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서평-책소개_book reviews

서평: 미셀린 이샤이, 세계인권사상사

by transproms 2008. 7. 23.

인권실천시민연대 웹진 [사람소리] 157호, 2007.4.04.
http://www.hrights.or.kr/note/read.cgi?board=hongsungsu&nnew=2&y_number=7

 


한 권에 담아낸 세계인권사
미셀린 이샤이/조효제 옮김, <세계인권사상사>(한국어 개정판, 2004, 길)



세계사와 세계인권사

‘인권’을 말할 때, 우리는 반드시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인권의 개념은 ‘역사적으로 형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 그 어떤 윤리적-종교적 가치도, 인권만큼 역사의 현장에 뿌리를 박고 있는 경우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역사를 ‘기술’하는 것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인권을 둘러싼 상호작용의 동학이 워낙 복잡하기 때문이다. 근대 이후의 역사는 사실상 ‘인권의 역사’이기도 하다. 그래서 근대 이후의 세계‘인권’사를 쓰는 것은 세계사를 쓰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을 수도 있다. 서구에서 인권관련 단행본이나 논문이 그렇게 많아도, 정작 인권의 역사를 포괄적으로 서술한 책이 드문 것은 그래서이다. 그런 점에서 세계의 인권(사상)사를 한권의 책으로 정리해 보겠다는 기획은 어쩌면 무모한 시도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계인권사상사”는 그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인권저술의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남는데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동서고금의 고전 저작과 서구근대사상가의 정치 저술, 중요한 사료들, 인권과 관련된 각종 문헌 등 인권에 관련된 거라면 국적과 시대를 불문하고 소화하여 정리한 저자의 장인정신은 실로 대단하다. 또한 번역자 조효제 교수의 훌륭한 번역 덕에 한국의 독자들도 언어의 장벽을 느끼지 않고 이 역작과 조우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책의 번역은 이른바 ‘의역’이다. 원문의 문장을 읽고, 그 뜻을 살리되 원문의 문장구조나 표현에 구애받지 않고, 한글로 재생해 낸 거라고 보면 맞을 것이다. 물론 저자가 원서의 내용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는 인권전문학자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작업이다. 덕분에 번역서에서 흔히 발견되는 어색하거나 이해가 불가능한 문장은 찾아보기 힘들다. 게다가 번역자의 성실한 보완작업 덕에 책의 품격은 한층 더 높아졌다. 인용문에서 기존의 번역서를 찾아서 참고하거나, 세부 소제목을 추가하고, 역주를 달아 보완하는 정도의 (성실한 번역자라면 하는 수준의) 작업은 기본이다. 영어가 아닌 외국어를 인용한 것이면 직접 원어를 찾아 번역하고, 연도표시나 조문표시가 잘못되었거나, 표현이 이상하면, 원저자랑 연락하여 수정하여 번역에 반영했다. 심지어, 원저자에게 현재 상황을 반영한 추가 기술을 부탁하여, 한국어판을 위한 새로운 장을 추가하기 까지 했다. 한국인권 연대기, 국제인권용어 모음, 의미로 옮긴 세계인권선언은 역자가 직접 한국어판에 새롭게 추가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450쪽 짜리 원서가 816쪽으로 불어났다. 이런 성가신 작업을 마다하지 않은 번역자나, 또 번역자의 그런 부탁을 일일이 다 들어준 저자나 기립박수를 받아 마땅하다. 인권학자로서의 양심이 저술가로서의 양심으로 이어진 것일까? 두 사람이 그렇게 분투한 덕분에 한국의 독자들은 그 방대하고 복잡한 인권의 역사에 한층 더 가깝게 다가갈 수 있게 되었다!


인권사의 체계적 구성

이 책의 구성은 체계적으로 아주 잘 짜여져 있다. 먼저 1장은 인권 개념의 기초가 된 세계 각국의 종교적, 윤리적 기원을 검토한다. 저자는 여기서 세계 각지의 여러 사상에 이미 인권의 윤리적 기초가 잠재해 있음을 논증한다. 2장부터 5장까지는 계몽주의(18-19세기), 산업혁명(19세기), 세계대전(20세기), 지구화(20-21세기)의 인권사를 각각 기술한다. 저자는 현대적 인권개념이 유럽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고 주장하고 하면서, ‘서구’의 근현대 인권사를 주로 다룬다. 각 장은 당시의 역사적 배경을 설명하고, 중요한 인권 논쟁과 제도화를 다룬 뒤, ‘누구를 위한 인권인가’라는 제목 하에 각각의 시대에 (인권의 전반적 발전에도 불구하고) 소외된 인권을 다룬다. 6장은 책 전체의 결론으로 지금까지의 역사서술을 국가, 시민사회, 사적영역의 3분론에 따라 재구성하여 요약정리한다. 7장은 한국어 번역판을 위해 새롭게 저자가 추가한 것으로, 현대의 지구화나 인도주의적 개입에 대한 인권 쟁점에 대해 이른바 ‘인권의 신현실주의’라고 저자가 이름붙인 새로운 대안을 제시한다.


독창적 시각을 가진 인권사

그런데 이 책은 단순한 인권사 서술에 그치지 않는다. 특히 그동안의 주류적 인권사 서술과 비교해 볼 때, 목차만 보면 엇비슷해 보이지만, 구체적으로 들어가 보면 상당한 차이가 드러난다. 그 중 몇 가지 특징적인 것을 지적해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저자는 인권개념 형성에 있어서 ‘사회주의자’들의 역할을 유난히 강조하고 있다. 사회적 권리 뿐만 아니라, 정치적 권리의 발전에 있어서도 사회주의세력이 결정적인 공헌을 했음을 저자는 끊임없이 강조하며, 다양한 역사적 전거로 입증해 낸다. 기존의 근현대 인권사가 대개 홉스-로크-루소 등의 서구사상가의 이론적 논거와 근대 자유주의 시민혁명을 중심으로 서술되어 온 것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또한 여성, 장애인, 빈민 등 사회적 약자의 인권문제를 끊임없이 다룸으로써, 기존의 인권사 서술에서 간과되어 온 그들의 역사를 부각시키고 있다.

저자의 생각이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6장에서의 ‘사적 영역’에 대한 서술도 인상적이다. 흔히 분석틀로 선택되는 시민사회와 국가라는 이분법에 저자는 ‘사적 영역’이라는 공간을 추가한다. 국가의 힘이 커지고, 시민사회가 무력해질 때, 사적 영역도 위태롭게 된다는 저자의 주장은 독창적이면서 설득력 있다. 왜 미국의 보수주의자들이 느닷없이 ‘가족의 가치’를 들고 나오는지, 권위주의 국가에서 사적영역이 어떻게 지배당하는지, 지구화시대의 사적영역은 어떻게 억압받는지 등에 대한 흥미로운 설명이다.

한국판에서 추가된 7장은 현대 인권상황에 대한 저자의 분석이 펼쳐진다. 저자는 9.11테러 이후의 인권논쟁의 두 세력을 ‘시저파’와 ‘스파르타쿠스파’로 나눈다. 시저파가 힘의 우위를 바탕으로 하는 세계질서를 옹호한다면, 스파르타쿠스파는 반권위주의적인 반미-반세계화를 지지한다. 저자는 물론 (대개의 인권학자들이 그러하듯) 유엔과 다자간 국제기구, NGO를 통해 세계의 인권과 평화가 유지되어야 한다는 스파르타쿠스의 주장에 기본적으로 무게를 둔다. 하지만 저자는 시저파식의 무력적 개입이나 자본주의의 확대가 때로는 인권을 향상시키는데 성공했다는 ‘현실’에도 주목한다. 반대로, 스파르타쿠스파는 구체적 대안제시에 항상 무기력하다. 그들에게는, 소수민족의 집단학살이 자행되고 있는 지역에 대하여- 시저파의 대안인 - ‘공습’ 말고 어떤 대안이 있는지 말해야 할 책임이 있다. 결국 저자의 주장은 시저파나 스파르타쿠스파의 세계관을 대립시켜서는 진정한 대안을 찾을 수 없으며, 대립하는 두 주장에서 취할 수 있는 ‘실리’를 챙겨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인권을 위한 무력사용에 대해 거창한 이념과 도덕적 명분 보다는 그 ‘수단’이 인권증진이라는 ‘목표’에 부합하는 지를 꼼꼼하게 따져봐야 한다. 그렇게 보면, 분쟁지역에 대한 무력개입은 일반적으로 정당화되기 힘들지만, 장기적 차원에서 정치적-경제적 자원을 투자하는 등의 분쟁예방전략은 적극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전략적 선택을 ‘인권의 신현실주의’라고 이름 붙이고, 이것이 ‘인권의 통합적 세계관’의 창출로 이어질 것이라고 말한다.
 

여전히 인권사는 서구의 것인가?

하지만 이 기념비적 저술에도 아쉬운 점은 있다. 먼저 이 책의 관점이 여전히 ‘서구중심적’이라는 것은 서구 변방의 독자들에게 불만일 수밖에 없다. 이 책이 - 백인남성과 자유주의를 기본으로 하는 기존의 주류 인권사와 달리 - 소수자와 사회주의의 시각을 균형있게 다뤘다는 점은 상당한 의미를 갖는다. 하지만 아쉽게도 비서구권의 인권사에 대한 서술은 상대적으로 매우 빈약하다. 서구와 관련된 인권문제에 대해서는 수준 높은 논의가 전개되지만, 남미, 아프리카, 아시아 지역의 인권사는 거의 다뤄지지 않는다. 근대 인권이 서양에서 기원한다는 저자의 문제의식에는 동감하면서도,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인권사에서도 남미와 아시아의 역사적 경험이 여전히 ‘주변적’인 것인지 의문이다. 노예제와 과거를 청산한 아프리카 국가들이나, 독재를 넘어 민주화에 성공한 남미와 아시아국가들의 경험이, - 인권의 관점에서 보면 - 오히려 더 의미있는 역사적 사례일 수도 모른다. 이쯤해서 주류적 인권사에서 벗어나 보려는 저자의 시도를 ‘절반의 성공’이라고 평가한다면 너무 가혹한 것일까? (물론 이러한 거시적 역사서술이 담긴 책의 경우, 집필은 어렵지만, ‘비판’은 손쉽기 마련이다.)


지구화, 그리고 전쟁과 빈곤

문제는 한 가지 더 지적될 수 있다. 저자는 지구화시대의 인권문제를 다루면서, 지역분쟁에 대한 인도주의적 개입과 그와 관련된 국민(국가)형성의 쟁점을 중심에 놓는다. 여기서 저자가 ‘빈곤과 양극화’의 문제를 상대적으로 가볍게 취급하는게 아닌가 하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인권의 눈으로 볼 때, 빈곤문제는 인도주의적 개입에 비해 결코 가벼운 문제가 아니다. (세계사회포럼에서 외쳐지는 대표적 구호가 “‘전쟁’과 ‘빈곤’을 끝장내자”임을 상기하자!) 지구화로 인해, 일국내의 빈부격차와 세계 중심부와 주변부의 빈부격차는 더 심각한 상황으로 빠져들고 있다. 게다가 인권의 관점에서 본다면, 빈곤과 전쟁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이라크의 자유’라는 작전명으로 벌인, 이라크 민중의 ‘인권’을 위한 전쟁에 3천억 달러의 돈이 투입되었다. 결과는 처참하다. 사망자만 6만명이 넘고, 난민은 400만명이 발생했다. 그런데 세계적으로 매년 4천만명이 굶어 죽거나 그와 관련된 질병으로 사망하고 있다. 70억 달러면 매일 4천명의 생명을 살릴 수 있다. 딱 한 달만 전쟁을 멈추면 확보될 수 있는 돈이다. 한쪽에서는 ‘인권’을 위한 전쟁을 벌이고, 다른 한쪽에서는 최소한의 ‘인권’도 보장받지 못한 채 굶어 죽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며

이 책은 방대한 역사서임에도, 그 서술은 시종일관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한다. 구성도 체계적이고 번역도 매끄러워 800쪽이 넘는 분량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빠른 시각에 독파할 수 있다. 그래도 엄두가 안 난다면 일단 서론, 6장, 7장을 먼저 읽고 나머지에 도전해 보는 것도 괜찮을 듯 하다. 하지만 최소한 한 장씩은 쉬지 않고 읽어야 책의 전체적 논리를 놓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읽는데 드는 시간은 물론 적지 않을 것이지만, 인권에 조금이라도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결코 ‘후회없는 선택’이 될 거라 확신한다.


* 일주일 동안 골방에 틀어 박혀 이 책을 독파하면서 가외로 생각한 것은 바로 ‘한국의 인권사’였다. 아쉽게도 자신있게 내놓을 수 있는 체계적이고 포괄적인 ‘한국인권사’는 없다. 우리의 고전사상에서도 ‘인권’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을까? 우리의 경우에도 인권의 발전에서 (이 책의 주장처럼) 국내 사회주의자들 영향이 상당했던가? 여러 인권 사이의 불가분성테제는 한국의 인권사에서도 적용될 수 있을까? 북한에 대한 인도주의적 개입의 문제는 어떤 시각에서 접근해야 할 것인가? 우리의 인권침해 과거사 청산과정은 다른 나라와 비교해봤을 때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짧은 기간 동안 놀라울 만큼의 인권보장에서의 진전을 보인 동력은 어디서 찾아야 할 것인가? 아마도 우리의 인권사는 세계인권의 모든 쟁점을 망라한 축소판이 될 것이며, 우리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나라들에게는 아주 좋은 사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얼마 전 한 일본인 친구가 한국인권사에 관심이 있다며, 한국 인권사에 대한 자료를 요청했을 때, 딱히 추천할 것이 없어 속상했던 기억이 난다. 세계의 인권운동가-학자들이 한국에 보이는 관심을 생각해 보면, 아직까지 우리는 중대한 의무를 방기하고 있는 셈이다. 우리도 이제 책임감을 느껴야 할 때가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