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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책소개_book reviews

서평: 조국, 『형사법의 성편향』

by transproms 2008. 7. 23.

  인권실천시민연대 웹진 [사람소리] 24호, 2004.8.12.
http://www.hrights.or.kr/note/read.cgi?board=hongsungsu&y_number=0&nnew=2


법치국가적 인권보장과 여성주의의 도전
서평 : 조국, 형사법의 성편향 (박영사, 2판, 2004)

 홍 성 수


법치국가적 인권보장 vs 여성주의

 근대적 인권은 국가권력에 맞서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옹호하고자 하는 투쟁의 과정에서 발전해 왔다. ‘인권’하면 피의자나 수형자의 인권이 떠오르고, 인권을 ‘국가의 지배’에 맞선 ‘인간의 권리의 수호’라는 차원에서 이해하는 것은 그러한 이유에서이다. 죄형법정주의, 법익보호원칙, 비례성원칙, 형사절차의 정형화 등이 ‘민주적 법치국가’의 핵심이념으로 자리 잡은 것 역시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그러한 이념을 바탕으로 성립된 근대 (형사)법체계는 ― 인권보장이라는 나름대로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 남성 편향적이고 여성 차별적이라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실제로 강간, 성희롱, 아내 구타, 형사절차에서 성폭력범죄피해여성의 보호 등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 여성이 불리한 지위에 놓이게 된다는 것은 이미 오랫동안 지적된 바 있다. 그래서 여성주의운동진영에서는 강간죄객체규정의 확대, 강간죄 성립요건의 재구성, 형사절차에서 성폭력범죄피해자 보호 강화, 매 맞는 여성에 대한 보호 강화, 성희롱의 범죄와, 비동의간음의 범죄와, 반여성적인 포르노그래피 규제 등을 주장해 왔고, 그 중 일부는 법체계 내에서 수용되기도 했다.

 그런데 문제는 법치국가에서 이러한 여성주의의 주장이 전적으로 수용될 수만은 없다는 데에 있다. 왜냐하면, 여성 주의적 관점‘만’을 전적으로 수용하다보면, 인권보장을 위한 법치국가 원리가 불가피하게 침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강간죄의 성립요건을 완화하는 것은 증거재판주의의 원칙을 무력화시키는 것으로 나아갈 수 있고, 형사절차에서 성폭력범죄 피해여성에 대한 보호는 법정에서 피고인의 방어권의 축소로 이어질 수 있다.

 우리가 법치국가의 인권보장체계를 무의미한 것으로 치부하지 않는 이상, 여성 주의적 관점의 도입이 법치국가원칙을 침해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난감한 문제일 수밖에 없다. 여성인권의 진정한 실현을 위해, 근대시민혁명의 성과인 법치국가적 인권보장체계를 무력화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법치국가원칙을 수호한다는 명목 하에서 여성의 경험과 느낌을 무시해서도 안 될 것이며, 반대로 여성 주의적 관점만을 강조하여 법치국가원칙의 침해가능성에 눈감아서도 안 될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까지의 논의는 한쪽의 입장만을 일방적으로 주장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한편에서는 여성의 경험과 느낌을 무시하고, 그것을 ‘중립성’이나 ‘객관성’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해왔다. 이 입장은 ‘중립’이 여성에게는 ‘차별’과 ‘억압’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철저히 눈감아 왔다. 그리고 또 다른 한편에서는 여성 주의적 관점의 도입이 법치국가적 인권보장체계를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점을 세심하게 고려하지 못했다. 이 입장은 성폭력특별법을 제정하면서 사형제도가 선고될 수 있는 범위를 확대하는 오류를 범하는가 하면, 형사절차에서 성폭력범죄피해자 보호가 피고인의 소송상 권리를 침해할 가능성을 충분히 염두에 두지 못했다.

여성주의와 법치국가적 인권보장 : 절충? 타협?

 <형사법의 성편향>은 바로 이렇게 중요하고도 어려운 문제에 대해 나름대로의 해법을 제시하는 책이라는 점에 그 의미가 있다. 이 책은 형사법의 남성편향을 치밀하게 비판하면서도, 여성 주의적 관점의 도입이 법치국가원칙을 침해할 위험에 눈감지 않는다. 그래서 저자는 한편으로 강간죄문제(제1장, 제2장), 형사절차에서 성폭력범죄 피해여성의 보호의 문제(제2장), 매 맞는 아내의 문제(제3장, 제4장)에서, 남성 편향적 형사법체계의 전면적인 개혁을 주장함으로써, 진정한 여성인권의 회복을 꾀한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비동의간음의 범죄화, 간통죄 존속, 성매매에 관한 단선적 범죄화, 포르노그래피에 대한 과도한 규제 등에 대해서는 오히려 반대의 입장을 개진한다.(제5장) 저자는 한편으로 여성주의의 입장을 형사법체계에 내에 상당 부분 수용하려고 하지만, “모든 반여성적 행위를 일률적으로 범죄 화하려는 여성주의의 요구”(290쪽)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요컨대, 저자는 여성주의의 문제제기가 법치국가의 인권보장체계에서 어떻게 조화롭게 수용될 수 있는지를 진지하게 검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입장에 대해, ‘어설픈 절충’ 내지 ‘정치적 타협’에 불과하다는 비판이 제기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이러한 입장이 여성주의진영과 법조계 모두에게 불만족스러운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법치국가 형사법의 원칙과 여성주의의 문제제기 중 어느 하나를 배제하지 않는 한, ‘좋은 의미의 절충과 조절’은 불가피하다고 하겠다. 또한 여성주의의 관점은 ‘국가형벌권’을 통해서‘만’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문제해결을 위한 법적 수단으로는 ― 형벌 외에도 ― 민사제재, 행정제제, 제3의 대안(중재, 조정 등)이 있으며, 법 이전에 교육적·사회문화적 해결방안도 있다. 무엇보다도 민주적 법치국가에서 국가형벌권의 행사는 이러한 해결방안 중에서도 ‘최후의 수단’일 뿐이다. 그래서 이러한 관점에서 법치국가원칙과 여성주의의 입장을 조절하고 절충하다 보면, 여성 주의적 관점의 도입이 곤란하다는 결론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결론은 여성 주의적 관점 자체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해당 사안의 ‘형사법에 의한 해결’에 비판적인 입장을 개진하는 것이다. 그리고 오히려 형사법 이외의 다른 해결방안의 모색을 제안하는 것으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논증이 ‘정치적 타협’이나 ‘어설픈 절충’과 명백히 구분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의의와 전망

 마지막으로, 이 책의 미덕은 무엇보다도 ‘읽기 쉽다’는 점에 있다. 전문연구서임에도 불구하고 정돈된 논리를 유려한 문체로 전개하고 있기 때문에, 법학자는 물론이고 비법학전공자나 일반시민들도 쉽게 읽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문연구서로서의 품격을 전혀 잃지 않고 있으니, 이런 류의 연구서로서는 가히 모범적이라고 할 만 하다. 또한 이 책은 국내외의 연구 성과를 성실하게 인용하고 검토하고 있는데, 이 점은 이 책의 학문적인 가치를 더해 줌은 물론이고, 관련 분야를 좀 더 공부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좋은 길잡이를 제공해 주기도 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책은 여성주의의 도전과 관련한 ‘형사법’의 문제를 다루고 있을 뿐, 형사법 이외의 다양한 법적·제도적 대안을 전반적으로 다루고 있지는 못하다. 물론 이 점은 <‘형사법’의 성편향>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이 책의 불가피한 한계라고 할 수 있지만, 어쨌든 아쉬운 일임은 분명하다. 앞으로 법체계 전반의 성편향과 (형사법 이외의) 여러 법적·제도적 대안에 대한 후속연구가 뒤따라야 할 것이며, 이 책은 그러한 후속연구를 위한 훌륭한 발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