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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문(법)_comments(law)

강남역 사건은 여성혐오범죄인가?

by transproms 2016. 5. 19.

강남역 사건이 여성혐오범죄 여부에 대해서 논란이 있는 듯 한데, 혐오표현/범죄 연구에 3년 째 매달리고 있는 입장에서, 혐오범죄인지 여부를 가리는 간단한 판단기준과 혐오범죄를 심각하게 보는 이유를 간략히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범죄의 대상이


'특정인' vs. '여성 중 아무나'
'아무나' vs. '여성 중 아무나'


강남역 사건이 후자를 대상으로 삼았다면, 여성혐오범죄로 보는 것에 무리가 없다고 봅니다. 한국법에서는 별도 구성요건이 있어서 법정형이 다른건 아닌데, 양형에서 이 부분이 어떻게 고려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또한 몇몇 국가들처럼 '혐오범죄가중처벌법'이 있다면, 일반범죄냐 혐오범죄냐가 법적으로 중요하게 되는데, 이건 범죄자의 '동기'를 분석해서, 가중처벌을 범죄자에게 귀속시키는 문제여서 무척 복잡하고 까다로운 문제입니다.


혐오범죄(hate crime)의 해악을 중하게 보는 이유는, 대개 어떤 (정당하진 않지만) 분노에 기반해 있기 때문에 범죄양태가 잔혹한 경우가 많고, 어떤 집단(여성) 일반을 대상으로 삼기에 그 집단이 속한 모든 구성원들이 공포에 시달려야 한다는 점에 있고요. 불특정인을 대상으로 하는 '묻지마 폭력'이면 잠재적 대상 범위가 한국인 전체가 되니까 '내 문제'로 여겨질 가능성이 낮아집니다. 그런데 여성, 외국인, 성소수자, 무슬림 .. 이런 식의 특정 집단을 향한 범죄가 빈발하면, 그 집단 구성원들에게 당장 '내 문제'가 되는 겁니다.


* 그래도 잘 이해가 안가시면, 어떤 나라에 이민을 갔는데 오로지 '한국 출신'이라는 이유로 폭력을 가하는 범죄가 빈발하는 상황을 가정하시면 됩니다. 그래도 그 나라에서 살만할 것 같다고 생각하신다면, '오버'하지 말라고 말할 자신이 있다면, 이 문제도 심각하게 안보시겠죠.


** 사건 하나 가지고 너무 오버하는거 아니냐고 하시는 분들도 있던데, 그건 혐오범죄가 그만큼 심각하고 확산가능성이 높은 범죄유형이라서 그렇습니다. 더욱이 요즘처럼 사회불만이 증폭될 수 있는사회경제적 환경(예: 취업난, 불황 등)은 소수자에 대한 혐오범죄가 싹트기에 좋은 토양을 제공합니다. 혐오감정이 표현되고 폭력으로 나아가고 심지어 홀로코스트 같은 대량학살로 나가는 것은 '순식간'이죠. 일단은 이런 문제에 단호하게 대처하겠다는 사회분위기 조성이 중요합니다. 시민사회의 역할이 중요하고 정치인들도 방향을 잘 잡아야죠. 그런 점에서 '황산테러'에 대해 대통령이 취한 입장은 매우 유감스러운 것이었습니다. 황산테러 사건과 혐오범죄에 대해서는 아래 칼럼 참조.


홍성수, "혐오범죄, 대통령의 입장은" / 한국일보 http://www.hankookilbo.com/v/4f55539e2c794e4fb1ebc43293390090

*** 처음 올렸던 본문에서는 강남역 사건이 혐오범죄라고 단정하는 입장 같이 비춰져서 오해의 소지가 좀 있는데, 이 사건과 관련하여 혐오범죄 성립 여부에 집중하는 것은 그리 적절치 못해 보입니다. 이 사건이 혐오범죄로 불릴 수 있을지 여부나 '범죄원인'은 지금 단계에서 논하기 어려울 문제일 뿐만 아니라, 사실 가해자 개인에 대한 자세한 정보 없이는 판단하기도 어려운 문제입니다. 그보다는 이 사건을 둘러썬 사회의 반응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쨌든 범죄자는 "여자들에게 항상 무시당했다"고 언급했고, 그 언급은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고,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분노했습니다. 전형적인 혐오범죄의 양태(대상 집단의 공포와 분노)가 나타난거죠. 그런 분노를 둘러싼 사회적 맥락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 자체를 혐오범죄로 규정할 수 없어도 이 사건과 그에 대한 반응의 중요한 의미를 살펴야할 이유는 충분하고도 남습니다. 사건 자체의 성격 규정보다는 이 사건에 대한 반응을 통해 드러난 여러 문제에 주목해야합니다.

이쯤되면, "그거야 실제로 혐오범죄여서가 아니라, 혐오범죄로 규정했기 때문 아니냐"고 반론을 제기하겠죠. 천만의 말씀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여성이 남성을 살해했고, '남성에게 항상 무시당했다'고 진술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나서서, "이것은 남성혐오범죄다"라고 규정했습니다. 그렇다면 남성들이 지금처럼 분노할까요? "밖에 돌아다니기가 무섭다"며 공포에 떨까요? 혐오범죄적 양태가 나타나지 않을 겁니다. 아무리 '남성혐오범죄다'라고 규정해도 별 파급력을 갖기 어렵다는 겁니다. 강남역 사건이 단순히 '한 사건'이라고 하기에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엄청난 파급력을 보여준 것은, 이 사건이 어떤 '맥락'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즉, 이미 우리 사회가 여성혐오가 만연해 있고, 사회적 '힘'을 가지고 있고, 이미 여성들에게 위협이 되고 있는 상황에서, 강남역 사건은 그 '결과'이거나, 아니면 문제를 더욱 '증폭'시킨 것일 뿐입니다. 아무런 맥락 없이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는 겁니다. 마지막 질문. 강남역을 굳이 찾아가 추모하고 인터넷에서 분노와 공포의 글을 남기는 그 수많은 사람들이, 여성혐오범죄가 아닌데도 누군가가 혐오범죄로 규정했기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정신병력 때문이니 혐오범죄가 아니니까 오버하지 말라고 하면, "아, 그렇군요"하고 진정될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