 중인 여왕. 전통인지, 여왕이 고령이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암튼 저렇게 앉아서 연설을 한다. (*사진 출처: UK Parliament, 링크) 연설을 직접 들어보시고 싶은 분은 아래 링크 참조. (http://www.bbc.co.uk/news/uk-politics-32894214) 엘리자베스2세 여왕은 올해로 89세 고령(1926년생)인데도 발음이 또렷하고 당연히 영국 표준 발음을 구사한다. 참고로 영국 표준발음은 흔히 "the Queen's English", "Oxford English", "BBC English" 등을 말한다. 몇 년 전부터 '낭독'할 때 안경을 착용한다. 고령으로 시력이 나빠진 모양이다. 


여왕의 연설을 진지하게 듣고 있는 평민원 의원들. David Cameron 수상과 연정 파트너인 자유민주당 당수 Nick Clegg (오른편), 제1야당인 노동당 당수 Ed Miliband(왼편)가 나란히 서 있다. 2014년 Queen's Speech 사진이라 당시 상황이고, 2015년 총선에서 수상은 재선에 성공했지만, 나머지 두 지도자는 총선 참패로 사임한 상태다. 한편, 앞쪽 왼편에 제복을 입은 사람이 평민원 의원들을 모시고 온 블랙로드. (*사진 출처: UK Parliament, 링크)



이번 2015-2016 여왕 연설에서는 총 26개의 입법과제가 발표되었다. 주요 내용은 유럽연합 탈퇴 국민투표 추진 방안, 이민 통제, 5년간 소득세/부가가치세/연금 인상 금지, 무상보육 확대, 공립학교 확대, NHS 개선, 지방분권 강화, 일자리 창출 등의 안이 담겨 있다. 이걸 가지고 의원들은 1년 동안 치고받고 싸우게 될 것이다.


여왕 연설은 언제나 이런 말과 함께 마무리된다.


Other measures will be laid before you.

My Lords and members of the House of Commons

I pray that the blessing of almighty God may rest upon your counsels.


신의 가호가 함께 하길 빌며, 자기가 제시한 법안/정책들에 대한 세부사항은 의원들이 알아서들 하라는 뜻이다 .... @.@


이러한 요란스러운 의식이 의회 전통을 지켜온 자부심의 표현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고, 불필요한 요식행위에 불과하다고 비판적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영국의 입헌군주제 에 대해서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해온 Guardian은 여왕 연설을 두고, <이러한 겉치레가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링크)>라는 비판적인 기사를 게재하기도 했다. 이 요란스러운 행사를 두고 갑론을박이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이겠지만, 어쨌거나, '여왕 연설'이 - 중립적인 의미에서 - '지상 최대의 정치쇼'라는 것에는 다들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까?





*참조: 상원과 하원의 공식명칭은 귀족원(House of Lords), 평민원(House of Commons)이다. 이 중 선출직인 평민원이 우리가 생각하는 의회이다. 흔히 수상 또는 총리라고 번역되는 정부의 수장(Prime Minister)도 당연히 평민원의 여당 의원(당수)이다. 임명/당연직인 귀족원은 보충적인 역할에 불과하며, 법안 처리를 약간 지연시키는 역할 정도를 한다. 상원(Upper House)과 하원(Lower House)이라는 표현도 사용되지만, 마치 이 두 기관이 동등한 지위를 분담하고 있거나 상원이 더 우위에 있는 것처럼 오해해서는 곤란하다. 실제로 공식문서나 언론에서는 언제나 귀족원/평민원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런던여행 정보: 런던에 오시면 국회의사당(The Palace of Westminster / Houses of Parliament)은 꼭 가보시길. (참조 링크) 매주 토요일이나 의회가 휴회할 때 방문 가능 (예약 필수). 오디오 투어도 있지만, 가이드 투어가 더 추천할 만하다. 역사 이야기를 곁들여 참 재밌게 잘 설명해준다. 가격이 좀 비싼게 흠 (25파운드 ㅠ) 아무래도 링크한 동영상 등을 참조해서, '여왕 연설'이나 영국 역사를 조금 알고 가면 더 재미있을 것이다. 


* 위에 실린 사진은 마차 사진을 제외하고는 모두 2014년 사진이다. 아직 2015년 사진이 업데이트되지 않아서;; 의식은 매년 똑같기 때문에 사진도 매년 대동소이하다.


* 참고자료: 이 글이 참조한 자료 목록 
http://www.bbc.co.uk/news/uk-politics-32886236 - Queen's Speech 전체를 간략히 소개한 동영상
http://www.bbc.co.uk/programmes/b00g4vn9 -2015년 의회 개원 행사에 대한 동영상
http://www.theguardian.com/politics/2015/may/27/queens-speech-state-opening-parliament-pomp-guide - 가디언의 Queen's Speech 소개
http://www.parliament.uk/about/how/occasions/stateopening/ - 의회 개원 행사에 대한 의회 공식 홈페이지의 소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