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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책소개_book reviews

[서평] 후천성 인권결핍사회를 아웃팅하다: 두려움에서 걸어나온 동성애자 이야기

by transproms 2012. 1. 28.

동성애자 인권연대, 지승호 <후천성 인권결핍사회를 아웃팅하다: 두려움에서 걸어나온 동성애자 이야기>(2011, 시대의 창)
 

‘이론’보다 중요한 ‘현실’이 여기 있다
 

 10년 전 일이다. 다들 작업에 나갔고, 병장이었던 나와 김 이병만 남게 되었다. 그날따라 심하게 무료했던 나는 뭔가 놀거리를 찾다가, 김 이병에게 ‘인권교육’을 실시하기로 마음먹었다. 당시에는 개념조차 생소했던 군대 내 인권교육이 건군 이래 최초로 실시되는 순간이었다! 김 이병에게는 ‘신종 가혹행위’로 느껴졌을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질문을 던졌다. “너 동성애 어떻게 생각해?” 김 이병이 군기가 바짝 든 목소리로 우렁차게 대답했다. “이병 김○○!, 답변드리겠습니다!” “저는 소름 끼칩니다! 정말 너무너무 싫습니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오호라 ... 이 놈 봐라. 너 딱 걸렸다. 내가 오늘 너를 사람 만들고 만다!” 나는 뒤늦게 입대한 덕에 나이가 무려 28세에 이르는 병장이었고, 상대는 이제 입대한 지 세 달 남짓 된 20살의 이등병이었다. 이건 뭐 객관적인 전력 상 비교가 안되는 게임이었다. 나는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을 총동원해서 일방적으로 밀어붙였다. 평소에는 “네 알겠습니다” 말고는 별 말이 없던 김 이병이 웬일인지 이 날은 조심스레 반론도 제시했고,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도 지었다. 하지만 나는 정연한 논리와 화려한 수사를 동원해 가며, 김 이병을 설득해 나갔다. 그렇게 몇 시간이 흐르고 나는 의기양양한 얼굴로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지금까지 얘기들은 소감 말해봐라.” 김 이병이 대답했다. “차별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알겠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저는 그래도 동성애자가 싫습니다.” 허걱.... 세 시간 넘게 침을 튀겨가며 설명한 나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는 순간이었다.

그 후에도 몇 차례 애기를 나눠봤지만, 김 이병의 “그래도 저는 싫습니다”는 마음을 돌리기는 쉽지 않았다. 개인적으로는 많은 생각을 하게 해준 사건이었다. 병장이 이등병을 상대로도 세 시간 넘게 설명을 해도 설득할 수 없는 문제라면, 그 누구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 아니겠는가? 인권교육 현장과 대학에서 비슷한 경험을 하곤 한다. 동성애자를 차별해선 안된다는 동의를 이끌어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죄악’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차별’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게 논리적으로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성애자를 인격적으로 존중하고, 사회에서 함께 살아가는 평범한 구성원으로 인정하기까지 나아가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런데 “그래도 나는 싫다“는 마음까지 털어내지 못한다면, 그 편견이 다시 차별적 관행으로 부활하기 십상이다.

그래서 감성을 울리는 영상물을 활용해서 다시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게 더 효과적일 때가  많다. 실제로 강의시간에 동성애에 대한 논의를 지난하게 소개하기 보다는, SBS 드라마 ’인생은 아름다워‘의 동성애 컷을 편집하여 보여주고 나면, 논의가 훨씬 쉽게 진전된다. 감성이 열리면 지식의 전달은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서평’에 이렇게 서두가 길었던 이유는 간단하다. 책의 내용을 장황하게 소개하는 게 별 의미가 없는 책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간단한 소개까지 생략할 수는 없다. 이 책은 전문인터뷰어 지승호가 동성애자인권연대의 활동가/ 회원을 인터뷰한 것이다. 한마디로 ‘이론’보다 중요한 ‘현실’이 담긴 책이라고 평하고 싶다. 인터뷰 자체가 워낙 짜임새 있게 구성되어 있고, ‘사진과 기록’, 각 장마다 실린 전문가의 ‘보론’ 등이 다채롭게 구성되어 있는 등 책의 전체적인 완성도가 상당히 높다.

생각난 김에 김 이병에게 연락을 해봐야겠다. 그는 여전히 그 때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까? 김 이병을 다시 만나면, 이번에는 세 치 혀를 현란하게 놀리는 대신, 이 책을 손에 쥐어줘야겠다. 그들이 어떻게 살고 있고,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으며,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책을 읽고 나면, 그의 생각도 조금은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10년 전 내가 실패했던 그 일을 이제 이 책에게 한번 맡겨보고 싶다.


출처: 인권연대, 사람소리 
http://hrights.or.kr/technote7/board.php?board=hongsungsu&command=body&no=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