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로베르 바댕테르, 송민주 역 '사형제도에 반하여'


프랑스는 어떻게 사형제도를 폐지했나?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4608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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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군 복무자 대학학점 인정제 도입-반대

실질적 보상 안 되고 형평성에도 위배


홍성수 숙명여대 법학부 교수


대학생이 군 복무를 마치고 복학했을 때 최대 6학점을 인정해주는 방안을 놓고 논란이 일고 있다. 국방부가 복학생이 군에서 받은 교육훈련을 소속 대학 학점으로 인정해주는 포괄적 학점 인정제를 제안하고 최근 공청회도 열었지만 대학 자율성과 양성평등을 주장하는 학계 및 여성계의 반발이 거세다. 학점 인정제를 찬성하는 측은 병역 의무를 다하는 병사들에 대한 최소한의 합리적 보상이 필요하며 병사 가운데 80% 이상이 대학 재학생임을 감안할 때 필요한 방안이라고 주장한다. 반면 반대 측은 군과 대학에서의 학습 성격이 확연히 달라 실효성이 없고 중고교만 졸업하고 입대한 장병이나 장애인과 여성 등에게는 상대적으로 피해를 줄 수 있다며 반박하고 있다. 양측의 견해를 싣는다. 

군 당국이 군 복무경험을 학점으로 인정하는 방안을 추진하는 모양이다. 군 가산점제와 마찬가지로 형평성에 어긋나고 원칙에 반하고 실효성도 없는 대책이 또 추진되고 있다는 사실에 실망을 금할 수 없다.

무엇보다 군 복무와 학점은 서로 대체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군 복무경험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대학이 추구하는 바와 군 복무가 추구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이다. 대학에서 3학점 수업을 설계하고 준비하고 강의하고 과제를 하고 복습하고 시험을 치르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지식의 상호작용을 생각해보자. 이것이 군 복무 과정에서 벌어지는 일들과 ‘같은’ 성질의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물론 대학에서도 강의실 밖에서의 실습이나 산업체 근무 등을 학점으로 인정해주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그것은 대학 스스로 그런 경험이 학점과 ‘등가성’이 있다고 개별적으로 판단해 인정하는 것이다. 모든 대학이 일률적으로 군 복무경험을 학점으로 인정해야 한다면 대학의 자율성에 정면으로 반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설사 대학들이 군 당국의 ‘제안’에 자발적으로 응한다고 해도 학점인정이 군 복무에 대한 실질적인 보상이 된다고 하기는 어렵다. 요즘 4년제 대학의 졸업학점이 보통 120~130학점이다. 매학기 18학점씩만 수강해도 한 학기가 통으로 남을 정도인데 6학점이 군 복무로 대체된다고 한들 대단한 혜택이라고 볼 수 있을까. 사정상 학점인정을 원하는 학생에게는 약간의 도움이 될 수는 있겠지만 학점인정을 원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혜택이 될 수 없다. 대졸자를 채용하는 기업 입장에서 봐도 마찬가지다. 수업을 듣고 120학점을 취득한 졸업생을 선호할까, 아니면 114학점을 수강하고 6학점은 군 복무로 대체한 졸업생을 선호할까. 더욱이 대학졸업자나 고졸자에게는 아예 해당사항이 없다. 군 복무 중인 대학 재학생은 78% 정도라고 하니 나머지 22%에 달하는 군 복무자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대책이라는 얘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업단절문제 해소’를 도입 취지로 내세운 것만큼은 의미가 있다. 그런데 그 의미를 살리려면 군 복무 자체를 학점으로 인정하는 것보다는 군 복무 중 학업을 계속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즉 군 복무 중 자유시간을 활용해 원격수업을 수강할 수 있도록 배려하면 된다. 다행히 군 복무 중 원격강좌로 학점을 이수하는 훌륭한 제도를 이미 시행하고 있다. 문제는 이 좋은 제도의 수혜자가 대학 재학 중 입대자의 불과 2.7% (2014년 기준)뿐이라는 점에 있다. 이들에게 학업단절의 문제를 해결해주려면 이 비율을 획기적으로 끌어올릴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원격사이버수업은 이미 보편화됐으니 일과 후 자유시간을 충분히 보장해 동영상 시청과 예습·복습이 가능하도록 여건을 마련하기만 하면 된다. 이런 원격수업 수강이 가능해지면 21개월의 군 복무 기간 동안 12학점 정도 이수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6학점을 군 복무경험으로 대체하는 것보다 더 큰 혜택이며 학업단절의 문제도 해소될 수 있는 좋은 대안이다. 

이러한 여건이 마련되면 대학 재학생이 아닌 전체 군 복무자에게도 도움이 된다. 그들에게 문제는 학업단절이 아니라 경력단절이다. 휴식시간 동안 자기계발을 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된다면 사회복귀에 필요한 독서·자료검색·취업교육 등 경력단절을 메울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군대에서의 가혹행위·자살 등의 문제의 원인은 대개 내무반 생활에 있다. 군인들이 충분한 휴식시간 동안 자율적으로 학업·경력단절을 메우기 위한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된다면 군 복무 만족도도 높아지고 각종 사고 발생률도 줄어들게 될 것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모든 군 복무자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실질적 보상이다. 군 복무 중 부당한 대우를 받지 않고 충분한 임금을 받으며 일과 후 자유시간을 보장받으며 사회복귀를 준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군 복무로 인한 불이익을 최소화하는 가장 원칙적이고 실효성 있는 방법이다. 틈만 나면 군 복무 학점인정제나 군가산점제 도입 주장이 나오는 이유는 이들 제도가 별다른 추가 비용도 없이 군 복무로 인한 문제를 군대 밖으로 돌릴 수 있는 손쉬운 대책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대책들이 충분한 보상을 받지 못하는 열악한 처지의 군 복무자들에게 작은 위로가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군 복무로 인한 불이익 해소 문제에 관한 한 ‘손쉬운’ 해법은 없다. 

* 출처: 서울경제신문, 2016.3.24

http://www.sedaily.com/News/NewsView/NewsPrint?Nid=1KTVXEXEB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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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복무 학점 인정 미봉책이다

[ 아침을 열며 ] 홍성수 숙명여대 법학부 부교수


국방부가 군복무를 대학 학점으로 인정하는 제도를 추진하겠다고 발표했다. 일부 대학생들에게는 귀가 솔깃할 만한 제안이다. 하지만 이 제도는 보편적인 보상책이 아니라는 점에서 기본적인 문제가 있다. 공공기관 취업자에게만 혜택이 한정된 군가산점제와 마찬가지로 이 제도 역시 대학생만을 위한 것이며 15%에 달하는 고졸 군복무자와는 사실상 무관하다. 대학생에게도 실질적인 혜택인지 의문이다. 군복무로 학점을 인정받는 것이 경우에 따라서는 도움이 될 수도 있겠지만, 21개월의 군복무에 대한 보상치고는 여전히 턱없이 부족한 수준이다. 일부러 학점을 더 듣고 졸업하는 학생들도 있는 마당에 사실상 9학점을 면제시켜 주는 것이 과연 ‘보상’일지 잘 모르겠다.


근본적으로는 군가산점제에서 학점인정제로 이어지는 일련의 흐름에서 나타난 접근방법을 지적하고 싶다. 첫번째는 비용을 들이지 않고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는 점이다. 군복무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보상은 군복무자에게 합당한 임금을 지급하는 것이다. 월 10만원 남짓한 현재의 군장병 월급은 언급하기조차 부끄러운 수준이다. 장기적으로는 최저임금 수준은 돼야겠지만 최소한 정치권에서 이미 논의된 대로 30만~50만원 수준까지는 지체없이 인상돼야 한다. 내무반 시설 등 기본적인 병영생활의 의식주 문제에서도 획기적인 개선이 이뤄져야 한다. 모두 돈 드는 일이다. 의무복무니까 고충이 있어도 감수하라는 식이 아니라 의무복무니까 더욱 최대한의 보상과 복지를 제공해야 한다. 여기에 예산을 마련할 의지가 없는 상태에서는 그 어떤 대안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문제를 군 내부에서 찾지 않고 군 외부에 떠넘기려고 하는 점도 짚고 넘어가야 한다. 군가산점제나 학점인정제는 공공기관이나 대학 등 군 외부에서 떠맡아야 하는 일이다. 이들 기관들의 충분한 이해가 선행되지 않는다면 시행될 수 없는 사안이다. 예컨대 대학의 총이수학점은 대학에서 여러 가지를 고려해 설정한 것이고, 수업 외의 활동을 학점으로 인정해 주는 것은 그 활동이 수업에 상응하는 가치를 지닌다고 판단될 때만 가능한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의 군복무 경험이 과연 일정 학점 취득과 동등한 가치가 있는지부터 물어야 한다. 이에 대한 대학과 사회의 판단이 선행돼야 한다. 군복무경험이 대학과 사회에서 요구하는 가치와 일치하지 않는 상황에서 군복무 경력을 학점이나 점수로 인정하는 것은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크다. 군복무가 가치 있는 경험으로 사회의 인정을 받고, 자연스럽게 대학과 사회가 여기에 반응하는 것이 순서다.


군복무로 인한 경력단절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근본적으로 군복무기간을 최소화하고 근무 외 휴식시간을 보장해 자기계발의 시간을 갖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대학생이라면 원격강좌를 통해 군복무기간 동안 10학점 정도는 학점 취득이 가능하다. 고졸자들도 다양한 자기계발의 기회를 가질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 원격강좌를 수강하는 군장병은 1% 남짓이다. IT강국에서 기술적인 문제가 있을 리 없다. 일과 후 충분한 자기 시간이 보장되지 않는 병영문화가 문제일 것이다. 그렇다면 군이 병영문화를 개선해 이 좋은 제도를 잘 시행하는데 최선을 다해야 할까, 아니면 군복무 자체를 학점으로 인정해 달라고 군 외부에 요구해야 할까?


열악한 병영현실을 그대로 놔둔 채 외부기관에 군복무를 가산점이나 학점으로 인정받게 해달라는 건 효과도 미미하지만 발상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여성 장애인 고졸자 등과의 차별과 형평성 문제 등 불필요한 갈등까지 야기하고 있으니 더욱 문제다. 안락한 병영시설에서 좋은 상관·동료들과 함께 지내면서 세상살이도 배우고, 건전하고 민주적인 조직문화도 익히고, 정당한 임금을 받아 저축도 하고, 일과 후에는 취미생활을 하고 공부도 하면서 18개월 이내로 군복무를 한다면 어떨까? 군복무 보상의 열쇠는 여전히 국가와 군대가 쥐고 있다. 충분한 비용을 들일 용의도 없고 병영문화 자체를 획기적으로 바꿀 의지도 없으면서 제시되는 모든 대책은 미봉책일 수밖에 없다.


출처: 한국일보, 2014.6.10


http://www.hankookilbo.com/v/eccefc6fa4ab4ab6be2aa1114b38650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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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혐오범죄, 대통령의 입장은

한국일보, 2014.12.16

결국 ‘황산테러’까지 등장했다. 종북세력에 대한 증오가 물리적 폭력으로까지 나아간 것이다.

여기서 ‘혐오범죄’라는 개념이 문제의 본질에 접근하는데 유용하다. ‘혐오범죄’(hate crime)란 새로운 범죄유형이라기보다는 어떤 집단에 대한 증오나 편견에 의해 살인, 강간, 폭행, 재물손괴 등 기존의 범죄를 저지르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혐오범죄를 ‘편견에 동기화된 범죄’(bias-motivated crime)라고 부르기도 한다. 혐오범죄는 기본적으로 소수자 집단에 대한 ‘차별’이기도 하다. 실제로 차별사유로 거론되는 인종, 민족, 사회적 지위, 성적 지향, 종교, 장애인 등은 그대로 혐오범죄의 근거가 된다.

특정한 차별적 속성을 가진 집단의 불특정 다수가 범죄대상이 되기 때문에 혐오범죄는 단 한 건만으로도 집단 전체에 대한 광범위한 공포심을 야기하곤 한다. 증오심에 기반을 두고 있기에 잔혹한 범죄양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증오나 편견이 사회 전반에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기도 하고, 여러 세대에 걸쳐 재생산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혐오범죄의 피해는 광범위하고 지속적이며 확장성이 매우 크다. 서구국가들이 일찌감치 혐오범죄에 엄중하게 대처해온 이유가 여기에 있다.

혐오범죄는 우리의 현실이기도 하다. 이주자ㆍ외국인들에 대한 증오심이 커지고 있음이 이미 곳곳에서 확인되고 있으며, 물리적 폭력이 현실화한 사례도 보고되고 있다. 반동성애 시위 현장에서는 예전과는 달리 동성애 당사자들을 직접 지목해 악다구니를 퍼붓거나 물리적 폭력을 가하는 일이 빈번해지고 있다.

서구에서 혐오범죄는 주로 인종, 종교, 성적 지향 등에 근거하고 있지만, 한국전쟁과 분단을 경험한 한국사회에서는 이념·사상적 차이에 따른 증오와 편견이 특별히 문제가 돼 왔다. 실제로 정치적 반대파들을 ‘종북세력’이라는 딱지를 붙여 몰아세우는 것은 아주 유용한 공격수단이다. 최근 들어 이런 현상은 더욱 강화되고 있다. 한편으로 정부는 통합진보당 조직 사건과 위헌정당해산심판 등으로 압박을 가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일부 보수세력들이 ‘종북세력 척결’을 부르짖고 있다. 언론이 이를 조장하거나 부추기기도 한다. 기세등등해진 일부 세력들은 아예 농성장을 직접 철거한다고 행동에 나서거나 시위대와의 물리적 충돌을 불사하기도 한다.

‘황산테러’ 역시 이런 경향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황산테러’에 대해 동정적인 시선을 보내거나, 가해자를 ‘열사’로 지칭하며 모금운동까지 벌이고 있는 것은 문제의 심각성을 잘 보여준다. 특정 집단에 대한 증오와 편견이 물리적 폭력으로 나아가고, 그런 행동이 사회적으로 정당화되면서 다시 증오와 편견이 강화되고 고착화되는 ‘혐오범죄’의 일반적인 확대ㆍ발전 경로와 매우 흡사하다.

가장 근본적인 해법은 증오와 편견을 낳는 사회적 요인들을 제거하는 것이다. 지금부터 체계적인 중장기 대책을 세워야 한다. 하지만 이미 뿌리깊게 자리잡힌 증오와 편견이 하루 아침에 사라질 것을 기대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당장의 문제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도 필요하다. 먼저, 혐오범죄처벌법이 필요하다. 혐오범죄를 가중처벌함으로써 혐오범죄에 대해 우리 사회가 단호한 태도를 취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확인할 필요가 있다. 또한 물리적 폭력을 행사하는 세력을 철저하게 고립시켜야 한다. 그런 점에서 ‘황산테러’를 어설프게 정당화하거나 어정쩡한 태도를 취함으로써 정치적 이득을 얻으려는 세력들과 철저하게 선을 그어야 한다. 특히 정치인이나 영향력 있는 사람들에게는 ‘황산테러에 대한 입장’을 철저하게 따져 묻고, 불분명한 태도를 취하는 이들에게는 엄중한 정치적ㆍ사회적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황산테러에 대해서는 애써 모른 채 하며, 오로지 ‘종북’ 문제만을 언급한 엊그제 대통령의 발언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그 동안의 공안대책을 반성하면서 폭력에 대한 불관용 입장을 피력해도 부족할 판에 오히려 원인제공자를 탓하고 나선 셈이다. 지금 단계에서 가장 집요하게 질문을 던져야 할 대상은 바로 박근혜 대통령이다.

홍성수 숙명여대 법학부 부교수


출처: http://www.hankookilbo.com/v/4f55539e2c794e4fb1ebc432933900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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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민반응? 아니, 모두의 문제

강남역 사건, 법적 혐오범죄로 단언하기 어렵지만 ‘여성혐오’ 공론화는 성차별 사회의 필연적 결과


한겨레21, 제1114호, 2016.6.6


링크: http://h21.hani.co.kr/arti/cover/cover_general/41808.html



서울의 번화가에서 한 여성이 살해되었다. 여성에 대한 혐오가 범행 동기 중 하나였다고 한다. 여성들은 곧바로 ‘나의 문제’라며 ‘집단적’인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사건 현장 근처에는 피해자를 추모하는 쪽지가 붙었고, 온라인에서도 그 열기가 이어졌다. 다들 집에서 나오기조차 무섭다고 했지만, 뭐라도 해야 할 것 같다며 삼삼오오 현장으로 모여들었다. 살아남은 자들의 연대가 시작된 것이다. 그들은 둘러앉아 그동안 마음속에 담고 있던 자신의 이야기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일상적 조롱과 비하, 노골적 차별과 적대, 그리고 크고 작은 폭력까지 그동안 공론화되지 못한 이야기가 쏟아져나왔다. 그들은 더 이상 당하고만 있는 침묵의 소수자가 아니었다.


이것은 지난 5월17일 발생한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벌어진 상황이지만, 소수자에 대한 어떤 상징적 폭력사건이 발생했을 때, 소수자 집단이 보여주는 전형적인 모습이기도 하다. 그런데 사건 발생 초기 누군가 이것을 ‘여성혐오범죄’라고 하면서 이 사건을 규정하는 중요한 키워드가 되었다. 하지만 일부 전문가들은 여성혐오범죄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경찰은 여성혐오범죄가 아니라는 수사 결과를 발표했고, 심지어 경찰청장이 직접 나서 “아직 대한민국에는 혐오범죄가 없다”고 단언하기까지 했다. 그러자 여성혐오, 잠재적 가해자 등의 말이 불편했던 일부 남성들의 역공이 시작되었다. 있지도 않은 ‘여성혐오범죄’를 빌미로 쓸데없는 대립과 갈등이 조장되고 있다며 억지주장을 중단하라고 나선 것이다.



‘여성혐오범죄’ 맞다 vs 아니다


혐오범죄의 개념부터 살펴봐야 꼬인 실타래를 풀 수 있을 것이다. 혐오범죄(Hate Crime)는 ‘편견의 동기’(Bias Motive)를 가지고 폭행, 성폭력, 살인 등 기존 범죄를 행하는 것이다. 이때 편견은 특정 소수자 집단에 대한 혐오, 차별, 적대 등을 말한다. 편견에 근거한 범죄가 비난가능성이 더 높고 해악도 더 크기 때문에 가중처벌하는 것이 혐오범죄법의 취지다.


그런데 법치국가에서 형벌의 가중은 신중할 수밖에 없다. 범행의 ‘주된’ 동기가 편견에 의한 것이어야 하고, 그것을 입증할 만한 범행 전후의 정황이 있어야 하다. 이러한 요건을 ‘충분히’ 충족하지 못하는 한 법적 혐오범죄는 성립할 수 없다. 경찰이 혐오범죄에 대한 분명한 기준을 가지고 있는지 의심스럽지만, 어쨌든 자신 있게 ‘혐오범죄가 아니다’라고 단언할 수 있었던 것에는 이러한 사정이 있다. 최소한 지금까지 보도된 것만 가지고 주된 범행 동기가 여성혐오라고 딱 잘라서 말하기 어려운 건 사실이다.



여성혐오범죄 규정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담론 형성 과정에서 전략적 선택의 문제일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강남역 사건을 두고, 우리가 ‘여성혐오’를 이야기할 수 없느냐 하면, 전혀 아니다. 편견 동기가 지배적이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영향을 준 것이 사실이라면 얼마든지 이 사건을 계기로 우리 사회의 ‘여성혐오’ 문제를 이야기할 수 있다. 여전히 이 사건이 ‘여성혐오범죄’라고 규정할 수도 있다. 여성혐오범죄 혐의를 가해자에게 귀속시킬 수 없다고 해도, 범행이 여성혐오와 관련 있는 한 여성혐오범죄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이다. 어차피, 혐오범죄법이 실정화되지 않은 나라에서, 경찰이 범죄 성격을 정했다고 전 국민이 일사불란하게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니다. 더욱이 최근 경찰은 “(여성혐오범죄가) 처음 접해본 용어라 정확한 입장 표명은 어렵다”(서초경찰서 형사과장, 2016년 5월26일)고 한발 물러서는 모양새를 취했다.


그래도 여전히 경찰학적·형사법적으로 여성혐오범죄로 규정하는 게 무리이고 불필요한 오해를 불러일으킨다면, 여성혐오‘적’ 범죄, 여성혐오와 ‘관련 있는’ 범죄라고 불러보면 어떨까? 이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새로운 담론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전략적 선택의 문제일 뿐이다. 언어의 ‘전유’를 중시하는 것도 타당하지만, 불필요한 논쟁과 대립을 피해서 진짜 핵심에 집중하는 것도 방법이다. 처음에 무리하게 ‘여성혐오범죄’라고 규정한 것이 생산적 논의를 가로막는다는 의견도 있지만, 거꾸로 그렇게 규정되지 않았다면 이렇게까지 공론화될 수 없었을 것이다.



‘여성혐오’ 용어의 의미


강신명 경찰청장은 수사결과 발표 뒤 “대한민국에는 혐오범죄가 없다”고 단언해 불필요한 ‘혐오범죄’ 논란의 빌미를 제공했다. 한겨레 김경호 선임기자

어떤 말로 이 사건을 규정하건 수많은 여성들이 왜 이렇게 반응하는지, 그 저변에 깔려 있는 공포와 분노의 본질은 어디에서 기인하는지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피해자가 속한 집단 전체에 가해진 충격과 공포는 “나는 우연히 살아남았다”라는 말로 정확하게 표현되었으며, 여성혐오라는 근본적인 문제가 의제화되기 시작했다. 여성들이 보여주는 조직적이고 집단적인 반응은 한국 여성들이 그동안 차별받고 억압받아왔으며, ‘소수자로서 집단적 정체성’을 가지고 있음을 입증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혐오범죄의 원인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차별’이다. 한국의 여성혐오범죄에서는 그것이 ‘여성혐오’로 담론화되었다. 여성혐오는 여성에 대한 편견, 무시, 비하, 멸시, 조롱 등 여성을 열등한 존재로 여기고 차별하는 모든 것을 통칭한다. 차별적 의식구조에서 발현되는 행태들의 논리는 유치하고 허술하기 짝이 없지만, 그것이 통념이 되고 이데올로기화하면 단단한 ‘사상적 배경’이 된다.(<인종차별의 역사>, 크리스티앙 들라캉파뉴) 이것이 남성들에게 은밀한 형태로 산재해 있는 여러 의식을 ‘여성혐오’로 개념화할 수 있는 이유이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강남역 사건은 이런 배경에서 발생한 하나의 비극적 ‘결과’이지 ‘진공상태’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며 “혐오범죄는 공동체에 만연한 편견의 폭력적 발현”(유럽안보협력기구(OSCE) 보고서)이다. 혐오와 차별이 있는 곳에서는 혐오범죄의 위험이 항상 도사리고 있다. 성소수자 혐오가 만연한 곳에서는 성소수자에 대한 폭력이, 이주자 차별과 적대가 있는 곳에서는 이주자에 대한 폭력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혐오, 차별, 혐오범죄는 하나의 메커니즘에서 작동한다. 유럽에서 혐오표현을 ‘표현’ 단계에서 선제적으로 금지한 이유는 바로 혐오의 의식이 표현되는 순간 언제든지 구체적 ‘행위’(차별과 폭력)로 나아갈 수 있음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혐오와 차별은 쉽게 확산되고 공고해진다. 물리적 폭력으로 이어지는 건 순식간이다.


이쯤에서 여성혐오범죄가 아니라며 이 사건의 의미를 애써 축소하려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한국 사회가 정말 ‘진공상태’였다면, 가해자가 굳이 “여자들에게 항상 무시당해 범행했다”고 진술하고, 굳이 여성을 범행 대상으로 골랐을까? 그리고 무엇보다 여성들이 집단적으로 격한 반응을 보였을까?


여성혐오범죄라는 개념 규정이 그리도 중요하다면, 그 개념은 포기한다고 치자. 그럼, 이번 사건을 통해 여성들이 보여준 반응의 의미를 과소평가해도 될까? 여성들이 호소하는 일상적 혐오와 차별의 문제들이 언제든 물리적 폭력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무시할 수 있을까? 이 질문들을 차마 외면할 수 없다면, 살아남은 우리 모두에게 이 문제를 함께 고민해야 할 윤리적·시민적 책무가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비유하자면, 우리는 대형 화산 폭발 사고로 인해 우리 땅 밑에 거대한 용암이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과 같다. 그렇다면 그 용암 제거에 나서야 한다. 용암의 존재를 확인한 이상 화산 분출만 막아봤자 별 소용 없다. 용암은 극단적 형태로만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남성들의 인식 기저에 있는 여성혐오 역시 살인과 같은 강력범죄로만 표출되는 것이 아니다. 여성혐오는 성적 대상화, 성적 괴롭힘(성희롱), 혐오표현, 고용·서비스·교육 등에서의 차별, 스토킹, 데이트 폭력, 폭행, 성폭행, 그리고 살인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한 영역에서 다양한 형태로 발현된다. 이런 상황에서 ‘치안 강화’에만 집중하는 것은 한계가 명백하다. 그 자체로 미봉책이 되기 십상이지만, 설사 일부 효과가 있다 해도 일상의 크고 작은 다른 위험을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법적 해결 환상 버려야


2014년 서울시가 동성애자 등의 인권보호 내용을 담은 인권헌장 제정 인권위원회를 열자 동성애 반대 시위가 강하게 벌어졌다. 한겨레 이정아 기자

혐오범죄‘법’에 대한 환상도 버려야 한다. 혐오범죄법은 처벌되지 않던 행위를 새롭게 처벌하는 것이 아니고, 기존 범죄가 편견을 동기로 행해진 경우에 가중처벌하는 법일 뿐이다. 어차피 처벌되는 것은 마찬가지고 다만 그 형벌의 강도만 높이는 것이다. 그런데 처벌 강도의 상향 조정은 범죄 예방에 직접적 효과가 없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졌다. 그럼에도 유럽이나 미국에서 혐오범죄법을 도입한 것은 일종의 상징적 조치로 이해되어야 한다. 혐오범죄를 공식적으로 ‘가시화’해 중요한 사회의제로 다루겠으며, 문제 해결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인 것이다.


그런 의지가 자연스럽게 혐오범죄법 제정으로 귀결된다면 모를까, 혐오범죄법 제정 자체를 놓고 다투는 것은 허망한 일이다. 거꾸로, 어떤 의지가 분명하다면 굳이 그런 ‘상징’은 불필요할 수도 있다. 의지를 가지고 여성혐오를 일소할 수 있는 여러 근본 대책을 마련하고 추진한다면, 혐오범죄법 없이도 얼마든지 효과를 거둘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지금 우리 정부가 보여준 태도는 너무나 실망스럽다. 상황이 이렇게 전개되고 있다면 일단 정부와 정치지도자들이 나서야 한다. 한편으로는, 불안과 공포에 떨고 있는 여성들에게 ‘우리 사회가 당신들의 편’임을 확인시켜줘야 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차별과 혐오를 조장하는 세력들과 분명하게 선을 그어야 한다. 섣부른 대책을 내놓거나, 여성혐오범죄라는 점을 애써 부정하는 일에 몰두할 때가 아니다.


물론 입법적 조치가 가진 위력은 분명히 있다. 그런데 그런 위력으로 따지자면 ‘차별금지법’ 제정이 더욱 우선적 과제다. 차별금지법 제정은 혐오와 차별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더 분명한 의지 표명이자, 혐오와 차별 문제를 가장 효과적으로 다루는 기제를 제공한다.


마지막으로, 여성혐오범죄는 여성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 땅에서 혐오와 차별에 노출된 모든 소수자의 문제다. 한 소수자에 대한 혐오는 다른 소수자로 쉽게 옮아간다. 경제 사정이 좋지 않을 때, 그 위기 탈출을 위해, 소수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은 ‘혐오’가 작동하는 전형적 메커니즘이다. 이때 선택되는 소수자는 여성일 수도 있고 성소수자, 이주자, 장애인일 수도 있다.


우리는 이미 새누리당 이자스민 의원에 대한 잔인한 언어폭력을 목도해야 했다. 인터넷에서는 ‘다문화반대론자’들이 이주자에 대한 노골적인 혐오를 드러내는 게시물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최근 성소수자 혐오는 더욱 노골화되어 성소수자 반대를 표방하는 정당이 버젓이 공직선거에 출마하는가 하면, 성소수자를 겨냥해 면전에서 악다구니를 퍼붓는 일도 벌어지고 있다. 정신질환범죄라는 경찰 발표가 나오자, ‘정신질환자를 모두 감금하라’는 게시글이 베스트에 올랐다.


상황이 여기까지 왔으면, 지금 당장 ‘혐오범죄’가 발생한다고 해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백주대낮에 오로지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이주자라는 이유로, 정신질환자라는 이유로 집단 린치를 당하는 비극적 사태는 이제 ‘임박한’ 현실이 된 것이다.



시한폭탄이 터지지 않도록


사건 하나 가지고 과민반응을 하는 게 결코 아니다. 한 사회의 혐오와 차별은 쉽게 확산되고 공고해진다. 요즘은 인터넷과 스마트폰을 타고 더욱 광범위하고 빠른 속도로 전파된다. 더욱이 요즘처럼 사회불만이 증폭될 수 있는 사회경제적 현실에서 차별과 혐오는 카운트다운에 들어간 시한폭탄이나 다름없다. 차별과 혐오가 물리적 폭력으로 이어지는 것은 ‘순식간’이라는 게 이미 십수 년 전 우리와 같은 상황에 직면했던 나라들의 공통된 경험이다. 그리고 그 역사적 교훈이 혐오와 차별에 대한 단호한 법적·사회적 대응으로 이어졌다. 여유를 부리기에는 상황이 너무 급박하다. 절박한 심정으로 우리 사회의 혐오와 차별에 맞서 싸워야 할 시기가 온 것이다.



홍성수 숙명여대 법학부 교수


*혐오범죄보다 증오범죄가 혐오의 격정적 상태에서 발생하는 범죄를 표현하는 데 더 적절하다고 생각되나, 강남역 사건 이후 혐오범죄라는 용어가 일반화된 관계로 편의상 혐오범죄라는 표현을 사용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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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5월부터 10월까지 <한겨레21>에 연재된 [홍성수의 혐오시대유감]


1회 (제1062호, 2015.5.19)

‘나쁜 표현’ 앞 새로운 전선 (링크)

표현의 자유 앞 전통적 진보·보수 대결 구도 무너진 때, 소수자에게 불리한 방향으로의 변화 막기 위해 혐오 표현에 대한 논의 필요해


2회 (제1066호, 2015.6.18)

괴담 잡기에 쓸 힘 ‘혐오표현’ 잡기에 쓰시라! (링크)

시민의 정부 비판 목소리 높아질 때마다 괴담 유포자 색출 나서는 익숙한 풍경… 괴담보다는 정부 무능과 소수자에 대한 혐오표현이 실질적 해악 야기


3회 (제1069호, 2015.7.8) 

화끈한 혐오표현 처벌? 차별금지법부터 만들라! (링크) 

혐오표현을 의견 개진 아닌 선동 ‘행위’로 여겨 규제·처벌하고 있는 여러 나라들… 국회는 차별금지 관련 기본 입법도 포기했으면서 왜 ‘혐오표현 규제 입법’에 열 올릴까?


4회 (제1072호, 2015.7.29)

'문창극법'만 있으면 된다? (링크)

식민지배 및 민주화 역사 왜곡 발언을 처벌해야 한다는 의견들… 유럽에서 홀로코스트 부정하면 처벌하기도 하지만 법적조치가 최우선은 아냐


5회 (1075호 2015.08.19)

'혐오할 자유' 보장하는 미국? 멋모르는 소리! (링크)

수정헌법 1조에 따라 혐오표현에 개입하지 않지만, 폭력·차별로 이어질 경우 ‘일관성’ 있고 ‘명확하게’ 제한하며 차별 금지와 평등의 가치를 끊임없이 환기해


6회 (제1078호 2015.09.09)

어떤 혐오표현을 제한할 것인가 (링크)

확장성·폭력성·지속성 등의 특징 가진 혐오표현의 해악… 권력관계 아래 이뤄진 발언인 경우 국가의 개입 불가피해, 이와 함께 혐오표현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소수자’는 누구인가에 대한 논의도 필요해


7회 (제1082호 2015.10.14)

혐오표현 규제법은 부분적인 기여만 할 수 있어… 궁극적 문제 해결은 혐오표현을 용납하지 않는 자율적 시민사회의 움직임이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할 것


(끝)



* 허핑턴포스트에도 동시에 연재되었습니다.

http://www.huffingtonpost.kr/sungsoo-h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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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사건, 사법처리가 전부인가? 



홍성수 (숙명여자대학교 법학부 교수)



지금 이 글을 쓰는 시간에도 세월호 실종자 숫자는 29명에서 멈춰있다. 상대적으로 검경합동수사본부의 수사 속도는 빠르게 느껴진다. 수사 착수 한 달 만에 선장과 승무원은 물론이고, 선사와 계열사의 임직원, 유병언 전 세모회장 일가, 해양 관련 관료들, 한국선급, 인천운항관리실, 선적, 고박, 증축업체 등을 상대로 수사범위를 확대하고 있다. 며칠 전에는 선장과 주요 승무원에 대해서는 도주 선박죄 외에 살인죄를 적용하기로 했으며, 해경의 과실 여부에 대해 수사하고 있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하지만 조금 다른 시각에서 보면, 문제 해결의 향방을 ‘수사’와 ‘법적 처벌’에만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수사를 통해 법적 책임을 규명하는 것은 당연히 중요하다. 사회정의의 관점에서, 그리고 재발방지를 위해서도 책임자는 처벌되어야 한다. 하지만 사고의 원인을 밝혀내고 근본적인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는 당면과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수사에만 의존할 수 없다. 수사는 개인의 책임을 밝혀내는 것에 한정될 뿐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검찰의 무능이나 정치적 중립성과는 다른 문제다. 국회에서는 특검을 임명하자는 얘기도 나오고 있지만, 특검도 결국 형사처벌이 목적인 이상 동일한 한계를 갖는다.

 

실제로 세월호 사건의 경우 이미 사고의 직간접적인 원인이 된 수십 가지의 요인들이 하나하나 다 밝혀지고 있다. 이미 지적된 것들만 해도, 선장과 선원의 직접적인 행위 외에, 증축 등 선박 자체의 결함, 과적, 평형수, 고박 부실, 선원들의 고용조건, 운항관리자의 운항점검 부실, 실소유주의 비리, 해경의 과실, 해상교통관제센터와 상황실 운영 문제, ‘관(官)피아’의 문제 등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이것들 중에는 사법처리가 가능한 것도 있지만, 법의 영역이 아닌 윤리적 문제나 정책적인 문제들도 포함되어 있다. 수사기관의 소관사항이 아니지만 중요한 문제들이 있다는 얘기다.

  

언제부터인가 한국사회에서 큰 사건사고가 터지면 검찰이 최전선에 서서 문제 해결을 주도하는 경향이 있는데, 결코 바람직하다고 볼 수 없다. 검찰은 검찰대로 해야 할 일이 있고, 다른 국가기관이나 사회의 다양한 층위에서도 각자의 몫이 있다. 세월호 사건에서도 검찰 수사만 지켜보고 있을 게 아니라, 문제의 원인을 다각도로 분석하고 필요한 모든 대책을 논의하는 일이 필요하다. 이미 국회에서 논의되고 있는 국정조사나 국정감사 외에도, 정부나 정치로부터 독립된 ‘시민조사위원회’를 구성할 것을 제안하고 싶다. 이 위원회에서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이번 사고의 원인이 된 모든 것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밝혀내고, 그 원인을 제거하기 위한 대책들을 꼼꼼하게 제시해야 한다. 

 

물론 엄정한 수사와 관련 책임자에 대한 형사처벌도 중요하다. 다만 그 방향에 대해서는 좀 더 신중한 고민이 필요하다. 당장은 사고에 관련된 사람의 죄책을 밝혀내고 있는 것이 그것대로 중요하지만, '사후'처벌뿐만 아니라 사고 ‘이전'에 안전‘예방’을 소홀히 한 행위에 대한 철저한 규제가 중요하다. 이번에 드러난 것처럼 연안 여객선 관리가 이렇게 허술한데도, 사고는 자주 일어나지 않는다. 사고를 낸 자들이 처벌을 받는다고 해도, ‘나에게 닥칠 일’이라고 여겨지지 않을 수 있다는 얘기다. 예컨대, 세월호 선장과 선원들을 아무리 엄하게 처벌해도, “설마 내 배가 사고가 나겠어”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다수라면 처벌의 효과를 거두기 어렵다는 것이다. 규제가 효과를 거두려면, 사고 이전에 안전예방규범의 미준수 자체가 범죄라는 점을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다. 


또한, 개인뿐만 아니라 ‘조직’의 죄책을 묻는 것도 필요하다. 안전에 관련된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 역할을 제대로 한다면 사고가 일어날 가능성은 현저하게 줄어든다. 형사처벌이 조직 자체를 벌함으로써 조직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고, 결과적으로 ‘조직적’ 차원에서 사고예방을 위해 노력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안전문제에 관련된 문제를 직접 실행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직간접적으로 관리 감독의 책임이 있는 모든 사람들의 책임을 철저하게 묻고, 이들 모두가 집단적으로 안전문제에 민감하게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조직에게 책임을 묻기 위해서는 입법적 차원의 개선도 요구된다. 영국의 '기업과실치사 및 기업살인법'(Corporate Manslaughter and Corporate Homicide Act 2007)이나 미국의 '징벌적 손해배상제도'(punitive damage)처럼 조직(기업)적 차원에서 강한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있도록 법 제도를 손질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조직 자체가 경각심을 갖게 되고, 조직적인 대책을 마련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안전사고를 막을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제도화는 경제 합리적으로 행동하는 기업이 스스로 안전에 민감하도록 하는 동기를 제도적으로 부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시민들의 관심이다. 대형사고가 나도 책임자 몇 명을 처벌하는 것으로 넘어가고 그렇게 위험이 방치되면 또 다른 사고를 막기 어렵다. 몇몇 사람들이 사법처리 되는 장면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문제가 해결된 것 같은 착각이 들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것은 문제 해결의 일부일 뿐이다. 그동안 의례히 그래 왔던 것처럼 정형화된 사법처리에만 의존해서는 안 된다. 개인을 형사처벌하는 것으로 환원되지 않는 다양한 문제들을 집요할 정도로 끈질기게 묻고 따져야 한다. 이것은 수개월이면 종료되는 사법처리 절차와는 달리 십수 년이 걸릴지도 모르는 지난한 과정이 될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아주 오랫동안 세월호를 잊어서는 안 된다.



* 출처: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뉴스레터 102호, 2014년 5월

http://withgonggam.tistory.com/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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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사회와 인권, 민주주의



홍성수 (숙명여대 법학부 교수, 천주교인권위원) 



세월호 참사 등 계속되는 대형사고를 두고 ‘위험사회’라는 담론이 다시 관심을 끌고 있다. 그 대표적인 논자인 울리히 벡(Ulrich Beck)의 통찰을 요약하면 대략 이렇다. 근대시민혁명을 통해 성립된 근대국가의 제 1목표는 시민의 안전이었다. 한편으로는 발전된 과학기술을 통해 자연재해 등의 위험요소를 통제할 수 있게 되었고, 다른 한편 근대시민혁명을 경유하면서 국가는 시민 안전을 보호할 의무를 떠안게 된 것이다. 실제로 대부분의 국가들은 시민의 안전을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그것이 국가의 존재이유이고, 국가가 안전보장에 실패한다면 국가와 시민이 맺은 사회계약은 무효가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위험사회론이 빛나는 이유는 근대사회에서의 위험이 성공적으로 통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발전된 근대사회, 이른바 ‘2차 근대’의 시기에는 새로운 위험에 직면하게 된다는 점을 지적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것이 원전, 광우병, 신종 전염병, 유전자조작식품, 기후변화, 지구온난화, 금융불안, 국제테러 등이다. 이러한 위험에 대해 국가는 통제할 의사도 능력도 없고, 보험제도 등을 통한 통제 역시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 위험이 잠재되어 있고 직접적이진 않아서 시민들이 그 위험을 잘 인식하기 어렵고, 특정인에게 책임을 묻기도 어려우며, 국경을 넘나드는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통제가 쉽지 않기도 하다.


하지만 한국사회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고들은 이러한 2차 근대의 위험에 해당한다고 보기 어렵다. 건물과 다리가 무너진다거나, 가스가 폭발한다던가, 배가 침몰한다는 것은 현대과학기술로 얼마든지 통제할 수 있는 문제고, 근대국가가 충분히 예방할 수 있는 사고들이기 때문이다. 한국이 OECD 산재사망 1위, 자살률 세계 1위, 교통사고 사망률 세계 1위라는 불명예를 뒤집어 쓰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에 놓여 있다. 요컨대, 한국이라는 국가는 구시대적인 위험조차 통제하지 못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한국이라는 국가는 구시대적인 위험조차 통제하지 못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그렇다고 한국사회가 위험사회론에서 얘기하는 새로운 위험으로부터 자유로운 것도 아니다. 이미 한국사회의 경제발전, 과학기술발전의 수준은 2차 근대의 위험을 창출하는데 있어 부족함이 전혀 없는 수준이다. 실제로 광우병소고기가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기도 했고, 원전 수출이 가능한 6개 국가 중 하나이며, 세계 2위의 유전자조작식품 수입국가이면서, 세계금융위기, 기후변화, 지구온난화로부터도 결코 자유롭지 않다. 즉, 한국사회는 여전히 1차 근대의 위험을 통제하는 수준에 이르지 못했으면서도, 2차 근대의 위험에 동시에 직면했다는 점에서 ‘이중고’를 겪고 있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위험이 결합되어 시너지 효과를 내면서 그 위험의 정도가 더욱 증폭된다. 위험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면 시민사회는 구시대적 위험과 새로운 위험에 모두 무감각해지고, 시민적 통제의 가능성도 점점 낮아진다. 2차 근대의 위험 그 자체가 증대되기도 한다. 예컨대, 원전을 아무리 잘 관리해도 위험이 있을 수밖에 없는데, 원전의 도입·관리·감독과정이 비리와 부정부패로 얼룩져 있다면 그 위험은 더욱 증폭되기 마련이다.



여전히 1차 근대의 위험을 통제하지 못하고, 동시에 2차 근대의 위험에 직면해있는 한국사회


위험사회론 자체가 상당히 발전한 서구국가의 현실을 두고 발전시킨 논의이기에 한국의 현실에 적용하기에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논자들은 한국사회를 놓고 ‘악성 위험사회’(홍성태), ‘특별한 위험사회’(울리히 벡)라는 식으로 위험사회 앞에 수식어를 붙이기도 한다. 한국사회가 이렇게 고도의 위험사회가 된 이유는 무엇보다 압축근대화다. 다른 나라가 100년 넘는 기간에 걸쳐 달성한 근대화를 불과 20-30년 만에 완수하다 보니 곳곳에서 구멍이 생긴 것이다. 차분하게 성찰하고 대비할 기회를 충분히 갖지 못한 채 다음 단계로 넘어가게 된 것이다. 즉, 국가가 시민의 안전을 지키는 과업을 달성하는데 성공하고 난 후에도, 새로운 위험의 창출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 위험사회론의 핵심인데, 우리는 그 수준에 도달하지 못한 상황에서 새로운 위험에 직면하는 수준으로 급격하게 발전해 나갔다는 얘기다.



한국사회가 고도의 위험사회가 된 이유는 무엇보다 ‘압축근대화’ 


이렇게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는 중층적이고 복합적이지만, 해법은 비교적 명확하다. 한편으로는 압축근대화에서 후순위로 밀렸던 가치를 재복원하는 것이다. 즉, 경제성장의 논리에 희생되어왔던, 생명, 안전, 행복 등의 삶의 가치를 다시금 최우선적 가치로 내세워야 한다는 것이며, 실은 이것이 바로 ‘인권’이다. 통제가능한 사고에 의해 비극적인 죽음을 당하지 않고 소중한 생명을 보존하는 것이야말로 인권의 가장 기본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목표가 ‘사고예방’에만 한정된다면 사고조차 예방하기 어렵다는 점에 있다. 물론 사고위험을 막기 위한 기본적인 사회시스템을 짜는 일이 1차적으로 중요한 일이겠지만, 자기가 선택한대로 말하고 행동할 수 있고 (자유권), 인간다운 삶이 가능한 조건을 제공받고 (복지권), 치료가능한 질병에 고통받지 않고 (건강권), 노동자로서 존중받으며 일하다가 다치는 일이 없으며 (노동권), 소수자가 차별받지 않는 (평등권) 사회가 되어야, 인간존엄의 가치가 확고하게 자리잡을 수 있고, 이 때 인간의 안전‘도’ 자연스럽게 확보될 수 있다는 것이다.


 

통제가능한 사고에 의해 비극적인 죽음을 당하지 않고 소중한 생명을 보존하는 것이야말로 인권의 가장 기본 


다른 한 편으로는 이러한 인권의 이념들이 국가에 실질적으로 영향력을 가져야 한다. 다른 말로 하면 ‘민주주의’를 심화시키는 것이다. 어떠한 쟁점이건 정부는 자신의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해야 하고, 시민들은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하고 토론하고 그 과정에서 도출된 의견들이 국가를 실질적으로 제어할 수 있어야 한다. 실제로 울리히 벡 같은 이들도 위험사회를 극복해나가는 대안으로 일반 시민들의 ‘참여’를 통해 국가를 시민들의 통제 하에 놓는 ‘성찰적 근대화’를 제시한다. 사실 이러한 과제들은 우리 시민사회가 끊임없이 수행해 왔던 일들과 일맥상통한다. 제주에 해군기지를 건설하고 밀양에 송전탑 설치하겠다는 국가에 맞서, 노동자들의 권리를 탄압하는 기업에 맞서, 아래로부터 형성된 힘으로 삶의 가치를 지키겠다는 나선 운동들이야말로 민주주의의 과제에 정확히 부합하는 것들이다.



경제성장의 논리에 후순위로 밀렸던 생명, 안전, 행복 등의 가치- 즉 인권을 복원해야 한다


세월호 참사를 겪은 직후, 인권에 우선적 가치를 부여하던 사람들이 더욱 적극적인 행동에 나서고 있다.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안전문제는 그 자체로 인권과 민주주의의 문제이고, 세월호 참사에 분노하고 시민행동을 조직하는 것은 항상 해오던 실천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몇몇 사람들은 분노와 더불어 극심한 무력감, 자괴감이 겹치면서 극도의 심적 고통을 겪고 있기도 하다. 아마 그동안 그렇게 분투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 사회의 가치 정향을 바꿔놓지 못했고, 그것이 세월호 참사로 이어진 한 원인이 되었다는 점에 대해 무한한 책임을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한 책임감을 느끼고, 그 생각을 행동에 옮기는 사람들의 숫자가 늘어나는 정도에 비례해서 우리 사회는 좀 더 ‘안전’해질 수 있을 것이다. 





* 출처: 교회와 인권 (천주교인권위원회 월간 소식지), 216호, 2014년 5월 

http://www.cathrights.or.kr/news/articleView.html?idxno=5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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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아침을 열며]



"세월호를 잊지 않고 있습니다"



십수 년 전 서울의 영국문화원에서의 일이다. 영국인 강사는 첫 수업시간의 20분을 '안전교육'에 할애했다. 자신은 이 교실의 안전책임자이며, 유사시 수강생 전원이 건물을 빠져나갔음을 확인할 때까지 한 발짝도 나갈 수 없다고 했다. 수강생들과 함께 비상구를 통해 탈출해 보는 모의훈련까지 했다. 참고로, '영어' 수업이었다. 영국의 대학기숙사에 머물 때 일이다. 화재경보기가 워낙 예민하게 설정되어 있어서 빵만 태워도 경보가 울리곤 했는데, 소방관이 출동해서 이상 없음을 확인해줄 때까지 기숙사생 전원은 무조건 기숙사 밖에 나가 대기해야 했다. 그때마다 기숙사 층마다 배치된 부사감(층장)들의 활약이 인상적이었다. 그들은 방마다 사정없이 문을 두드려 기숙사생들을 깨웠고, 자기 층의 학생들이 완전히 탈출했음을 확인하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도 탈출할 수 있다고 했다.


직접 안전책임자가 되어 볼 기회도 있었다. 대학의 시험감독관으로 일할 때다. 시험감독 지침서 중 안전에 관한 지침은 무척이나 상세했다. 지침에 따르면, 나는 시험장의 안전책임자였고 경보가 울리면 정해진 경로에 따라 지정된 장소로 수험생들을 이동시키는 것이 나의 임무였다. 연구원이나 학생이 안전요원이 근무하지 않는 시간에 연구실 출입을 하려면 특별허가가 필요했다. 허가 조건은 딱 한 가지, 매달 2시간씩 안전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교육내용 핵심은 안전요원의 도움 없이 스스로 건물을 탈출하는 방법에 관한 것이었다. 


영국인 친구에게 슬쩍 말을 건네 봤다. "안전도 좋지만, 솔직히 너무 지나친 것 아니요?" 돌아온 답변이 놀라웠다. "우리는 1666년 런던 대화재를 기억하고 있소." 자존심 센 영국인들의 허풍을 익히 알고 있기에 가볍게 웃어넘겼지만, 나중에 런던 대화재에 관한 몇 가지 사실을 알고 나선 충격을 받았다. 오늘날 런던에 석조건물이 즐비하게 된 것도, 건물 복도 사이에 이상하리만치 많은 문(방화문)이 설치된 것도, 사상 최초로 소방대가 창설되는 등 화재예방ㆍ진압에 관련한 각종 기술과 제도가 비약적으로 발전한 것도, 지금과 같이 유사시 상세한 매뉴얼이 작성되고 안전책임자를 훈련시키게 된 계기가 된 것도, 바로 런던 대화재였다는 것이다.


우리에게도 비극적인 참사가 없었던 것이 아니다. 아니 오히려 너무 많았다. 씨월드화재, 서해훼리호사건, 삼풍백화점 붕괴, 세모유람선사고, 대구지하철화재, 대구가스폭발, 그리고 몇 달 전 경주 마우나리조트 붕괴까지…. 하지만 이러한 참사들이 안전에 대한 인식을 바꿔놓는 계기가 된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번 사고에서 가장 큰 충격은 선장과 선원들이 태연히 구조선에 탑승하는 장면이었다. 왜 살아 돌아왔느냐고 억지를 부리는 게 아니다. 선실에 승객이 남아있다는 사실을 뻔히 아는 선장과 선원들이, 갑판 위에서 구명복을 입고 승객들의 탈출을 돕다가 마지막에 바다에 뛰어들어도 얼마든지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아는 뱃사람들이, 어떻게 수많은 승객을 두고 구명보트에 오를 수 있느냐는 말이다.


일반인 수준의 책임의식조차 없어 보이는 세월호의 안전책임자들은 엄벌에 처해져야 마땅하다. 하지만 처벌이 전부일 수는 없다. 위험이 예상되는 사회의 모든 곳에서 안전책임자들이 책임 있게 행동하려면 반복되는 훈련을 통해 어떤 상황에서도 제 역할을 할 수 있게 하는 안전에 관한 규범과 문화가 위험이 있는 모든 곳에 확고하게 자리 잡아야 한다. 이것이 구조화되려면 시간과 비용에 관한 사회적 투자가 반드시 필요하다. 효율성을 생명처럼 여기는 선진기업들이나 잘 사는 나라들이 안전에 대해 아낌없이 투자하는 이유를 굳이 더 설명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우리에게도 어떤 변화의 계기가 마련된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십수 년이 지나 누군가 "한국은 안전에 대해 왜 이렇게 유난스럽나요?"라고 물었을 때, 이렇게 대답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2014년 세월호를 잊지 않고 있습니다."



홍성수 (숙명여자대학교 법학부 부교수)



출처: 한국일보 4월 29일자

http://news.hankooki.com/lpage/opinion/201404/h2014042921022324370.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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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영국 유학 시절 때 생각나던 이야기들을 묶어서 글을 써봤습니다. 한국의 안전불감증과 법의 역할에 대해서 수업을 할 때도 항상 들려주는 에피소드인데, 원래 정리해두었던 얘기는 아래와 같습니다.


장면1: 영국을 처음 만난 것은 영어 공부를 하기 위해 영국문화원을 다니면서 부터였습니다. 수업 첫날 맘씨 좋아 보이는 영국인 선생님이 수업을 시작하기도 전에, '안전' 교육을 하겠다면서, 유사시 대피 통로와 안전수칙을 알려주더군요. 교사인 자기는 사고가 나면, 이 클래스의 안전책임자가 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한마디가 지금도 또렷이 기억에 남습니다. "이 클래스 수강생 전원이 빌딩을 빠져나갔다는 것을 확인하기 전까지 저는 빌딩을 한 발짝도 빠져나갈 수 없습니다. 유사 시에는 저의 지시에 따라서 재빨리 빌딩 밖을 빠져나가셔야 합니다!"

장면2: 유학생활 초기 2년 동안에는 기숙사에 살았습니다. 기숙사에서 가장 큰 고충은 화재였습니다. 일단 매주 월요일 오전 10시에는 항상 화재경보기가 5초간 울립니다. 경보기가 잘 작동하는 확인하는거라는 설명이 붙어 있는데, 아침잠이 많은 저는 엄청 짜증났습니다. 그래도 2년 내내 매주 월요일 그 시간에는 화재경보기가 울립니다. 

장면3: 기숙사 곳곳에 있는 화재경보기가 무척 예민하게 설정이 되어 있어서, 조금만 연기가 나면 경보기가 울립니다. 경보기가 울리면 '무조건', '지체없이' 기숙사 밖으로 나가서 정해진 장소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층마다 대학원생이 '부사감'(subwarden)으로 임명되어 있는데, 이 사람이 방마다 찾아다니면서 다 깨워서 나갑니다. 규정상 자기 층의 기숙사생이 다 빠져나갔는지 확인되기 전까지 본인은 건물 밖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경보기가 엄청 시끄러운데 이불 뒤집어 쓰고 안나가려고 버티는 넘들이 꼭 있습니다. 문을 부셔서라도 다 깨워서 데리고 나가는 게 이들의 임무입니다. 경보기가 하도 민감해서 한 달에 1-2번은 꼭 한 밤 중에 화재경보기가 울리고 기숙사생들을 졸린 눈을 비비고, 건물 밖으로 나섭니다. "누가 또 빵 태운거야?" 짜증도 나지만 무조건 나가야 합니다. 추운 날씨에 벌벌 떨면서도, 소방관이 직접 와서 화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해주고 나서야, 건물에 다시 진입할 수 있습니다. 꼭두 새벽에 파자마 차림의 기숙사생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못다한 얘기(?)를 나누는 장면은 또 하나의 볼거리였습니다. 제가 2년 동안 거의 매달 이렇게 건물 밖으로 탈출해야 했지만 실제로 불이 났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죄다 토스트기의 빵이 탔거나, 쥐포를 구워먹다가 생긴 일이었죠.

장면4: 기숙사에서 사감에게 크게 혼난 기억이 있는데.... 바로 방문을 열어 두기 위해 복도에 있는 소화기를 방문 사이에 놓아 두었을 때였습니다. 소화기는 항상 지정된 자리에 있어야 한다면 얼마나 혼을 내던지.... 다른 일에는 그렇게 너그러운 사람들이 참 모질게 굴더군요. 

장면5: 시험감독관(invigilator)으로 일한 적이 있습니다. 시험감독 관리 지침서가 10여 쪽 정도로 되더군요.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유사시 시험장 관리였습니다. 기억 나는 것은 대략 이렇습니다. 1) 화재경보기가 울리면 일단 시험지를 덮고, 중요한 소지품만 들고 빠져 나간다 2) 시험감독관은 전원이 빠져나갔는지 확인한다. 3) 수험생과 시험감독관은 지정된 장소인 **에 집결한다, 4) 집결 장소에서는 수험생 간 대화를 금지한다, 5) 소방관등 안전책임자가 별 문제가 없다고 확인해 주면 다시 시험 장소로 이동해서 남은 시험을 치룬다. 4번에서 왜 수험생간 대화를 금지하는게 특이하죠? 왜냐하면 일단 탈출은 했지만 별거 아닐 가능성이 매우 높거든요. 약간의 위험만 있어도 일단 탈출하게 되어 있는거니까요. 그런데 치루던 시험을 속행하려면 시험에 대해서 수험생들이 대화를 나누면 안되는 것이죠. 일종의 커닝(치팅)이 되는 것이니까요. 진짜 불이 난거면 시험은 무효가 되는 것이고요.

장면6: 옥스퍼드에 있을 때는 제 연구실이 있는 건물이 밤 10시 이후, 토요일 6시 이후, 그리고 일요일에는 아예 문을 닫는데, 허가받은 연구원/대학원생에 한해서는 카드를 받아서 24시간 출입할 수 있게 했습니다.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매달 2시간 씩 건물안전교육을 반드시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 다음 달에도 24시간 이용이 가능합니다. 토요일 6시 이후와 일요일에는 안전요원이 건물에 상주하지 않는 상태가 되기 때문에 유사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교육받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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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4월 9일] '황제 노역'과 자유의 가치



벌금 249억원을 몸으로 때우겠다고 나선 사람이 나타났다. 이른바 '황제 노역'이다. 국민들의 분노가 하늘을 찔렀다. 법원장이 책임을 지고 물러났고, 법원 국회 검찰 등 관계기관에서 대책 마련에 나섰다. 당사자가 직접 나서 대국민사과와 함께 벌금을 납부하겠다고 약속했으니 일단 이렇게 일단락되는 모양이다. 하지만 이 사건은 우리 사회에서 '자유'가 어떤 대접을 받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그래서 한국사회의 여러 문제들의 단면을 드러내는 징후적 사건이라는 점에서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현대국가에서 정당성을 인정받는 형벌은 자유형(징역 등), 재산형(벌금 등), 자격형(자격정지 등) 뿐이다. 세계적인 추세는 사형을 형벌에서 배제하고 있으니, 현실적으로 가장 중한 형벌은 자유형이다. 이것은 '자유'가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가치라는 것을 상징한다. 아무리 중한 죄를 저질러도 자유를 빼앗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여기는 것이니 말이다. 몇몇 나라에 '호화 교도소'라 불릴 만큼 괜찮은 시설의 교도소가 있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교도소 시설이 아무리 좋아도, '자유'를 빼앗긴 삶은 충분히 고통스러운 것이기에 굳이 열악한 수감생활로 추가적인 고통을 줄 이유가 없는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범죄자에 대한 자유의 제한조차 가능하면 최소화하는 것이 세계적인 추세다. 교도소 내 자유를 늘리거나(개방처우), 아예 출퇴근을 시키거나(반자유처우), 심지어 교도소에서 구금을 하지 않는(사회내처우) 쪽으로 방향을 잡고 있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우리 사회에 매우 이례적인 현상이 하나 있다. 벌금형을 선고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벌금 납부 대신 스스로 감금되는 것을 선택하는 사람이 매년 4만 명이 넘는다는 것이다. 이른바, '환형유치'다. 여기에는 정반대의 두 가지 사연이 있다. 첫 번째 사연은 돈이 없어서다. 환형유치를 선택한 사람들의 대부분이 여기에 속한다. 이들은 대부분 직장을 잃었거나 저임금노동을 하는 사람일 것으로 추정된다. 충분한 벌이가 있는 사람이 생업을 팽개치고 스스로 유치장행을 택할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사연은 거꾸로 돈이 너무 많아서다. 국가는 돈을 많이 버는 사람에게 일당을 넉넉하게 계산해주고, 그 덕에 수백억대 벌금을 유치장에서 때우는 사람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런 선택을 한 사람들은 아마 자유를 빼앗기는 충격이 그리 크지 않은 생활을 영위하고 있을 것이다. 환형유치는 하루라도 일을 쉬면 손님이 끊기고 업무에 차질을 빚는 사람들이 택할 수 있는 선택지가 아니다. 반면 불로소득으로 손쉽게 돈을 벌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까짓 '자유'를 희생하고 잠시 생업을 멈추는 것쯤이야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 어처구니없는 세태를 바꾸기 위한 가장 직접적인 방법은 벌금제도의 개혁이다. 벌금형을 받은 사람이 돈이 없어서 구금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핵심이다. 벌금 납입기한 연장, 분할납부, 신용카드 납부, 대체형으로 사회봉사 도입 등 이미 시민사회에서 충분히 논의된 건설적인 대안들이 많이 있다. 이참에 경제력에 따라 벌금을 차등 산정하는 일수벌금제를 도입한다면 보다 근본적인 해법이 될 수 있다. 경제력의 차이에 따라 형벌의 고통이 달라지는 제도 자체를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자유는 근대인들이 목숨을 걸고 쟁취해낸 인류의 최고 가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자유가 어떤 상태에 놓여있는지에 따라 그 사회의 현상태를 가늠해볼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보다 많은 자유를 누리고 있고 자유의 가치가 높이 평가되고 있다면 그만큼 괜찮은 상태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아무리 일당을 많이 쳐줘도 '황제 노역'일 수 없고, 교도소시설이 아무리 좋아도 '호화 교도소'일 수 없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얘기다. 그런데 한 쪽에서는 벌금 낼 돈이 없어서, 다른 한 쪽에서는 돈이 많아서 그 소중한 자유를 스스로 포기하고 있는 것이 우리 현실이다. 불행히도 현재 우리 사회에서 '자유'는 이런 수준의 대접을 받고 있는 것이다.



홍성수 (숙명여자대학교 법학부 부교수)



출처: 한국일보, 2014년 4월 9일자

http://news.hankooki.com/lpage/opinion/201404/h2014040821020924370.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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