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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문(법)_comments(law)

명예훼손법과 표현의 자유 국제가이드라인

by transproms 2015. 12. 8.

<명예훼손법과 표현의 자유 국제가이드라인>


지난 금요일에는 Article19이라는 국제NGO의 전문가회의에 다녀왔습니다. 한국에서 온 박경신 교수님이 다리를 놓아 주셔서 함께 참석했습니다.  Article19(https://www.article19.org/)은 세계인권선언의 표현의 자유 조항(19조)를 따서 단체 이름을 지은, '표현의자유 전문 국제NGO인데, 활동도 활발하고 특히 좋은 보고서를 참 많이 냅니다. 그동안 여기 자료를 보고 도움을 많이 받았는데, 직접 가서 보고 또 많이 배웠습니다. 몇몇 나라에 지역사무소도 있는데, 한국 지부를 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회의는 “명예훼손과 표현의 자유”에 관한 국제 가이드라인을 만들기 위한 자문회의였는데, 내용이 흥미로운게 참 많았습니다. 나라별로 명예훼손법제가 달라서 공동의 기준을 만들기가 쉽지 않은데, 주요 국가에서 와서 한 마디씩 하니까 의미도 있고 개인적으로도 몰랐던 것을 많이 알게 되었네요. 대통령이나 공직자가 명예훼손 형사소송을 제기하고, 명예훼손으로 징역도 사는 한국 사례도 도마에 올랐는데, 이건 언제나 세계를 놀라게 합니다 ㅠㅠ 여하간 내년 발표 예정인 가이드라인의 주요 내용은 이렇습니다. 세부내용이 더 중요하고 흥미로운데 아직 논의 중이라, 일단 얼개는 이렇습니다.



1. 명예훼손 형사처벌은 폐지되어야 함.
- 당장 폐지가 어렵다면, 임시적으로 다음 조건하에 엄격 적용
i) 허위에 대해서만 가능하며, 허위임을 인식했거나 허위 여부에 대해 부주의했거나 의도적이었을 때만 적용
ii) 공적 인물은 고소 불가
iii) 징역형이나 과도한 벌금 기타 가혹한 형벌 금지


2. 명예훼손 민사배상 가이드라인
- 손해 발생 후 1년 내에만 소 제기 가능
- 허위가 아닌 사실적시에 대해서는 책임 없음
- 허위사실 공표도 공적 관심사를 제기하기 위한 합리적 이유가 있으면 면책됨.
- 사실 여부를 가릴 수 없는 의견/가치판단에 대해서는 책임 없음.
- 공적 관심사에 대해서는 원고(피해자)가 허위라는 점에 대한 입증책임을 짐.
- 공직자와 공적 인물은 원고가 될 수 없음
- 공공문서(정부 문서, 재판서류)에 대해서 책임 없음.
- 다른 사람의 의견을 적절하게 옮겼을 뿐이라면 책임 없음
- 적절한 사과가 이루어졌다면 판결에서 고려되어야 함.


3. 명예훼손 피해 구제 가이드라인
- 명예훼손 구제는 손해를 원상복귀하는데 초점이 있지, 가해자를 처벌하는게 아님
- 자율규제 등으로 인한 해법이 먼저 모색되어야 함.
- 금전배상 이외의 구제책이 우선시되어야 하고 금정배상은 최후수단이 되어야 함.
- 반론권(the right of reply)이 적극 활용되어야 함
- 가처분은 사전검열이 되어서는 안됨.
- 가처분은 회복하기 힘든 손해(원고 입증)가 예정되어 있고 명예훼손이 거의 확실할 때 시행.
- 영구금지명령은 아주 제한적으로 법원 명령에 의해서만 시행.
- 금전배상 판결시 표현의 자유 위축 가능성이 고려되어야 함.
- 명예회복이 아닌 위축효과를 노리는 악의적 소송(공공 참여에 대한 전략 소송, SLAPP)은 기각되어야 함.
- 여러 나라에서 동시에 소송 제기하는 것(forum shopping, libel tourism)은 제한됨.
- 소송과정에서 표현의 자유에 대한 국제규범이 적절히 고려되어야 함.



가장 복잡하고 어려운 주제는 역시, 의견과 사실의 구분 문제. <제국의 위안부> 소송도 이게 핵심입니다. 일단 법원의 가처분 결정문과 검찰 공소장은 이 책의 위안부 규정이 '허위'라고 보고 있습니다. 물론 허위가 아닌 사실적시로도 명예훼손이 가능하고, 민사에서는 의견도 불법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우리 판례의 입장입니다만, 어쨌든 판결에서는 의견/사실, 사실/허위의 구분을 전제하죠.


그런데 ‘학문’의 관점에서는 사실인지 의견인지 여부를 구분하는게 별 의미가 없습니다. 학문에서는 '해석되지 않은 순수한 사실’이라는 것 자체가 애시당초 없으니까요. 인문학은 당연, 사회과학은 물론, 심지어 자연과학이나 공학도 마찬가집니다 (‘과학은 아니라고요!'라고 말하실 분 있는거 잘 압니다^^;;) 하여간 학문에서는 별 의미없는 이 ‘구분’이 법정에서는 무지 중요합니다. 여기가 바로 ‘법의 코드’와 ‘학문의 코드’가 갈리는 지점이죠. 이것 때문에 학문에 대한 소송은 언제나 학문의 자유를 위협할 위험이 안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 부분이 굉장히 미묘하고 어려운 문제인데, 세계 각국의 전문가/활동가들이 어떤 결론을 내릴지 궁금합니다. 일단은 '의견이나 사실적시로는 명예훼손이 될 수 없고 허위사실에 대해서만 명예훼손이 될 수 있다'는 쪽으로 가이드라인이 나올 것으로 예상됩니다. 이에 따른 구체적인 기준 제시가 더 중요한 부분이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