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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문(법)_comments(law)

강남역 사건이 '증오범죄'가 아니라면?

by transproms 2016. 5. 23.

<강남역 사건이 '증오범죄'가 아니라면?>


답: "그렇다고 해도, 이 사건의 중요성을 훼손하지 않는다."


경찰이 증오범죄가 아니라고 밝힌 모양이네요. 어제 모르는 번호 전화가 여러통 와서 못(안)받았는데... 아마 그것 때문에 기자들이 전화한 것 같네요...;;


여튼 이럴 줄 알고 미리 여러번 강조했지만, '증오범죄'인지 여부는 특별한 의미를 가진 이 사건에서 중심 의제가 아닙니다. 그래서 증오범죄인지 아닌지에 너무 매몰되어서는 안된다고 했던 것이고요. 다시 한번 반복하면 이렇습니다. 일단 경찰이나 일부 범죄전문가들이 "혐오범죄가 아니다"라고 한 것 자체는 맞을지도 모릅니다. 법적으로 증오범죄는, 소수자에 대한 편견과 증오라는 '동기'에서 범죄를 저질렀다는 이유로 '가중'처벌하는 것입니다. 즉, 새로운 구성요건을 만들어낸게 아니라 가중처벌요건입니다. 예컨대, 살인죄보다는 증오살인죄가, 폭행죄보다는 증오폭행죄가 가중처벌되는 것이죠. 근데 증오범죄인지 여부를 확정하는 것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실제로 증오범죄 성립 여부를 밝히기 어렵다는 것이 증오범죄가중처벌법을 비판하는 중요한 근거가 되기도 하죠. 하여간 증오범죄 성립 여부는 범죄자 심리분석이나 여러가지 정황, 피해자의 이력 등을 종합적으로 살펴서 판단하는 것인데, 어쨌든 형이 가중되는만큼 신중하게 판단되어야 합니다. 여기에서도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라는 원칙이 적용되겠죠. 그러다 보면 사회적 맥락에서 봤을 때는 증오범죄라고 볼 수 있는데, 범죄학적 관점이나 법적 관점에서는 증오범죄가 아닌 경우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애초에 이 사건을 중요하게 봤던 이유는 바로, 이 사건을 통해 드러난 폭발적인 '반응'들과 그 반응이 나타난 '맥락'이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실제로 이 사건 이후의 이례적인 반응, "나는 우연히 살아 남았다"(-> 이 문장은 그 어떤 이론보다는 사태의 본질을 정확하게 보여줍니다)는 증오범죄의 일반적인 후폭풍과 매우 유사하고, 그 점이 핵심입니다. 즉, 이 사건이 증오범죄가 아니라고 해도, 이 사건의 의미에 주목해야 할 이유는 전혀 훼손되지 않습니다. 


이 사건 이후 어떤 분들은 서구의 '증오범죄가중처벌법'을 도입하자고 주장하시던데, 저는 - 반대는 아니지만 - 좀 더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고 봅니다. 증오범죄가중처벌법이 제정되면 증오범죄가 줄어들까요? 그건 알 수 없습니다. 어차피 살인죄도 중형에 처합니다. 증오살인죄로 가중처벌요건이 생긴다고 해서, 잠재적 범죄자들이 더 위축될리도 없고, 잠재적 피해자들이 더 안심할 이유도 별로 없습니다. 그렇다고 경찰이 증오살인죄보다 살인죄를 하찮게 다룰리도 없죠. 즉, 증오범죄가중처벌법의 '직접'적인 범죄예방효과를 기대하긴 어렵다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 공동체/국가의 어떤 '의지'를 보여준다는 '상징'으로서는 의미가 있을 겁니다. 유럽이나 미국에서 증오범죄법을 도입한 것도 그런 취지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즉, 만약 국가/공동체가 모든 차별과 적대를 몰아내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보여주고, 그런 차원에서 증오범죄가중처벌법'도' 괜찮겠지만, 법만 달랑 만드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또한 모든 범죄화가 다 그렇지만, 법은 결과만을 처벌할 뿐입니다. 


참고로, 증오범죄가중처벌법은 범죄자의 '행위'가 아니라 어떤 '동기'를 근거로 하여 가중처벌을 한다는 점에서 법치국가적으로 문제가 되기도 합니다. 형법의 근대화 과정에서 소위 '심정형법'(나쁜 마음 먹고 한 일이니 더 처벌 받아라!)은 정당성을 잃었거든요. 그래도 물론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그런 문제에도 불구하고 증오범죄에 대한 경각심을 높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 것이겠고요. 여하튼 저는 증오범죄 여부나 증오범죄법 제정 추진 등은 그리 중요한 쟁점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증오범죄가중처벌법은 그동안 없던 범죄유형을 만들어내는 것도 아니고, '증오', '혐오', '차별', '적대'에서 비롯된 모든 범죄들을 남김없이 다루는 것도 아닙니다. 실제로 증오범죄로 판정나지 않았다고 해도 사회적으로 의미가 덜 중요한 게 아니고, 살인이나 강간 등 강력범죄가 아니라고 해도 다양한 형태의 차별, 적대, 폭력은 여전히 문제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오로지 '증오범죄'에만 가중처벌요건을 만들어내는 '증오범죄가중처벌법'은 제한적 의의만 가질 뿐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증오범죄'가 아니라고 해서 '강력범죄 대책(치안 강화)'에만 몰두하거나, '여성'증오범죄가 아니라고 해서, 여성에 대한 차별과 적대의 엄연한 현실을 무시하려고 하거나, 심지어 정신분열 치료경력이 있다고 해서, 정신질환자 관리의 문제로 이 문제를 환원시키려고 하는 시도에 반대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왜 이 사건을 두고 여성들이 이렇게 '반응'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 저번에 깔려 있는 공포와 분노의 본질은 어디에서 기인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 참조: 증오범죄(hate crime)의 개념 정의는 어떤 사람의 속성(차별금지사유인 성별, 인종, 장애, 종교, 성적정체성, 성적지향 등)에 대한 편견(prejudice)이 동기가 되어서 발생한 물리적, 언어적 폭력 정도됩니다. 즉 증오범죄의 두 구성요소는 '폭행, 살인 등 일반 범죄'와 '편견 동기'(bias motive) 라고 할 수 있습니다. 편견을 가질 수 있는 속성은 보통 '차별금지사유'에 해당하는 모든 것들이 될 수 있는데, 이건 해당 국가의 역사와 상황에 따라 그 목록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사실 유럽이나 미국에서 '여성'에 대한 증오범죄(gender-biased hate crime)은 증오범죄에 관한한 빈발하는 증오범죄의 유형은 아닙니다. 2014년 미국 FBI 통계에 따르면, 증오범죄 사유 별로, 인종 47%, 성적 지향 18.6%, 종교 18.6%, 젠더 0.6%, 민족 11.9%, 장애 1.5%, 성적정체성 1.8%로 나옵니다. 즉 강남역 사건은 어느 정도 민주주의/인권이 성숙한 나라에서는 쉽게 찾아보기 힘든 '한국적' 사건이라고 해도 무방할 듯 합니다.


** 어떤 분들은 너는 '법학자'인데 왜 법적 개념으로서의 '증오범죄'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냐고 물으실 것 같군요. 미리 답드리자면, 제 주전공은 법'사회학'입니다 ㅎㅎ 소속은 법학부지만, 법학자들하고 얘기할 때는 답담함을 사회과학자들하고 얘기를 나눌 때 더 편안함을 느끼는 경우가 많습니다. 참고로, 법사회학이 법학인지 사회학인지에 대한 해묵은 논쟁이 있다는 사실도 알려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