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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문(법)_comments(law)

<그알> 인터뷰 관련 해명과 사과

by transproms 2016. 6. 5.

어제 밤 <그것이 알고 싶다>에 나온 제 멘트 때문에 사달이 났네요. 일단 제가 명백히 잘못한 부분도 있고, 또 이해를 구하고 싶은 부분도 있고 그렇습니다. 어쨌든 일은 벌어진 것이고 그래도 해명은 필요할 것 같아서 긴 글을 올립니다.

 

1. SNS에서 “여성들도 이 문제를 남성들에게 설득하려고 하지 않은 측면이 있다”는 저의 멘트가 캡처되어 돌아다니는 점은 심히 유감입니다. 방송에서는 바로 이어서, "여성들은 설득안해도 스스로 느끼고 있는 문제다", "이 문제를 궁극적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남성도 여성들이 왜 저런 격한 반응을 보이는지 이해를 해야 한다”는 내용이 이어집니다. 이어지는 멘트까지 본다면, 여성들이 설득에 실패한 책임을 묻는 것이 아니라, 남성들이 강남역 사건 이후의 반응와 여성혐오의 문제를 이해하지 않고 있는 책임을 묻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 하지만, 방송 동영상 전체를 봐도 여전히 문제가 있다는 지적은 온전히 인정합니다. 사정은 좀 복잡합니다. 제가 말하는 ‘설득’은 여성들이 각자 남성들을 설득을 해야 한다거나, 여성집단이 남성집단을 설득하는데 실패했다거나, 여성운동이나 페미니즘이 설득을 못한 책임을 묻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법사회학 전공자로서, 법이 사회를 어떻게 바꿀 수 있고, 또 없는지를 연구해왔습니다. 결론적으로 저는 결국 ‘설득의 기제’(persuasion mechanisms)가 작동해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건 단순히 개인이나 집단이 ‘사적인’ 노력을 해야 한다는 의미하고는 거리가 멉니다. 문제는 언제나 ‘구조적’이고, 구조적으로 풀어야 한다는 것이죠. 제가 말하는 설득의 기제는 학교에서의 시민(인권/평등)교육, 직장내 성희롱/성평등교육, 공공 미디어, 직장문화, 사회의 전반적인 인식 등은 물론이고, 직장이나 학교에서의 각종 상담기관 또는 고충처리기관(명예고용평등감독관, 성평등상담소 등), 시민사회의 인권상담-구제기관, 국가인권기구의 비강제적 인권구제 등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설득의 기제들은 ‘강제 규제’가 적절히 압박을 가할 때 원활하게 작동합니다. 즉, 인권침해행위에 대한 적절한 법제도의 구비(여성 문제에 관련해서는 데이트 폭력 문제나 스토킹 문제, 차별금지법 등이 법적 공백상태입니다), 그리고 실무에서의 엄정한 수사와 단호한 처벌이 함께 할 때, 소위 ‘설득의 기제’들도 작동할 수 있습니다. 그런 구조적 조건하에서 실제로 ‘설득’되고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고요. 제가 말하는 '설득'은 이런 취지였습니다.

 

3. 실제로 전체 인터뷰에서는 ‘해결방안’을 묻는 질문에 대해, ‘치안대책’에 매몰되면 안되고, 이 사건의 기저에 있는 ‘여성에 대한 차별과 혐오’의 근절로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SNS, 블로그, 기고문 등에서 발언했던 취지와 동일한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2에서 언급한) 설득의 기제들과 법적/강제적 규제가 필요함을 하나하나 설명했고요. 특히 ‘교육’의 문제와 ‘차별금지법’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구조적 압박을 통해 결국 남성들이 강남역 사건에 대한 여성들의 반응을 이해할 수 있게 되어어야 하고, 그렇게 (잠재적 가해자로 지목된) 남성들이 생각을 바꿔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이런 부분은 전혀 방송되지 않았고, 오로지 ‘설득’부분만 방송되다 보니, 제가 진짜 얘기하고자 하는 취지와 어긋나게 된 것입니다. 


4. 특히, 제가 주어를 '여성'이라고 쓴 바람에 더 오해가 커졌는데, 이 부분은 저의 잘못이고, 이부분은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저렇게 말해놓고 맥락을 잘 이해해달라고 요구할 염치는 없습니다. 다만, 위에서 말씀드렸던 바대로 설득의 ‘주체’가 여성이라던가, 설득이 실패한 책임이 여성에게 있다는 의미를 전달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다는 점을 말씀드리며 간곡히 이해를 구할 뿐입니다. 구조적인 기제를 마련해야 하고, 그렇게 해서 남성들이 이 사건에 대한 반응을 이해하고 남성들 스스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설득’을 말한 것입니다. 즉, 우리 사회의 구조에서 그런 남성들이 탄생한 것이고, 그런 구조를 마련해나가야할 책임은 우리 사회에 있는 것이고, 그런 구조를 마련하라는 요구는 국가와 그런 요구를 암묵적으로 묵살해온 남성들에게 향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저 같이 '제도' 설계를 공부하는 사람에게 있는 것이기도 하고, 이 문제를 고민해온 입장에서 스스로에게 책임을 묻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저는 소수자에게 설득의 책임을 묻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의 (더 교묘한) 차별/혐오라고 생각하는데, 제가 그런 발화의 주인공처럼 비춰진 것에 당혹감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5.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단순히 저의 ‘실수’였다거나, 모든 문제는 편집일 뿐이라고 억울함을 호소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어떤 사안을 완벽하게 장악하고 있다면, 오해의 소지가 있는 말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같이 ‘말’로 먹고 사는 사람, 그것이 공중파에서도 방송될 수 있는 사람은 더 큰 책임이 있고요. ‘설득’이라는 말이 어떻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충분히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설득이라는 말을 입에 담는 순간, 그것이 ‘(여성)주체’의 책임을 묻는 뉘앙스가 되면서, 문제의 책임 소재를 혼동시킬 수 있다는 점을 인지하지 못햇습니다. 이 상황에서 공포와 분노를 느끼는 여성들에게 ‘설득’이라는 말이 어떻게 인식될지 몰랐다는 것은, 이 상황에 대한 저의 이해에 문제가 있다는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이 긴 해명글에도 문제가 있는 부분이 있을지 모릅니다. 여전히 문제가 있는 부분은 가차 없이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와 관련해서는 시간을 두고 반성하면서, 도움주실 분들을 찾아뵙고 조언도 구해볼 생각입니다.

 

6. 사실 저는 인터뷰 요청에 상당히 까다롭게 응하는 편입니다. 일단 가벼운 코멘트조차도 ‘논문’을 쓴 내용에 대해서만 응하고 있고, 신뢰할만한 매체나 기자가 아니면 원칙적으로 응하지 않습니다. SNS에 허접하게 쓴 글이 언론매체에 인용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며, 너무 심한 경우에는 하나하나 찾아다니면서 글을 내려달라고 요청해왔습니다. 특히, '기고'라면 모를까, '구어'로 전화인터뷰를 하는 것은 (오해 없이 써주는) 신뢰할만한 기자가 아니면 거절해 왔습니다. 이번 강남역 사건은 제가 지난 3년 동안 제 모든 역량을 투입해 연구했던 주제인 ‘혐오’와 관련이 되어 있었고, 일종의 소명의식으로 이런저런 경로로 매스컴을 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일반적인 소수자 혐오에 비해 ‘여성’혐오가 특수성이 있음을 스스로 인정한 바 있고, ‘여성’문제는 자신있게 얘기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는 점을 스스로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제넘게 나선 부분이 있었습니다. 스스로 분노와 부끄러움이 겹치면서 다소 흥분했던 부분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점들이 부주의를 초래했던 것 같습니다. 게다가 저는 이런 다큐 방송에 나온 것이 처음도 아닙니다. 어떤 부분이 어떻게 편집될 수 있는지 모르지 않습니다. 그런 부분을 예상해야 할 책임도 있었다고 봅니다. 저의 안일함이 문제를 야기한 부분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피디에게 프로그램 전반적인 취지의 설명을 들었을 때, 어떤 인위적인 '해결'과 '화해'를 추구하려는 듯한 아슬아슬한 위험함이 느껴졌습니다. 그 이전에 <그알> 포맷에 그다지 적합한 소재가 아니라는 생각과 제가 주로 말하고자 하는 바가 수용될만한 포맷이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 점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은 것이 저의 잘못입니다. 그래도 좋은 프로그램을 만들어보려는 피디님의 의지에 신뢰감이 느껴졌고, 저도 몇가지 우려를 전달하면서도 좋은 방향으로 방송이 잘 만들어졌으면 좋겠다고 부탁을 드렸습니다. 방송을 보니 나름 피디가 여러가지 시도를 통해 많은 노력을 했음이 느껴졌으나, 결국 전반적인 주제의식과 세부 내용에서 문제가 적지 않았다고 봅니다. 저도 거기에 일조했는다는 점에 대한 책임도 통감합니다. (*프로그램의 문제에 대해서는 이 기사에 대체로 동의합니다 http://www.mediatoday.co.kr/?mod=news&act=articleView&idxno=130343) 그리고, 사실 이 프로그램 외에도 방송국 서너군데에서 이미 관련 영상을 촬영을 한 상태입니다. 제 인식수준의 한계를 알게된 이상 이대로 방송이 되는 것은 곤란하다고 생각하여, 제 인터뷰 분은 방송되지 않도록 정중히 요청할 예정입니다.

 

7. 그동안 제가 썼던 글과 기고문은 제 블로그(http://transproms.tistory.com/)와 한겨레 21 기고문(http://h21.hani.co.kr/arti/cover/cover_general/41808.html)을 참조해주시길 바랍니다. 그동안 제 글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저는 혐오표현/범죄를 연구해온 입장에서, 이 문제가 '혐오범죄' 여부로 환원되어서는 안되고, 특히 경찰과 정부가 '여성혐오범죄가 아님'으로 몰고 가는 것에 대해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비판을 해왔습니다. 그리고 강남역 사건이 우리 사회에서 던지는 진정한 메시지를 부각시켜야한 일념으로 진심을 다해 노력해왔습니다. 부디 그런 맥락에서 저의 잘못과 실수를 이해해주시기를 간곡히 바랍니다. 사정이 어찌되었건 캡쳐된 화면을 보고 분노하셨던 분들께는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또한 제가 그동안 해온 이야기들에 근거하여, 저의 발언을 ‘맥락’적으로 이해해주신 분들, 질문을 해서 해명의 기회를 주신 분들, 그리고 제가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분들에 대해 감사의 말씀드립니다. 특히, @ANGIEINKOR님이 “저는 이번 사건 후 여성들이 여성으로서의 삶을 '증언'을 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설득'은 아닌 것은 맞지만, ‘왜 이 증언들을 사회가 부정하고, 공감하지 못하는가,’라고 질문하셨다면 더 와닿았을 듯 합니다.”라고 지적해주신 것 감사드립니다. 정확하게 저의 오류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이번 일을 배움과 반성의 계기로 삼겠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홍성수 드림

 

 

 

 * 후속조치: SBS 말고, 4개의 매체에서 이미 촬영을 해간 상태였고, 정중히 양해를 구하고 제 인터뷰 분량을 빼달라고 요청했습니다. 3개 매체는 고맙게도 수용을 해주셨는데, MBC <PD수첩>에서는 오늘 방송이라 시간관계상 제 인터뷰 분량을 삭제하기가 어렵다는 말씀하시면서, 어느 부분이 편집되어 나갔는지까지 일일히 확인해서 보내주셨습니다. 다행히 제가 말하고 싶은 맥락이 잘 반영되어서 편집된 것 같고, 시간관계상 삭제 요청은 무리인 것 같아서, 불가피하게 제 인터뷰가 방송에는 나갈 겁니다. 이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