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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기고_mass media

[기사] 국가인권위 ‘몰락’ 세계가 ‘주목 (위클리경향)

by transproms 2012. 1. 28.

[커버스토리]국가인권위 ‘몰락’ 세계가 ‘주목’
2010 10/05위클리경향 894호
ㆍ10위권 경제대국 한국에서의 ‘인권 위상 추락’ 국제적 비판 받아

1948년 ‘세계인권선언’을 통해 인류는 ‘인권’을 우리가 추구해야 할 보편적 가치라고 확인했다. 그 후속조치로 다양한 국제인권규범이 제정되었고, 이를 이행하기 위한 국제인권기구들이 설립되었다. 국제인권공동체나 국제인권레짐과 같은 신조어들이 등장했고, 국제사회에서 목소리를 내려면 ‘인권’을 존중한다는 시늉이라도 해야 하는 시대가 도래하게 되었다. 하지만 인권의 이념이 각 국가 내에서 순조롭게 실현된 것은 아니었다. 겉으로는 국제인권규범을 존중한다고 선언하고 인권조약을 비준하긴 했지만,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면서 그 실질적인 이행을 미루는 경우가 허다했다.




프랭크 라 뤼 유엔 표현의자유 특별보고관이 지난 5월 17일 서울 태평로 한국프레스센터에서 한국의 인권실태에 대한 조사 결과를 발표하는 기자회견 도중 생각에 잠겨 있다. |김기남 기자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유엔의 묘수는 국가인권기구(national human rights institutions)의 설립이었다. 그 첫 구상은 이미 1946년에 제시되었지만, 국가인권기구에 대한 체계적인 가이드라인은 1993년 유엔총회에서 채택된 ‘파리원칙’을 통해 제시되었다. 파리원칙은 국가인권기구가 ‘국제인권규범의 국내적 이행’을 목표로 각 국가에 설립되는 독립적인 국가기구임을 분명히 했다. 그동안 유엔은 회원국에 국가인권기구를 설립할 것을 지속적으로 권고해 왔고, 그 결과 지금은 약 90개국에 어떤 형태로든 국가인권기구가 설립되어 있다.

국제기구 성격의 국가인권기구
국가인권기구의 지위는 오묘하다. 한편으로는 국가 내에서 그 국가의 국내법에 따라 설립되는 ‘국가기구’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국제인권규범의 국내 이행을 목표로 하는 ‘국제기구’의 성격을 갖기 때문이다. 실제로 국가인권기구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국제인권조약의 비준을 촉구하고, 이미 비준된 조약에 대해서는 그 이행을 감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국가인권기구는 ‘인권분야에서 유엔의 활동을 위한 대리인’ 또는 ‘준국제기구’라고 불리기도 한다. 또한 각국의 국가인권기구들은 유엔 인권이사회 회의에 공식적으로 참가해서 발언할 자격을 가지고 있다. 국가인권기구에는 국제무대에서의 공식적 지위가 보장되어 있는 셈이다.

이렇게 국제기구의 성격을 갖는 국가인권기구가 세계적 차원의 감시를 받는 것은 당연하다. 세계 국가인권기구들의 세계본부인 ‘국가인권기구 국제조정위원회’(ICC)는 각 국가인권기구를 평가하여 등급을 부여한다. 유엔인권최고대표실을 위시한 각종 국제인권기구들도 수시로 각 국가인권기구의 활동을 평가하고 감시하는 일에 참여한다. 인권조약기구들은 국가보고서를 검토해 최종 견해를 제출할 때 국가인권기구의 역할에 대한 언급을 빼놓지 않는다.

아시아에는 ‘아시아·태평양 국가인권기구포럼’(APF)이 조직되어 있어 아시아 국가인권기구의 교류·협력을 주도하고 있다. 세계시민사회도 한 몫을 한다. 대표적으로 아시아의 인권단체들은 ‘아시아 시민사회단체 국가인권기구 네트워크’(ANNI)를 결성하여 아시아 국가인권기구들의 활동을 감시하고 매년 보고서를 내고 있다. 이쯤 되면 국가인권기구가 국가기구임에도 불구하고 국제인권공동체의 일원으로 활동하는 ‘국제행위자’(global actor)라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우리도 이러한 세계적 흐름에 발 맞춰 2001년 ‘국가인권위원회’를 설립하게 되었다. 출범 이후 인권위는 놀라운 발전을 거듭했다. 인권단체들이 보기에는 부족한 면이 많았지만, 인권위는 차근차근 자기 역할을 다하면서 국내외에서 신망을 얻는 기구로 발전해 나갔다. 국제사회에서 한국 인권위는 대표적인 모범사례로 자주 언급되었고, 우리 인권위의 성공 비결을 배우러온 외국사절의 한국 방문이 줄을 이었다. 2007년에는 ICC 부의장국으로 선출되었고, 2009년에는 차기 의장국을 사실상 예약해 놓는 성과로 이어졌다. 기적에 가까운 경제발전을 이뤄냈다는 평가를 받는 대한민국이었지만, 비경제분야에서의 국제적 위상은 그에 미치지 못한 것이 사실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세계 국가인권기구를 총괄하는 기구의 의장국이 된다는 것은 또 하나의 국가적 쾌거가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이러한 성과가 무너져내리는 것은 일순간이었다. 이명박 정부는 인수위 시절부터 인권위를 대통령 직속기구화하려는 시도를 하더니, 작년에는 인권위 직원을 21%나 축소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권력기구들은 인권위의 권고를 우습게 생각하는 경향이 팽배해졌고, 급기야 안경환 위원장이 조기 사퇴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후 인권전문성이 의심되는 인사들이 인권위원과 위원장에 속속 임명되었고, 신임 인권위원장은 ICC 차기 의장국을 사실상 스스로 포기하는 어이없는 일이 벌어진다. 그 후 인권위에서는 중요한 인권 현안에 침묵하고, 민감한 정치적 사안에 대한 판단을 회피하는 일이 빈번해졌다. 인권단체들은 인권위 출범 이후 인권상황이 최악이라고 진단했지만, 이런 상황에서 더욱 바지런을 떨어야 할 인권위는 너무 조용하고 무기력하기까지 했다.

국제적 인권 위상 한순간에 무너져
이에 항의하여 ‘인권위 제자리찾기 공동행동’과 ‘인권위 독립성 수호를 위한 법학교수 모임’이 결성돼 활동하고 있다. 국제사회도 이러한 상황을 묵과하지 않았다. 유엔 인권최고대표는 2008년 1월 인권위 대통령 직속기구화를 우려하는 서한을 대통령 당선자에게 보낸 데 이어, 2009년 2월에는 인권위의 조직 축소에 대한 우려가 담긴 서한을 우리 정부에 전달했다. 2009년 3월 ANNI는 ICC 의장에게 인권위 조직 축소에 대한 강력한 조치를 촉구하는 서한을 보냈고, 곧이어 ICC 의장과 APF 의장은 한국 정부의 인권위 축소 조치를 비판하는 서한을 우리 정부에 전달했다. 특히 ICC 의장의 서한에는 한국 인권위의 인증등급이 재조정될 수도 있음을 경고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한때 세계적 ‘모범’으로 위상을 높이던 한국 인권위가 하루 아침에 ‘문제아’로 전락하는 순간이었다.

인권위가 이런 푸대접을 받게 된 배경에는 아마 정권 차원의 전략적 판단이 있었을 터이다. 하지만 인권위가 국제사회에서 활동하는 국제행위자라는 점은 아마 충분히 고려되지 못한 듯하다. G20을 개최하고, 국가브랜드위원회를 만들고, 틈만 나면 ‘국격’ 향상을 외치는 정부에서 인권과 인권위가 어쩌다 이런 신세가 되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언제부턴가 우리 국정과 외교에서 ‘인권’이 ‘금칙어’가 되어버린 이유는 도대체 무엇인가? 인권이 ‘글로벌 스탠더드’에서 제외되어야 하는 무슨 말 못할 이유라도 있단 말인가? 국제사회에서 인권과 인권위가 갖는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도 어처구니없지만, 전략적 차원에서 인권을 ‘이용’하지도 못하는 센스의 부재는 안타깝기까지 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국에서 인권과 인권위의 발전에 박수를 보내던 국제사회가 다시 한번 한국을 주목하고 있다.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이고, G20 의장국이자 유엔사무총장까지 배출한 나라에서도 인권이 이렇게 한순간에 후퇴하고, 인권위가 이렇게 허무하게 몰락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준 ‘희한한’ 사례로 말이다.

홍성수<숙명여자대학교 법학부 교수>

“국가인권위 ‘몰락’ 세계가 ‘주목’”, 『위클리경향』 894호, 2010년 10월 5일자, 26-27쪽.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009291539201&code=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