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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책소개_book reviews

서평 : 임홍빈, 인권의 이념과 아시아가치론

by transproms 2008. 7. 23.

인권실천시민연대 웹진 [사람소리] 44호 2005.01.05.
http://www.hrights.or.kr/note/read.cgi?board=hongsungsu&nnew=2&y_number=2


인권은 보편적 가치인가?
서평 : 임홍빈, 인권의 이념과 아시아가치론 (아연출판부, 2003)

홍 성 수

‘인권의 보편성’의 문제는 인권을 학문적으로 접근하건 실천적으로 접근하건 언제나 부딪히게 되는 문제이다. 여기서 ‘인권의 보편성’이란 인권은 시공간에 의해 한정되지 않고, 언제 어디서나 동일한 원리가 적용되어야 함을 말한다. 세계인권선언의 “인류가족 모든 구성원의 타고난 존엄성과 평등하고도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인정하는 것이 전세계의 자유와 정의와 평화의 기초이며…”라는 구절과 1993년 비엔나선언 및 행동계획에서의 “모든 인권은 보편성, 불가분성, 상호의존성과 상호관련성을 갖는다.”는 구절은 이러한 인권의 보편적 성격을 잘 말해주고 있다.

 하지만 다원주의적 세계관을 기반으로 한 이른바 ‘문화적 상대주의’(cultural relativism)는 이러한 인권의 보편성을 강하게 비판한다. 이는 초월적 또는 초문화적 인권은 존재하지 않으며, 합의된 바도 없으므로 어떠한 문화도 자신의 이념을 다른 문화에 강요해서는 안된다는 입장이다. 또한 그런 점에서 서구에서 주장하는 인권의 보편성 주장은 서구제국주의의 오만과 편견을 담고 있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문제는 여기서 일종의 딜레마에 빠진다는 것이다. 먼저 인권의 보편성을 강조하다 보면, 인권규범이 특정한 시대와 문화에 따라 다를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하는 오류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인권규범의 지역적-시대적 특수성을 강조하다 보면, 인권의 보편성 자체를 부정하는 상대주의로 기울게 되는 위험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인권의 보편성 문제를 경유하지 않고, 여러 인권문제에 대한 일관성 있는 접근은 불가능하다. 실제로 인권의 보편성 문제는 북한인권문제, 이라크인권문제, 일부 동아시아국가의 인권침해문제, 한국의 국가보안법문제 등에서 핵심적인 논점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특히 주목을 끄는 것은 ‘아시아적 가치’(Asian Value)를 둘러싼 서구와 동아시아 사이의 논쟁이다. 아시아적 가치론은 아시아에는 정치·경제·문화의 영역에서 서양과는 다른 유교적 가치체계가 자리 잡고 있다고 하면서, 서양의 인권개념은 보편적일 수 없다고 한다. 반면 서구에서는 서구의 인권은 보편적인 권리라는 점을 주장하면서, 비서구사회에 대한 서구화를 정당한 것으로 관철시키려고 한다. 실제로 서구에서는 중국이나 싱가포르 등 아시아 국가들의 인권침해를 문제 삼아 정치·경제·문화적 개입을 감행하려고 한다. 하지만, 아시아국가의 일부 지도자와 학자들은 ‘아시아적 가치’의 고유한 가치를 주장하면서, 서구의 시각에서 아시아의 인권문제를 바라보는 것에 비판적이다.

 [인권의 이념과 아시아가치론]은 이러한 문제를 철학적 관점에서 본격적으로 다룬 전문 학술서이다. 아시아가치론과 관련된 논점은 실로 광범위하다. 서구적 근대성과 근대적 이성의 한계를 둘러싼 논쟁이 기본에 깔려 있고, 자연법 논쟁, 포스트모더니즘 논쟁, 문화적 다원주의, 다문화주의(multiculturalism),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 등의 논의가 아시아가치론에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논의들을 포괄적으로 다루고 있는 이 책의 논지를 따라가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지만, 핵심적인 주장은 비교적 선명하게 드러나 있다. 저자는 아시아적 가치관을 인류의 소중한 규범적 자산으로 보는데 인색하지 않지만, 아시아적 가치를 서구의 인권이념을 대체하는 대안으로 보는 것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이미 종교다원주의로 진입한 우리 현실에서 유교적 가치에 대한 강조는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다양한 가치들 중에서 특정한 관점만을 선택적으로 강조하는 것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유교적 가치관은 우리의 민주적 법치국가의 도덕적 기초가 될 수는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유교적 가치관은 농업사회의 혈연공동체에서 나온 일원론적이고 통합주의적 규범체계이며, 계층적으로 규정된 의무중심의 덕윤리라는 점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유교적 가치관은 근대 이후 형성된 시민사회나 근대적 국가체제의 제도들과 상응한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리고 저자는 보편적 인권개념이 여전히 의미가 있다고 본다. 저자는 아시아가치론자들이 인권철학의 발원지가 서구라는 이유로 보편적 인권개념을 배척하는 것을 비판하면서, 인권은 그 발생적 기원을 초월해서 정당화되고 실현되어야 하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라고 주장하고, 더 나아가 인권은 국민국가 체제 내 뿐만 아니라 세계사회의 정치적 의제라는 점을 지적한다. 저자의 이러한 보편적 인권에 대한 정당화는 독일의 철학자 회페(O. Höffe)와 하버마스(J. Habermas)의 인권이론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 책보다 좀더 쉽고 실천적인 관점에서 아시아가치론과 인권문제에 접근하고 있는 문헌으로는 성공회대 인권평화연구소에서 엮은 [동아시아 인권의 새로운 탐색](삼인, 2002)과 여러 학자들이 공동집필한 [아시아적 가치](전통과 현대, 1998)가 있다. 전자에는 1부와 2부에서는 주로 아시아적 가치론과 인권에 관한 일반론을 3부에서는 월드컵과 관련하여 민족주의와 인권에 관한 논문이 실려 있다. 후자에는 아시아적 가치에 대한 싱가폴의 리콴유와 한국의 김대중이 펼쳐낸 흥미로운 논쟁부터 시작하여, 일본과 한국의 학자들의 아시아적 가치와 한국의 정치·경제 문제, 그리고 논쟁에 대한 평가논문까지 모두 10편의 논문이 수록되어 있다.

인권의 보편성에 관한 논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그리고 아마 인류가 존재하는 한 영원히 풀리지 않는 숙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권의 보편성 자체를 포기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물론 한 사회의 특정한 가치관을 ‘보편성’으로 격상시켜 세계지배를 모색하는 것에 대해 우리는 끊임없이 경계해야겠지만, 그렇다고 인류의 보편적인 권리가 무엇인지를 고민하는 것을 포기해서는 안될 것이다. 물론 고전적 자연법론의 입장에서처럼 인권의 보편성을 고정불변하게 미리 주어진 어떤 것으로 파악해서는 안될 것이다. 여기서 만약 보편성을 다양한 문화적 차이가 서로 교류하고 대화하면서, 확인해 나가는 과정 그 자체로 재해석한다면, 인권의 보편성 문제에 대한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