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언론기고_mass media

[기고]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 차별금지법 제정

by transproms 2013. 4. 2.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 차별금지법 제정



홍성수 (숙명여자대학교 법학부 교수)



인권과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성숙한 사회에서도 쉽게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바로 ‘차별’이다. 차별은 국가뿐만 아니라 기업 등 사인에 의해서도 가능하며, 국가에 의한 고전적인 인권침해보다 문제 양상이 훨씬 복잡하다. 일례로, ‘고문’은 어떠한 경우에도 금지되지만, ‘차별’은 그 자체로 상대적인 개념이다. 선거에 나온 후보들에게 득표율에 따라 당선과 낙선이라는 차별적 대우를 하는 것은 괜찮지만, 피부색을 이유로 입사나 입학을 불허하는 것은 불합리한 차별에 해당한다.


문제는 어떤 기준으로 불합리한 차별을 규정하고 금지시킬 것인가 하는 점인데, 그 기준은 시대적, 역사적 조건에 따라 가변적이다. 예컨대 특정 인종이나 고령자에 대한 대출을 제한하면서 인종·연령과 부도 확률이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에 괜찮다고 생각하거나, 출신 대학과 업무 수행 능력 사이의 상관관계가 있다면 출신 대학에 따라 가산점을 부여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경우가 있다. 한국 사회도 한때 이러한 차별을 당연시하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차별이 심각한 사회문제라는 것에 대한 사회적 합의 수준은 지속적으로 향상되어 왔다. 2000년대 들어 국가인권위원회법에 차별 사유를 명시하고 인권위에 차별 시정을 맡겼고, 장애, 연령, 성별 등에 관한 차별 금지 관련법이 제정되는 성과가 있었다. 지난해에는 금융권에 ‘불합리한 차별행위 금지 모범규준’이 시행되었고, 이력서에 가족 사항, 혼인 여부, 학력 등의 항목을 삭제하는 기업도 점차 늘고 있다. 국민 의식 수준도 지속적으로 향상되고 있다. 10년 전만 해도 인권위 진정 건수에서 차별이 차지하는 비중은 10% 정도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어느덧 30%에 육박한다. 인권 의식이 향상되면서 그동안 숨겨져 있던 차별 문제가 점차 수면 위로 부상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추세에 걸맞은 법제를 갖추고 있지 못하다. 포괄적인 차별 금지 기본법이 없기 때문이다. 차별 사유·영역을 포괄적으로 규정하고, 간접 차별, 괴롭힘 등의 새로운 차별 유형을 추가함과 동시에, 시정 권고, 소송 지원, 손해배상 책임 강화 등의 구제 수단을 법제화하는 차별금지법이 없이는 차별 문제에 효과적이고 책임있게 대처할 수 없다. 이러한 차별 구제 방법은 이미 세계 각국에서 가장 효과적이고 효율적인 것으로 입증된 것이기도 하다.


다행히,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140대 국정과제에는 ‘차별금지법 제정 추진’이 포함되어 있고, 얼마 전 유엔의 ‘제2차 국가별 정례인권검토(UPR)’에서 한국 정부는 차별금지법을 제정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상황은 그리 녹록지 않다. 17, 18대 국회에서도 차별금지법안이 발의되었으나, 반대 여론에 밀려 좌절된 바 있다. 이번에도 일찌감치 차별금지법 저지 운동이 본격화되었고, 이에 화답하여 여야 몇몇 의원들이 원안 통과 불가를 약속한 것으로 알려졌다. 입법안 통과가 가시화되면 차별사유의 항목을 놓고 시비를 걸거나 기업에 부담이 된다는 이유로 반대하는 목소리가 더욱 높아질 것이다.


하지만 차별금지법의 제정에 관한 한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동안 시민사회, 정부, 의회에서 충분한 논의가 있었고, 이제 결단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박근혜 정부가 내세운 국민대통합을 위해서라도 소수자가 배제되고 차별당하는 현실은 더 이상 묵과될 수 없다. 새 정부의 ‘시대적 소명’이 한국이 모든 부문에서 세계의 모범이 될 수 있는 “국제 모범 국가”가 되는 것이라고 한다. 차별금지법의 제정은 새 정부를 평가하는 기준이 될 뿐만 아니라, 한국이라는 국가의 수준이 ‘모범’이라고 불릴 만한지를 가늠하는 중요한 시금석이 될 것이다.



*출처: 한겨레신문 2013년 4월 1일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