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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기고_mass media

[기고] ‘윤창중 사건’을 보라, 언론은 자성했는가

by transproms 2013. 10. 5.

‘윤창중 사건’을 보라, 언론은 자성했는가

2008년 이후 성범죄 건수는 그대로인데 관련 보도는 급증했다. 

선정적 보도 행태도 심해져 피해자의 세부 정보까지 파헤친다.



홍성수 (숙명여대 교수·법학부)  


우리 사회에서 성폭력이 사회문제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불과 30년 전이다. 그동안 성폭력 문제를 의제화하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많은 노력이 있었고 적지 않은 성과도 있었지만, 그중 성폭력 2차 피해의 문제를 쟁점화한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었다. ‘성폭력 2차 피해(second victimization)’란 성폭력 사건이 발생한 뒤 수사기관, 법원, 소속기관, 의료기관, 가족·친지, 친구, 직장 동료, 언론 등에 의해 사회적 불이익을 당하거나 정신적 외상을 입는 것을 말한다. 성폭력에 대한 잘못된 통념, 예컨대 ‘피해자가 성폭력을 유발한 것’이라며 피해자를 질책한다거나 그런 내용의 소문을 퍼뜨림으로써 피해자가 정신적 외상을 겪게 되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이렇게 성폭력 피해자들이 이중삼중의 고통을 겪는 일이 반복되면 피해자들이 성폭력 신고를 꺼리게 된다는 점도 성폭력 2차 피해 문제에 각별한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다.


윤창중 전 대변인의 성추행 관련 보도들. 세부적인 범죄 사실이 선정적으로 나열되었다. 그동안 수차례 성폭력특별법 개정을 통해 형사 절차에서의 피해자 보호가 강화되어 왔고, 2차 피해를 유발한 국가의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하는 판결이 속속 등장했다. 반면, 언론에 의한 2차 피해는 개선될 기미가 잘 보이지 않는다. 실제로 2008년 이후 성범죄 발생 건수 자체에 큰 변동이 없는데도 성범죄 관련 보도가 급증했으며 선정적인 보도 행태는 더욱 기승을 부린다. 권인숙·이화연의 연구(<성폭력 두려움과 사회통제>)에 따르면, 2008년에는 아동 성폭력 사건 보도가 이전 연도보다 두 배 이상 증가했고, 2010년에는 다섯 배 이상 증가했다고 한다. 한국여성민우회 조사에 따르면 2012년 8월 기준으로 1주일 평균 성범죄 보도 건수가 신문은 30건, 방송은 20건이었는데, 절반 이상이 한국여성민우회의 ‘성폭력 보도 가이드라인’을 위반한 것이었다. 그즈음부터 성폭력 사건을 상세 지도와 화려한 그래픽을 동원해 생중계하듯이 보도하는 식의 선정적이고 흥미 위주의 성범죄 보도가 일반화되었고, 심지어 피해자의 개인 신상과 세부 정보까지 집요하게 파헤치는 경우도 발생했다. 피해자의 집 앞에 진을 치고 있다가, “얼마나 슬프신가요?”를 묻는 언론에게 피해자와 그 가족들은 그저 기삿거리를 만들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한국이었다면 무차별 ‘신상털기’ 했을 것


물론 언론은 성범죄를 포함한 모든 범죄를 보도할 의무가 있다. 수사나 재판 진행 상황을 국민들에게 알려야 하고, 그 과정에 문제가 없는지 감시하고 견제해야 하며, 때로는 독자적으로 사건의 진실을 파고들어야 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피해자나 그 가족들에게 2차 피해를 야기하지 않는 한에서만 정당화될 수 있다. 이러한 원칙은 모든 범죄 보도에 공히 적용되는 것이겠지만, 성범죄와 같이 피해자가 극도로 취약한 지위에 놓이는 범죄에 대해서는 특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여성인권단체들은 언론에 의한 2차 피해의 문제를 공론화하고 관련 기준을 제시한 바 있다.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는 성폭력 생존자의 ‘보도 과정에서의 권리’를 제정했고, 한국여성민우회에서는 ‘성폭력 기사 보도 가이드라인’으로 2차 피해를 막기 위한 최소한의 기준을 내놓았다. 언론계의 화답도 있었다. 2011년에는 국가인권위원회와 한국기자협회가 ‘인권 보도준칙’을 내놓았고, 지난해 12월에는 인권 보도준칙 중 ‘범죄 보도’ 부분을 더욱 발전시킨 ‘성폭력 범죄 보도 세부 권고 기준’을 제정하는 성과로 이어졌다. 여기에는 ‘언론은 취재와 보도 과정에서 성범죄 피해자와 그 가족의 2차 피해를 유발하지 않도록 피해자의 신상을 식별할 수 있는 정보를 공개하지 않는다’ ‘언론은 성범죄 사건의 본질과 무관한 피해자의 사생활 등을 보도함으로써 피해자에게 범죄 유발의 책임이 있는 것처럼 인식되도록 하지 않는다’ 등 실천요강 10항목이 포함된다. 개별 언론사 중에서는 <경향신문>이 지난해 10월 ‘성범죄 보도준칙’을 제정한 바 있다. ‘가해 수법과 피해 사실 등에 대한 지나친 묘사와 자극적인 제목 등 선정적인 접근을 하지 않는다’를 포함한 11개 항목이다. 이러한 성과는 최근의 무분별한 성범죄 보도에 대한 반성으로 해석해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최근 윤창중 사건에서 보여준 언론의 태도는 이러한 노력을 무색하게 하는 것이었다. 미국 경찰이 피해자를 철저하게 보호했기에 한국 언론의 취재가 쉽지 않았지만, 청와대는 그동안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호텔방에서의 일을 민정수석실 조사 결과라며 언론에 흘렸다. 자필 서명한 진술서도 있다는 친절한 설명까지 뒤따랐고, 언론은 기다렸다는 듯이 대서특필했다. 성범죄 보도에서 으레 그러하듯, 사건 당시 무슨 옷차림이었는지, 어떤 신체 부위에 손을 댔는지 등 세부적인 범죄 사실에 관한, 불확실하고 굳이 알 필요도 없는 정보들이 선정적으로 보도되었다. 사건은 시간 순서대로 재구성되어 생중계하듯 보도되었고, 국민들은 이 흥미진진한 사건에 ‘구경꾼’ 노릇을 자처했다. 성범죄가 발생할 때마다 반복되던 익숙한 풍경이 이번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아마 피해 여성이 한국인이었고 한국에 있었다면 더욱 무차별적인 ‘사건의 재구성’과 ‘신상털기’가 자행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특종 경쟁 속에서, 피해자의 2차 피해를 진지하게 고려하는 언론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무엇이 언론의 정도였는지 확인하기 위해 굳이 ‘성범죄 보도 기준’을 뒤적거릴 필요도 없다. 진상 규명을 빌미로 불명확한 사실관계들이 연일 선정적으로 보도되는 것을 지켜보는 피해자의 심정은 어떠할까? 잠시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피해자의 2차 피해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다. 이런 보도 풍토에서 성폭력은 우리의 문제가 아닌 딴 세상의 괴물들이 벌이는 기행으로 인식될 뿐이며, 성폭력의 근절을 위한 진지한 노력으로 이어지기도 어렵다. 


성폭력 2차 피해를 막기 위한 여성 인권단체들의 끈질긴 문제 제기와 언론계의 화답이 일궈낸 성과는 이 엄청난 기삿거리를 앞에 두고 이렇게 속절없이 무너져버렸다. 한국기자협회와 국가인권위원회가 ‘성폭력 범죄 보도 세부 권고 기준’을 제정한 게 지난해 12월11일이었으니, 정확히 5개월 만에 벌어진 일이다. 



*출처: 시사IN, 299호, 2013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