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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기고_mass media

[기고] 사법불신을 부르는 전관예우

by transproms 2013. 3. 27.

사법불신을 부르는 전관예우



홍성수 (숙명여자대학교 법학부 교수)



언제부터인가 고위급 판검사 출신 변호사들의 전관예우가 인사청문회의 단골메뉴가 되었다. 그들의 해명은 대개 이렇다. “공직에서 쌓아온 지식과 경험을 인정받았을 뿐이다.” 과연 그럴까? 그들이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는지 여부를 따지는 것이 쉽지만은 않지만, 거액의 수임료를 받는 것만큼은 주지의 사실이다. 일반인과의 비교가 아니다. 전관 변호사와 일반 변호사의 실력 차이가 과연 수임료의 차이만큼이냐고 묻는 것이다. 그 차이가 과도하다면, 그 시장가격은 어떤 ‘힘’이 작동하는 현실이 반영된 결과라고 가정해 볼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전관 변호사가 힘을 쓴다는 잘못된 관념에 편승해서 과도한 돈을 받은 셈이다. 어떻게 봐도 문제라는 얘기다.


이뿐만이 아니다. 공직에서 쌓은 지식과 경험은 공직자 개인이 노력한 결과이기도 하지만 일종의 공적 자산이다. 퇴임 후 공동체를 위해 봉사하며 여생을 보낸다는 스토리는 그런 취지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전관 변호사들이 거액의 수임료를 받는 일에만 몰두하면, 그들의 법률서비스는 고액의 수임료를 지급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만 독점되고, 공적 자산이 경제력의 차이에 따라 불공평하게 분배되는 결과를 낳게 된다.


게다가 이것은 공정한 수사와 재판을 위해 분투하고 있는 현직 후배들에게도 누를 끼치게 된다. 전관 변호사의 법률서비스를 받을 수 없는 사회적 약자들에게 불리한 결정이 내려지면, “퇴임 후 수임료를 줄 집단에게 유리한 결정 아니냐?”고 의심할 수 있다. 전관 변호사가 승소한 재판을 두고, “선배의 편의를 봐준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전관 변호사로 활약한 사람들이 다시 고위 공직자가 되는 이른바 ‘회전문’은 문제를 더 가중시킨다. “다시 상관이 될지도 모르는 선배의 눈치를 본 것 아니냐”는 의심을 낳기 때문이다. 위 법관이 행정부로 가는 경우에도 문제는 동일하다. 이런 행태가 반복되면 법관의 재판이 “퇴임 후 행정부 고위직을 노린 것”이라는 혐의를 벗기 어려워진다.


다시 확인해 두지만, 단순히 벌어들인 돈의 크기를 문제 삼는 것도 아니고, 대부분의 현직 판검사들이 실제로 전관 변호사의 편의를 봐주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이러한 관행들로 인해 사법에 대한 총체적 불신이 야기되는 현실을 이대로 두고 볼 것이냐고 묻는 것이다. 소송법상 법관과 이해관계가 있는 특수관계인 등을 제척·기피하는 제도를 두고 있는 이유가 단순히 법관이 못 미더워서가 아니라, 외관상으로도 재판의 공정성을 확보해 국민의 신뢰를 얻기 위한 방편이라는 점은 법조인들이 더 잘 알 것이다. 이런 현실을 두고도 여전히 “실력을 인정받은 것일 뿐”이라 강변할 것인가?


전관예우에 관한 한, 법적 규제를 아무리 강화해도 화끈한 효과를 거두기 어렵다. 오히려 법조계의 자성에 기대를 걸어보는 것이 현실적일지도 모른다. ‘평판’을 중시하는 법조계의 현실을 고려하면, 법조계 내부에서 전관 변호사들의 행태를 부끄럽게 여기는 풍토가 조성된다면 게임 끝이다. 퇴임 후 공익적 일에 봉사하는 것이 당연시되어 일반적인 관행으로 정착된다면 사법불신을 해소하는 데 크게 기여할 것이다. 물론 법조계 내부의 자성을 기다릴 수만은 없기에, 시민사회의 감시와 관련 연구 등을 통해 법조계의 현실을 ‘객관화’하여 법조계 내부의 자기정당화 논리가 혁파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는 것도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최소한 고위급 출신 전관 변호사로서 특별한 이득을 누리다가 다시 고위 공직자가 되는 관행만큼은 더 이상 없어야 한다. 이건 정치권이 마음만 먹으면 된다. 인사청문회에서 여야 할 것 없이 전관예우를 문제 삼지만, 그 전관들을 임명한 것 역시 정치권이기 때문이다.



* 출처: 한겨레신문, 2013.2.25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