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문제, 남성과의 소통은 가능한가?



홍성수 (숙명여자대학교 법학부 조교수 / 민우회 정책위원)



몇 달 전 ‘나꼼수 수영복 응원 사건’에 관련된 문제에 휘말리게 되었다. 지난 몇 년 동안 성희롱 문제를 연구한 사람으로서 약간의 책임감을 느껴서 몇 마디 덧붙인 것이 사단이 난 것이다. 한적하기만 했던 나의 블로그에는 며칠 사이 2만 명이 넘는 사람이 방문했고, 트위터에는 멘션이 빗발쳤다. 조금 무섭기도(?) 했지만, 학자들이나 활동가들이 아닌 보통 사람들의 생각을 접해보고 의견을 교환할 수 있었다는 것은 참 소중한 기회였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몇 가지 생각해본 것들을 여기서 함께 나눠보고자 한다.

 

첫 번째는 논쟁의 구도가 다변화되었다는 것이다. 십수 년 전 만해도, 여성 관련 문제의 대립구도는 ‘남성 대 여성’이었다. 그런데 이 대립구도가 점차 완화되고 있는 것을 목도할 수 있었다. 남성과 여성은 더 이상 단일한 대오가 아니었다. 당시 이 문제를 다룬 한 케이블TV의 토론프로그램의 패널에는 찬/반 양쪽에 모두 남성과 여성이 섞여 있었다. 의미심장한 상징적 장면이었다. 실제로도 결코 적지 않은 숫자의 남성들이 비판의 대열에 동참했다. 반면 여성들 중에는 오히려 나꼼수가 사과해야 한다는 나의 의견에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대체로 “나는 여자지만 왜 문제가 되는지 모르겠다”는 내용이었는데, 그런 성적 농담을 문제삼는게 오히려 여성에게 자존심 상하는 일이고 여성에게 불리한 일일 수도 있다는 비판도 있었다.

 

어쨌거나 남녀의 대립구도가 깨진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오히려 모든 여성이 단일한 의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이상한 것이다. 그동안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침묵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여성주의적 시각을 가진 남성들이 생겨난 것도 주목할 만하다. 특히 1990년대에 여성주의를 어떤 식으로든 직접 경험했던 세대들 중에 그런 이들이 많았다. 당시 여성주의운동의 성과라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한다.

 

둘째, 여전히 여성주의자들의 주장 중에는 보통 사람들에게 다소 어려운 부분이 여전히 있었다. 내가 올린 글에 칭찬을 해준 분들은 대개 ‘문제가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게 해줘서 감사하다’는 것이었다. 내가 무슨 획기적인 주장을 한 것은 전혀 아니었다. 이미 다른 여성주의자들이 제시한 훌륭한 논의를, 보통 사람들, 특히 남성의 눈높이에서 설명했을 뿐이었다. 이것은 나꼼수를 비판했던 다른 여성주의자들의 논의가 대중들에게는 다소 어려웠다는 것을 반증한다. 그들이 현학적인 서구 페미니즘 이론을 들먹인 것도 아니었고, (최소한 내가 볼 때는) 오히려 매우 설득적이고 친절하게 문제를 지적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일반대중들의 눈높이에는 맞지 않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성적 대상화’ 같은 용어의 경우, 여성주의자들이 별다른 설명 없이 빈번하게 사용하는 말이지만, 나꼼수 멤버들은 물론이고 대다수의 남성들은 ‘성적 대상화’의 가 문제시되는 맥락을 거의 이해하지 못하는 듯 했다. 총선 시기에 불거진 이른바 ‘김용민 막말 사건’도 마찬가지다. 많은 남성들은 ‘강간해 버리자’라는 말이 (아무리 그 대상이 나쁜 놈이라고 해도) 인권침해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거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누군가는 이러한 여성주의의 주장들을 차분하게 설명해줬어야 했다. ‘성적 대상화’가 차별이 되고, ‘강간하자’가 폭력이 되는 맥락을 여성들은 ‘느낄’ 수 있지만, 남성들은 머리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즉 그들을 이해시키려면 친절한 설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물론 1990년대 여성주의자들도 결코 ‘친절’하지는 않았다. 설득하려고 하기보다는 들이받고 싸워야했다. 그것이 당시로서는 최선의 문제제기 방식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 논쟁에서 보여준 여성주의자들의 태도는 깜짝 놀랄만큼 달라졌다. 너그럽고 관대했고 설득적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태도’였을 뿐, 그 언어와 논리는 여전히 남성들에게 암호문 같았던 모양이다.

 

세 번째는 문제를 처리하는 방식에 관한 것이다. 성희롱발언을 한 인사들을 처리하는 과정에서의 논쟁 구도는 대개 ‘사퇴’ 또는 ‘사과’의 이분법이었다. 그런데 엄벌주의는 성적 발언을 함부로 했다간 정치인생이 끝장난다는 ‘두려움’으로서 작동할 뿐, 여성인권에 대한 감수성의 향상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아무리 경미한 성희롱이라고 해도) 구두사과 한 번으로 문제를 덮는 것에도 결코 동의할 수 없다. 추측컨대, 성희롱 관련해서 사퇴했던 사람은 물론이고, 심지어 사과를 했던 사람조차도 지금까지도 자신의 언행에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사퇴하거나 사과를 한들 무슨 큰 의미가 있겠는가?

 

그렇다면 경미한 수준의 일회성 성희롱 발언에 대해서는 사퇴 말고 일종의 ‘재활프로그램’의 이행을 협약함으로써 기회를 주는 방법은 없을까? 묵인이나 무책임한 관대함과 구분되는 어떤 재활프로그램을 제시하는 것은 불가능할까? 자신의 잘못을 진심으로 반성하고, 다른 사람으로 거듭나겠다는 각오를 밝히는 사람들에게 ‘구두약속’ 이상의 어떤 것을 제시해 볼 수는 없을까? ‘단죄’와 (무책임한) ‘관대함’을 넘어서는 제3의 길을 고민해보자는 얘기다.

 

내가 이번 사태(?)를 겪으면서 생각해본 이 세 가지 문제들은 여성주의와 남성 사이의 소통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문제의 남성들을 영원히 격리시킬 것이 아니라면 이 소통의 문제를 피해갈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남성들로 하여금 남성과 여성 상호간의 이해를 도모하고, 내면의 성찰과 궁극적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어떤 프로그램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강의식 교육을 넘어서 체험과 실천이 함께하는 프로그램, 사회 곳곳에서 그리고 생애 전 과정에 거쳐 작동하는 프로그램 말이다.

 

내가 기여할 수 있는 일도 알게 되었다. 여성과 여성주의에 대한 지식은 일천해도, 남성들이 무엇을 궁금해 하는지, 어떻게 설명하면 그들을 조금이라도 더 이해시킬 수 있는지에 대해서만큼은 내 실력이 꽤 쏠쏠하다(!)는 자체평가 결과가 나왔다. 이걸 어떻게 활용해 보면 좋을까? 이제 새로운 고민이 시작되었다.


출처: 민우칼럼, 94호, 2012년 6월 (링크)




Posted by transproms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