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인권위, 무슨 일을 하는 곳인가?
 

2011년은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가 설립된 지 10년이 된 해이다. 2001년 설립 이후 지금껏 인권위는 바람 잘 날이 없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 중 하나는 인권위가 무엇을 하는 기구인지에 대한 합의가 분명치 않았다는 데 있다고 본다. 물론 논의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설립 이전부터 인권위의 위상과 기능에 대해서는 치열한 논쟁이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논의가 생산적으로 발전하여 광범위한 합의로 나아가지는 못했다. 정부는 정부대로 자신의 이해관계를 관철시키느라 논의를 엉망으로 만들기 일쑤였고, 정치권력은 정치권력대로 자신의 입맛에 맞는 인권위를 만들려는 시도로 생산적인 논의를 가로 막았다. 인권위의 위기는 여러 차례 있었지만 그때 마다 인권위의 위상과 기능에 대한 공감대가 없이 진행되다 보니 그 위기는 더욱 증폭되곤 했다. 이와 관련한 구체적인 논점으로는 인권위의 위상, 다른 국가기구와의 관계, 독립성, 민주성 등 다양한 것 등이 있지만, 이 글에서는 바로 인권위의 인권구제기능에 초점을 맞춰보려고 한다. 

인권구제기능은 국가인권기구의 3대 기능(정책-자문, 교육-홍보, 조사-구제) 중 하나로서, 인권침해나 차별을 당한 당사자(또는 제3자)가 인권위에 진정을 제기하고, 인권위가 이를 조사하여 적절한 구제 조치를 취하는 것을 말한다. 국가인권위원회법에서는 인권위의 업무로 인권침해 행위와 차별 행위에 대한 조사와 구제, 인권상황에 대한 실태조사(19조)가 명시되어 있고, 구금·보호시설에 대한 방문조사를 특별히 규정하고 있다(제24조). 그리고 “제4장 인권침해 및 차별 행위의 조사와 구제”(제30조~제50조)에는 조사의 대상, 방법, 구제 등이 자세히 규정되어 있다. 문제는 인권위의 조사-구제기능의 의의가 무엇이고, 이것이 사법적 구제와 어떤 차이가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이것이 해명되고 인권위의 조사·구제 기능에 대한 공감대가 이루어져야 인권위를 둘러싼 논쟁이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 최소한 ‘국민권익위원회와 인권위의 차이가 뭐냐?’, ‘인권위가 사법부에 도전하려고 하면 안 된다’는 식의 무도한 문제제기는 배제되어야 그 다음 단계의 논의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이 점이 분명하게 해명되어야 사법부나 한국판 행정 옴부즈만인 국민권익위원회와 구분되는 인권위의 독자적인 위상과 그 존재 의의가 확고부동해질 것이다. 아래에서는 인권위의 조사·구제 기능의 의의를 지난 10년 동안에 있었던 몇 가지 사례를 통해 구체화시켜 보도록 하겠다.

2. 인권위 조사·구제 기능의 의의
 
인권위의 조사·구제 기능의 의의는 대략 다섯 가지로 분류된다.

접근성/신속성 인권위는 인권침해 진정을 받아 신속하고 저렴하게 처리한다.
독립성 인권위는 정치권력의 영향을 받지 않고 독립적으로 인권침해를 조사한다.
인권의 관점 인권위는 실정법에 제한되지 않는 인권의 관점에서 문제를 해결한다. 
설득과 합의 인권위는 적대적 대립이 아닌 설득과 합의에 의한 구제를 제공한다.
근본적 문제해결 인권위는 개별적인 사안의 해결뿐 아니라 근본적 문제해결을 지향한다.

1) 접근성과 신속성
인권위 조사·구제는 사법적 권리구제에 비해 쉽게 이용가능하고, 비용이 들지 않으며, 신속하다. 우편, Fax, 인터넷, 구술, 전화 등 다양한 방법으로 인권위에 진정을 하는 것이 가능하며, 인권침해의 시기, 장소, 내용 정도를 적어 내는 것으로 충분하다. 특별한 비용이 필요하지 않고, 사법적 권리구제처럼 변호사나 법무사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없다. 구금-보호시설에는 아예 인권위가 방문 조사하여 직접 진정을 받기도 하고, 필요한 경우 직권조사나 긴급구제도 할 수 있다. 권리구제의 속도도 빠르다. 인권위에 접수된 진정을 원칙적으로 3개월 내에 처리하도록 되어 있어서 사법적 권리구제보다 빠르게 분쟁을 해결해준다. 

2) 독립성
인권위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한 1차적인 조건은 무엇보다도 인권위의 독립성인데 이 점은 인권구제기능에서도 마찬가지다. 수사기관은 행정부에 속해 있기 때문에 그 구조상 정치권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기 어렵다. 이에 비해 독립기관인 인권위는 정치권력의 영향을 받지 않고 독립적인 조사와 구제를 수행한다. 인권위가 종종 강세수사권이 있는 수사기관도 밝혀내지 못한 인권침해 사건을 규명해내곤 하는데 그것은 대개 인권위의 독립성 때문인 경우가 많다. 

3) 인권의 관점
인권위의 인권구제의 판단기준은 ‘인권’의 관점이다. 여기서 인권은 우리 헌법과 법률뿐만 아니라 국제인권법이 보장하는 광의의 인권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1) 따라서 인권위가 보장하는 인권의 범위는 사법부나 국민권익위원회가 보장하는 범위보다 넓다고 할 수 있다.(2) 따라서 사법부나 국민권익위원회가 ‘합법’이라고 판단한 경우도 인권위의 판단으로는 ‘인권침해’나 ‘차별’이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인권위의 설립 취지 중 하나가 국제인권법과 국내법의 불일치를 해소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당연한 것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보면, 인권위가 대법원이나 헌법재판소와 다른 판단을 한다고 해서 ‘인권위가 초헌법적 기구냐?’고 비아냥거리거나 사법부의 독립성을 훼손한다는 식의 어이없는 주장을 하는 것은 인권위의 기능을 오해하고 있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3) 최근 인권위가 인권위 조사관들의 판례교육을 강화하겠다고 나선 것 역시 인권위의 현재 구성원들이 인권위의 기능을 심각하게 오해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국민권익위원회와 인권위의 차이도 여기에 있다. 인권위의 결정이 인권의 관점에 기반하고 있는 반면, 국민권익위원회는 행정기관 등의 위법-부당한 처분을 실정법에 근거하여 접근하는 기관이다. 

4) 설득과 합의
인권위가 인권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은 기본적으로 설득과 합의에 기반을 둔다.(4) 인권위는 진정 문제의 해결에 합의권고, 조정 등 대체적 분쟁해결(Alternative Dispute Resolution: ADR)의 절차를 활용한다. 이것은 ‘승자독식’(winner-takes-all) 내지 ‘전부 아니면 전무’(all or nothing) 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사법적 권리 구제와 대비되는 것으로서 당사자에게는 모두 만족스러운 결과를 도출할 수 있다.(5) 조사 이후에 결정을 내리는 방법도 강제력이 없는 ‘권고’에 의존한다. 인권위는 가해자에 대해 권력적인 명령이 아니라 ‘인권’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설득하여 협력을 이끌어낸다. 이러한 방식은 실행력의 부재로 인해 무기력하다는 비판에 직면하기도 하지만 인권의 관점에서 근본적인 변화를 이끌어내는 데에는 오히려 효과적인 방법이기도 하다. 여기서 인권위는 권고를 관철시키기 위해 시민사회의 지지와 도덕적 권위를 확보하고, 공정하고 투명한 절차와 설득력 있는 논거를 제시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또한 인권위는 권고의 이행을 위한 프로그램을 구축해야 한다. 인권위의 결정이 구속력이 없다보니 (특히 구조적 문제해결 방안까지 제시한 경우에는) 한 번의 권고로는 그 이행이 관철되지 않는 경우가 발생한다. 그래서 인권위는 권고가 관철될 때까지 인권교육, 홍보, 토론회, 연구용역 등 인권위가 활용할 수 있는 방법들을 체계적으로 배치하여 그 궁극적 이행을 촉구해야 한다. 

5) 근본적 문제해결
사법적 권리 구제의 방법인 가해자 처벌, 인권침해 행위의 중지, 원상회복, 손해배상 등의 방법 등은 모두 당해 사건의 해결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인권위 역시 당해 사건의 해결을 위한 조치를 권고하지만 근본적인 문제해결 방법과 재발방지를 위한 대책을 동시에 권고하기도 한다. 실제로 인권위는 해당기관이나 상급-감독기관에 법령·제도·정책·관행의 시정·개선, 직원 인권교육 등을 권고하여 문제를 보다 근본적으로 해결하고 예방할 수 있는 조치를 취할 것을 권고해왔다. 인권 문제는 당해 사건 가해자의 일회성 행위에서 비롯된 경우보다는 구조적인 요인에서 기인한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근본적 문제해결방안을 제시하는 인권위의 권고는 더욱 유의미하다. 

다음에서는 지금까지 살펴본 인권위의 인권 구제의 의의를 인권위가 지난 10년 동안 다뤄온 구체적인 사례들 속에서 설명해보도록 하겠다. 각각의 사건들은 인권위의 인권 구제가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갖는지, 그리고 동시에 그동안 인권위의 인권 구제가 어떤 실천적 한계를 가지고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3. 양천경찰서 고문 사건-인권침해사건의 구조적인 문제에 주목하라!

인권위는 양천경찰서에서 고문이 있었다는 진정을 접수 받고 직권조사를 실시했고, 결국 2010년 6월 16일 경찰관 5명을 검찰에 고발조치 및 수사의뢰했다. 인권위는 철저한 조사를 통해 고문이 조직적으로 자행되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강제수사권도 없는 인권위가 이러한 충격적인 고문 사실을 밝혀냈다는 것은 그 의미가 크다. 수사기관의 인권침해가 인권위와 같은 외부 ‘독립기구’의 감시와 통제를 받아야 할 필요성을 다시 한 번 각인시켜준 장면이기도 했다. 

하지만 아쉬운 점도 있었다. 그것은 인권위가 사건의 구조적인 원인까지 파고들지는 못했다는 점이다. 당시 많은 경찰관들이 이 문제의 근본원인으로 서울경찰청의 ‘성과주의’를 지적했다.(6) 그리고 이렇게 문제의 원인이 구조적인데 하급 경찰관만 처벌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주장했다. 이런 상황에서 고문경찰관 처벌, 경찰관 인권교육, 강력팀 사무실 재배치 등으로 고문이 근절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구조적인 문제라면 고문이 양천경찰서에서만 일어난 일은 아닐 것이다. 따라서 인권위는 서울 시내 경찰서에 대한 전면적인 직권조사에 착수해야 했고 서울경찰청의 성과주의와 고문수사의 상관관계에 대해서 철저히 규명했어야 했다. 또한 각 경찰서에 고문 방지를 위한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프로그램과 상시적인 외부 감시시스템을 구축할 것 등을 제안했어야 했다. 이런 점을 도외시한 채 마치 고문이 양천서에서만 일어난 우발적인 사건인 것처럼 마무리된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4. 광주 인화원 사건-이행까지 책임져야 한다!

2011년 영화 ‘도가니’가 화제가 되면서 정부와 정치권에서도 다양한 대안을 내놓았다. 경찰은 재수사에 착수했고, 보건복지부는 ‘사회복지시설 투명성 강화방안’ 발표 등의 대책을 내놓았고, 교육과학기술부도 실태조사에 나서고, 경찰도 협조하겠다고 거들었다. 광주시교육청은 특별감사를 실시해 관련 교사 6명을 중징계하도록 법인에 요구했고, 관련 이사 1명의 해임을 광산구청에 요청했다. 광주시는 광주인화특수학교(인화학교)와 광주인화원(인화원)을 운영하는 우석법인의 설립허가를 취소했다. 국회에서는 일명 도가니법이라고 불리는 성폭력특별법 개정안을 통과시켰고 사회복지사업법도 개정했다. 그런데 이러한 대책들의 일부는 이미 인권위가 2006년에 내린 권고에 이미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었다. 

2006년 광주 인화원 사건이 발생한 뒤 인권단체들의 노력으로 일부 관련자가 처벌받긴 했지만 여전히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인권위가 2006년 8월에 내린 권고가 문제해결의 중요한 전기를 마련해 주었다. 인권위는 철저한 조사를 통해 다른 국가기관도 규명하지 못했던 사건의 실체에 다가섰다. 인권위는 이미 처벌을 받은 두 가해자의 범죄사실을 더 밝혀냈고, 인화학교의 교장, 기능직원, 교사, 인화원 생활재활교사 등 4인의 성폭력범죄 사실도 추가로 적발했다. 교육청, 지방자치단체, 경찰, 검찰 등 강제수사권이나 관리감독 권한을 가진 국가기관들이 하지 못한 일을 인권위가 해낸 것이다. 우리가 인권위를 만든 이유가 바로 기존 국가기관이 할 수 없는 일을 하라고 만든 것이 아니었던가? 아마 당시 인권위의 조사가 없었다면 도가니 문제의 해결은 몇 년 더 지체되었을지도 모른다. 

이 뿐만이 아니었다. 인권위는 이 문제가 가해자 몇 명을 처벌하는 것으로 해결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리고 인화학교와 인화원을 운영하고 있는 ‘사회복지법인 우석’의 책임에 주목했다. 인권위는 ‘우석’이 인화학교와 인화원에서 성폭력 사건이 수차례 적발되었음에도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고 지적하면서 현재 법인 임원진을 해임하고 새롭게 이사회를 구성할 것을 권고했다. 아울러 피해 학생에 대한 대책도 주문했다. 인권위는 광주시 교육감에게 피해 학생들에 대한 전문적 치유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성폭력 전문상담 시스템을 갖추도록 권고했다. 더 나아가 인권위는 청각장애학생의 교육권 문제가 연관되어 있음에 주목하여 청각장애특수학교에 수화통역사 자격증을 소지한 교사가 3.8%에 불과하다는 사실 등 청각장애인의 교육권이 심각하게 침해되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에 따라 인권위는 청각 장애인교육권의 보장을 위한 중장기 전략의 수립, 수화통역사 자격증 보유 교사 확충, 표준수화의 어휘 확장, 실효성 있는 교육자료 마련 등의 대책 마련을 권고했다. 이렇게 인권위는 가해자의 범죄사실을 밝혀내는데 그치지 않고, 그 구조적인 원인을 규명하고, 근본적인 문제해결을 위한 조치들까지 꼼꼼하게 권고했다. 
 
문제는 인권위의 역할이 권고를 내놓는 것에서 끝났다는 점이다. 인권위는 권고가 이행되기 위한 노력을 충분히 하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든지 있었다. 인권위원장이 기자회견이라도 열어서 문제의 심각성을 폭로하고, 인권단체들이 광주시청사 앞에서 농성을 벌이고 있던 현장도 방문하고, 모르쇠로 일관하던 광주시 교육감과 광주시장에게는 면담신청이라도 했어야 했다. 보건복지부, 교육부, 청와대를 찾아다니며 “대한민국이 이 정도 수준입니까?”라고 물었어야 했다. 권고문은 절박한 내용을 담고 있었지만 그 권고를 이행하기 위한 인권위의 노력은 그만큼 절박해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그때 인권위가 ‘벌여놓기만 한 일’은 결국 4년이 지난 후 ‘영화 한 편’이 계기가 되어 다시 사회 이슈가 되었다. 인권단체들은 4년 전 그때처럼 다시 천막농성에 돌입해야 했고 인권위는 4년 만에 재조사에 나서야 했다. 그때 인권위가 인화원 문제에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섰으면 어땠을까? 권고의 이행을 위한 후속 작업까지 전력을 다했다면 문제가 조금은 더 빨리 해결될 수 있지 않았을까?

5. 촛불시위와 해병대 사건-긴급한 사안에 재빨리 개입하라!

인권침해 문제의 상당수는 초기 대응이 무척 중요하다. 대응 시기를 놓치면 진상규명도 어렵고 피해자 구제도 어려운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것이 2008년 촛불시위다. 촛불시위에서 인권침해 논란이 시작된 것은 2008년 5월부터였으나 인권위는 미적거리다 결국 그리고 2008년 10월이 되어서야 인권침해가 있었다는 결정을 내렸다.(7) 당시 100개가 넘는 진정이 접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몇 달이 지나서야 결정이 내려진 것이다. 물론 국가기구의 입장에서 아무래도 인권단체보다는 좀 더 신중하게 판단할 수밖에 없다는 사정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사건과 같이 비교적 인권침해가 현재진행형인 사건에서 인권위는 가능한 한 신속하게 문제에 대응할 필요가 있었다.

인권위의 신속한 초기대응은 진상규명을 위해서도 중요하다. 특히 군대, 구금시설, 사회복지시설 등에서 벌어지는 인권침해 사건에 대해 초기대응을 못하면 가해자나 책임자에 의해 문제가 은폐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피해자보호를 위해서도 인권위는 재빨리 조치를 취해야 한다. 성폭행 사건이 발생한 상황에서 피해자를 가해자로부터 격리시킨다던가 하는 긴급조치가 적시에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 피해가 증폭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2008년 7월에는 촛불시위 진압과 관련하여 육군 복무 전환을 신청했던 이 모 상경에 대해 해당 부대장과 경찰이 인터넷 사용금지, 2개월간 면회금지, 외출외박제한 등 과도한 제재를 가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선임병들과의 관계도 악화되어 경찰로 더 복무하는 것 자체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 때 인권위는 “제재를 즉각 중지하고 이 상경을 다른 부대로 전출시키라”는 긴급구제조치를 내렸다. 피해자보호를 위한 적절한 선제적 조치였다.

반면, 2011년 3월에 내려진 해병대 상습폭행 및 은폐사건에 대한 인권위의 조사에서는 피해자보호를 위한 조치가 적기에 이루어지지 못했다.(8) 이 사건의 진정이 접수된 것은 2010년 12월 31일이었고, 결정이 내려진 것은 2011년 3월 23일이었다. 진정 접수 후 3개월 내에 결정이 내려졌으니 겉보기에는 문제가 없다. 더욱이 이 진정에 대한 조사는 가해사실 뿐만 아니라 조직적인 축소, 은폐를 밝혀냈고, 결정문에는 피해자들의 보직 조정 및 피해자들에 대한 치료 등 보호조치, 관련자 징계 조치, 기수열외 금지, 지휘책임원칙 수립, 환자발생시 발병경위 기록, 부대정밀진단 등 다양한 대책을 담고 있어서 조사와 결정이 잘 된 사례에 해당한다. 그런데 문제는 인권위가 3개월 동안 피해자보호를 위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인권위 결정문에는 피해자 보호조치가 중요하며 피해자들에 대한 치료가 필요하다는 내용이 나오지만 정작 인권위는 이 문제를 방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가해자 징계 권고 등은 천천히 결정하더라도, 피해자에 대한 조치는 진정접수를 받고난 후 즉시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긴급 대응의 중요성은 군대, 구금시설, 사회보호시설 등에서 성폭력 문제 등이 발생했을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긴급구제가 요청되는 인권침해가 발생했을 때의 초기대응에 대하여 인권위는 상세한 대응매뉴얼을 갖추고 효과적으로 대응할 필요가 있다.

6. 나아가며

많은 사람들이 이명박 대통령과 현병철 위원장의 취임 이후 인권위가 제 기능을 상실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PD수첩 사건, 한진중공업 김진숙 사건, 두리반 사건, 야간시위 금지문제, 미네르바 사건, 민간인 사찰 사건, 박원순 명예훼손 소송 사건, 경찰 물대포 사건 등에서 보여준 인권위의 무기력한 대응이 그 명백한 증거다. 하지만 위에서 지적한 인권위 인권구제의 문제점들은 대부분 이명박 정부 이전에도 있던 문제들이다. 정치권력이 교체되고, 위원장이 바뀌어도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결국 궁극적으로 ‘인권위가 사는 법’은 인권위의 인권구제 기능의 의의를 적절하게 이해하고, 그것을 구현하기 위해 필수적인 제도적 기반을 구축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사법부나 국민권익위원회와 구분되는 인권위만의 인권구제기능이 확고하게 자리 잡아야 한다. 그래야 인권위가 정치권력의 성격이나 논의구도에 따라 휘둘리는 일을 막을 수 있다. 이를 위한 몇 가지 과제를 점검해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인권위의 조직과 예산이 확충되어야 한다. 사법적 권리구제와 다른 인권위만의 인권구제를 제공하기에는 지금의 인권위 조직과 예산이 터무니없이 부족하다. 굳이 외국의 사례와 비교하지 않더라도, 연간 200억에 164명이 일하는 작은 기관에서 매년 1만 건의 진정과 2만 건의 상담을 처리하는 것은 무리다. 이런 현실에서 단순한 분쟁해결을 넘어 구조적인 문제해결을 모색하고, 조정 등에 의한 화해적 해결, 그리고 이행 프로그램까지 인권위가 책임져야 한다는 요청은 비현실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또한 인권위의 인권구제가 효과적으로 작동하기 위한 전반적인 시스템 개혁도 필요하다. 유명무실한 ‘조정제도’가 활성화될 수 있도록 하는 제도적 보완이 필요하며, 당해 사건의 구제뿐만 아니라 근본적인 문제해결방법과 이행프로그램을 구축하기 위해 지금의 조사-구제 프로세스 자체를 전면적으로 바꿔야 할 것이다. 하지만 결국 중요한 것은 사람이다. 인권에 대한 충분한 감수성, 신념, 지식, 경험을 가진 사람들로 인권위가 구성되어야 인권위의 조사·구제 기능이 제대로 힘을 발휘할 수 있다. 그 일의 대부분은 법에 따라 주어진 정형화된 일을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인권옹호라는 목표 하에 필요한 일을 적극적으로 만들어가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권위원의 선임절차와 인권위 직원의 채용절차를 손질하여 적임자로 인권위를 구성하는 것이 더없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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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주] 이 글은 2011년 11월 18일부터 19일까지 서강대학교에서 열린 ‘국가인권위원회 설립 10주년 대토론회: 인권위 10년, 무엇을 남겼나’에서의 발표문과 이를 수정, 보완한 논문인 「국가인권위원회 조사-구제기능에 대한 평가와 과제: 출범 이후 10년 간 통계를 중심으로」(전북대 <법학연구> 게재 예정)의 내용 중 통계분석 부분을 제외한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1) 국가인권위원회법에서 ‘인권’은 “대한민국 헌법 및 법률에서 보장하거나 대한민국이 가입·비준한 국제인권조약 및 국제관습법에서 인정하는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 및 자유와 권리”(제2조)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서 ‘국제관습법’은 조약, UN산하기관의 권고, 기타 관행 등까지 포괄하는 넓은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
(2) 절차 면에서도 법적 소송은 증거법칙 등 엄격한 요건을 충족시켜야 하지만, 인권위의 구제절차는 보다 유연한 규칙이 적용된다.
(3) 2010년 4월 일부 인권위원들은 다음과 같은 발언을 한 바 있다. “국가인권위원회가 법원에 의견 제출을 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사법부의 독립성을 침해할 우려가 있다.”(김태훈 인권위원) “인권위보다 사법부가 우리나라에서는 인권 전문가다. 우리가 의견을 제출할 필요가 없다.”(김양원 인권위원) (“인권위 독립’ 팽개친 보수 인권위원들”, <한겨레> 2010.4.14, http://www.hani.co.kr/arti/society/rights/416095.html 참조. 인권위는 사법부에 대한 의견표명을 극도로 자제하고 있는 등 유독 사법부를 과도하게 의식하는 경향을 보여왔다. 
(4) 아래는 주로 홍성수, “법에 의한 인권보호의 한계와 국가인권기구의 존립근거: ‘정규 국가기구’로서의 인권위의 기능과 위상”, <고려법학> 제58호, 2010, 165쪽 이하를 참조했으며, 참고문헌은 생략했다.
(5) 하지만 실제로 인권위의 관련 통계를 보면, ‘조정’으로 인한 문제해결 건수는 극도로 적다는 문제를 안고 있다.
(6) 이에 대해서는 임인택, “성과주의가 고문을 사주한다”, <한겨레21> 제818호, 2010.07.09 참조.
(7) 정용인, “실종된 국가인권위를 찾습니다”, <뉴스메이커> 787호, 2008.08.12 참조.
(8) 2011.3.23자 10진정0796600·11직권0000100(병합) 결정


*출처: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 54호, 2012년 1-2월호
http://www.esaram.org/2008/webbs/view.php?board=esaram_43&id=119 
 
Posted by transpro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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