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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문(법)_comments(law)

여성혐오표현/여성증오범죄의 일반성과 특수성

by transproms 2016. 5. 20.
<여성혐오표현/여성증오범죄의 일반성과 특수성>

혐오표현 중 여성혐오표현은 다소 독특한 지위에 있습니다. 일반적인 혐오표현은 그 표적집단(특정된 소수자집단)의 정체성을 부정하고 구성원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선언입니다. "성소수자는 치료대상"이라고 주장하거나(정체성 부정), 이주노동자들에게 "니네 나라로 가라"(구성원 지위 박탈)로 하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김치녀'로 대표되는 여혐은 이와는 좀 다른 양상을 보입니다. 여혐은 여성 내부를 분리해서 접근하기도 합니다. 여혐주의자들은 '일부 여성'이 문제일 뿐이라고 틈만 나면 주장하죠. 근데 호모포비아들은 자기 자식들에게도 '치료 받아라'라고 합니다. 집단정체성도 다릅니다. 소수자들이 대개 공통의 정체성을 강하게 공유하고 있는 반면, 여성집단은 내부가 단일하다고 보기 어려운 측면이 있습니다.. 이 때문에 여성집단 내부의 이질성에 착목하는 소위 '포스트모던 페미니즘'이 등장하기도 한거죠. 그래서 저는 여혐에 대한 자문요청은 정중히 거절해왔습니다. 혐오표현 일반과 공통점이 있지만, 특수성이 많아서 저보다는 여혐 전문가들이 답해주시는게 나을 것 같아서 말이죠.


근데 증오범죄의 양상은 여성증오범죄가 다른 소수자에 대한 증오범죄와 매우 유사하게 나타났다는게 좀 충격적이었습니다. 어떤 집단 구성원에 린치를 가하고, 그 집단 구성원들이 '나의 일'로 여기게 되는 것은, 해당 소수자집단이 오랫동안 차별과 폭력에 고통받아왔고, 그로 인해 집단적 정체성이 공고해졌을 때나 나타나는 현상이거든요. 솔직히 한국의 '여성 집단'이 이 정도로 반응할 줄을 몰랐고, 나름 전문가 행세를 하고 다니는 저로서는 깊이 반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비유하자면, 땅 밑으로 어떤 용암이 흐르고 있던 겁니다. 여성들은 대개 그것을 인지하고 있었지만, 지금까지는 산발적인 문제제기에 그쳤던 겁니다. 하지만, 이번 사건을 통해 제대로 폭발하게 된 것이죠. 강남역 사건은 그런 계기를 제공해준 것이고, 그로 인한 반응을 주의깊게 보는 것이 매우 중요해 보입니다. 그런 점에서 해당 사건 자체가 증오범죄의 구성요건에 해당하는지 여부는 (사실 실정법이 없어서 법적 실익도 없습니다. 양형에 영향을 어떻게 미칠지는 미지수고요) 부차적인 문제죠. 설사 그 사건 자체가 증오범죄가 아니라고 해도, 이 사건으로 나타난 후폭풍의 의미는 전혀 삭감돼지 않거든요. 그런 점에서 일부 전문가들이 "증오범죄라고 보기 어렵다"라고 진단한 것은 나름대로의 판단이겠지만, 저는 기다 아니다로 몰고가면 곤란하다고 봅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사회적 현상으로서 증오범죄로 보기에 무리가 없다는 식으로 페북에 적기도 했지만, 어제부터 걸려온 기자들의 전화에 대해서는 "사건 자체가 증오범죄인지 여부는 지금 굳이 가릴 문제도 아니고, 굳이 답하지 않겠다"고 다른 논점만 얘기하기도 했었습니다.


땅 밑에 용암이 흐르고 있다면, 당연히 그걸 제거하는게 근본적인 해결방법이겠죠. 거대한 화산폭발이 있었다고 그것만 잡으려고 하면 안될겁니다. 용암의 존재를 확인한 이상 용암이 화산폭발 같은 극단적 형태로만 분출하는게 아니라는 점을 직시해야 합니다. 즉, 혐오는 살인과 같은 강력범죄뿐만 아니라 그보다 낮은 수위의 여러 종류의 폭력이나 차별 등으로도 쉽게 이어집니다. 그런 점에서, '강력범죄'에 대한 대응책 (예컨대 치안 강화) 마련에만 집중하는 것은 - 물론 그것도 필요하지만 - 적절치 않습니다. 여성들이 처해있는 여러가지 차별과 적대, 공포의 원인을 해결해야 문제의 근원을 해결할 수 있겠죠. 또한 이 사건은 다른 소수자에 대한 혐오도 얼마든지 이렇게 '물리적 폭력'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여성 뿐만 아니라, 성소수자, 장애인, 이주노동자, 무슬림 등 한국에서 취약한 지위에 놓여 있는 소수자들은 이미 혐오표현에 노출되어 있으며, 언제든 그런 폭력과 차별의 희생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제 정말 절박한 심정으로 우리 사회의 혐오와 차별, 적대와 폭력에 맞서야 합니다.


* 저는 hate crime는 증오범죄라고 옮기는게 좋다고 합니다. 혐오의 격정적인 상태가 물리력으로 귀결되는 hate crime의 속성상 혐오범죄보다는 증오범죄가 그 문제양상을 제대로 옮긴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반면, hate speech는 그런 '감정의 강도'가 낮은 차별적 혐오표현 (학술적 진술, 나라 걱정 등으로 위장한 것들)도 포괄해야 하기 때문에, 혐오표현이 더 적절해 보이고요. 다만, 같은 영어 단어를 다르게 번역해야 한다는 부담이 좀 있긴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