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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책소개_book reviews

서평: 프리먼, 인권 이론과 실천

by transproms 2008. 7. 23.

인권실천시민연대 웹진 [사람소리] 107호 2006.4.12.
http://www.hrights.or.kr/note/read.cgi?board=hongsungsu&nnew=2&y_number=4



실천을 위한 인권이론
마이클 프리먼/김철효 역, <인권: 이론과 실천>(아르케, 2005)



인권 입문서

한국에서는 최근 몇 권의 인권서적들이 연달아 출간되었다. 덕분에 필자는 한국에서 공수해 온 여러 권의 책들 중 하나를 골라야 하는 행복한 고민을 해야 했다. 그 중 가장 먼저 집어 든 책은 <인권: 이론과 실천>이다. 사실 필자는 작년부터 이 책을 상당 부분 번역해 왔고, 저자와 저작권 문제를 협의하는 과정에서, 한글번역서가 이미 출간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필자가 이 책을 번역하여 한국에서 소개하고 싶었던 이유는, 그동안 수많은 서구의 인권문헌을 뒤져보았지만, 이 책만큼 포괄적면서도 알기 쉽게 인권문제에 접근하고 있는 책은 찾아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여러 대학의 ‘인권’수업에서 이 책을 교재로 채택하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번역서가 이미 출간되었다는 소식에, 그동안의 번역작업이 아깝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번역자의 훌륭한 번역과 성의 있는 역주까지 첨부되어 있는 책을 읽어보면서 그런 생각은 싹 사라졌다. 우리도 이제 누구에게나 자신 있게 추천할 수 있는 ‘인권 입문서’를 갖게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천을 위한 인권이론의 필요성

이 책의 한글판은 <인권: 이론과 실천>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지만, 사실 원제는 <인권: 학제적 접근>(Human Rights: An Interdisciplinary Approach)이다. 직역의 어색함을 피하고자 제목을 바꾼 듯하지만, 사실 원제가 이 책의 문제의식을 보다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이 주장하는 바는 한마디로 ‘인권에 대한 이론적 정당화’가 필요하며, 이를 위해 여러 사회과학 분과들이 ‘학제적(학문교류적, interdisciplinary) 연구’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인권이론의 성과는 많이 부족한 수준이라고 저자는 진단한다. UN을 위시한 국제기구들, 인권NGO들, 그리고 학계 모두 인권이론을 정초하기 위한 노력은 충분치 않았다. 인권을 최초로 사회적 의제로 제기한 18세기 근대시민혁명의 시기는 물론이고, 1948년 세계인권선언이 선포되었을 때, 그리고 1993년 비엔나선언이 발표될 때에도, 인권에 대한 이론적 정당화는 곁가지에 불과했다. 코소보사태, 이라크전쟁, 북한인권 등 최근의 인권문제에 관련해서도 이론적 논증은 한발 물러서 있는 느낌이다. 특히 UN이 인권의 철학적·이론적 정당성에 소극적이었던 이유를, 저자는 ‘철학적 정당성의 딜레마’라는 말로 요약한다. 인권 개념에 철학적 정당성을 부여하려고 하면 논란거리가 될 것이고, 그렇다고 철학적 정당성을 부여하지 않으며 그 도덕적 영향력을 읽어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UN은 인권의 철학적 정당성을 슬며시 피해갔다는 것이다. 이 점은 NGO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학계 역시 인권의 이론화에는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나마 인권이론을 주도한 것은 법학이었다. 그런데 법학은 ‘법률에 명시된 것’을 다루는 학문이다. 하지만 인권은 ‘법률규정에도 불구하고’ 또는 ‘법률규정에 아직 규정되지는 않았음에도’ 존중받아야할 인간의 권리이다. 그래서 법학은 한편으로 법률규정에 규정되지 않은 인권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고(법률실증주의), 다른 한편으로 실정법을 넘어서는 인권의 정당화에 대해서는 추상적인 자연법적 논증으로 도피했다(자연법론). 법률실증주의가 인권을 실정법의 좁은 틀 속에 가두어 버린다면(제1장), 자연법론은 객관적으로 증명가능하지 않은 형이상학으로 인권을 도피시킨다.(제2장)

우리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고문이나 불법구금 같은 노골적 인권침해가 사라진 것은 불과 10여 년 전 일이며, 아직도 기본적인 인권문제들 중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있는 것들이 적지 않다. 그런 상황에서 인권을 이론적으로 규명하겠다는 것은 한가롭거나 사치스러운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대신 인권은 실천의 현장에서 제기되었고, 지난하고 험난한 투쟁의 과정을 경유하면서 조금씩 그 의미를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런 실천적 과정을 겪으면서 비로소 ‘인권’을 조금씩 쟁취해온 사람들에게 ‘인권의 이론화’라는 테제는 여전히 낯선 것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현재의 우리가 직면한 인권상황은 이러한 ‘이론의 빈곤’을 방치해도 좋을 만큼 간단하지가 않다. 싱가포르의 태형이나 파키스탄의 명예살인에 대해 우리는 어떤 개입을 해야 하는가? 히잡을 착용하는 교사의 권리와 종교중립적 교육을 받아야 할 학생의 권리의 충돌은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 테러방지를 위한 불가피한 인권제한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재화가 한정된 상황에서, 저소득층의 최저생존권과 장애인의 이동권 중 어느 것을 우선해야 할 것인가? (국가가 아니라) 다국적 기업과 국제금융기기의 인권침해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로우며 그 존엄과 권리에 있어 동등하다”(세계인권선언), “인간은 단순히 인간이기 때문에 인권을 갖는다”는 식의 선언적 문구는 별 도움을 주지 못한다. 그래서 저자는 보다 치밀한 인권이론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이러한 문제에 맞서 싸우기 위한 근거를 갖기 위해서는 이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제4장) 그런 점에서 저자가 주장하는 인권이론은 이론을 위한 이론이 아니라, 실천을 가능하게 위한 전제조건으로서의 인권이론이다.


인권에 대한 학제적 연구

인권이론을 위해 저자는 사회과학의 여러 분과들이 인권을 함께 분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회과학의 정교한 눈으로 인권을 바라볼 때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실로 엄청나다. 정치학은 인권보장·침해의 정치적 조건들을 분석하는 눈을 제공하며, 사회학은 인권보장·침해의 사회적 조건들, 즉 사회구조나 사회운동을 분석하는 길을 열어준다. 심리학은 인권에 대한 대중들의 심리와 인권침해자의 심리상태를 분석해서 인권보장을 위한 중요한 이론적 논거를 제시하고, 인류학은 인권의 보편성과 문화적 차이에 대해 신중하게 접근할 것을 경고한다. 또한 최근의 지구화에 따른 인권문제에 대해서는 국제관계학의 논의가 새롭게 그 중요성을 획득하고 있다. 저자는 이러한 사회과학의 분과들의 학제적 교류를 통해 인권 문제에 접근한다면, 인권이론이 새로운 전기를 마련할 수 있음을 역설한다(제6장~제8장).

그렇게 보면, 인권활동가나 인권연구자가 알아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아진다. 제3세계 아동인권문제를 접근하기 위해서는 다국적기업의 메커니즘도 알아야 하고, G7회담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북한인권문제를 접근하기 위해서는 식량경제학, 미국의 외교정책에 대한 지식이 필수적이다. 최근의 중요한 이슈인 신자유주의화에 따른 사회권의 약화문제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경제성장과 사회권의 관계에 대한 비교정치이론의 성과물에 관심을 가져야 하며, 국제금융기구, 다국적 기업, 국가를 둘러싼 국제정치경제학적 지식도 알아야 한다. 제3세계의 인권문제에 접근 할 때는 문화제국주의로 귀결될 가능성에 대해 인류학의 진단을 거쳐 봐야 한다. 힘들어 보이지만, 복합적인 인권현상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설득력 있고 실현 가능한 ‘실천적 제언’을 내놓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과정이다. 또한 이를 위해서는 다양한 분과의 연구자들과 다양한 경험을 가지고 있는 활동가들이 함께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는 인권포럼이 무엇보다도 필요할 것이다.


철학적 정당화와 사회과학의 현실분석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인권과 관련하여 제기되는 논점들을 요령 있게 정리하고, 방대한 관련 문헌들을 충실하게 분석하여 소개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실천적, 이론적 성과를 인권운동사와 인권이론사적인 관점에서 상세하게 정리해준다. 이 책 하나만으로도 그동안의 인권운동과 인권학의 성과를 일별하기에 충분하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기본적으로 ‘인권입문서’이자 ‘인권교과서’로서의 성격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저자 나름의 비판적 관점도 덧붙여져 있는데, 거기서 추측할 수 있는 저자의 입장은 (번역자의 소개대로) 서구의 전형적인 자유주의 인권이론인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이 책이 다양한 인권이슈들을 해결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이나 실천적 지침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러한 이슈들을 보다 명확하게 생각하도록 도와주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러한 교과서적 저술이 가질 수밖에 없는 한계이지만, 오히려 장점이 될 수도 있다. 그보다는 저자가 인권의 철학적/이념적 정당성에 대한 논점을 살짝 비껴가는 듯한 인상을 주는 점이 아쉽다. 인권이념의 과잉과 이상주의에 대한 반성으로, 현실적·분석적 사회과학의 필요성이 제기된 것이지만, 그렇다고 인권에 대한 철학적 정당화가 불필요한 것은 결코 아니다. 철학적 인권이념은 비록 추상적이긴 하지만 일종의 ‘방향타’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관념적 이론과 비관념적 이론(87-88쪽), 규범적 철학과 사회과학(138쪽), 윤리적 진지함과 과학의 분석적 정연함(139쪽), 윤리적 이상주의와 과학적 현실주의(226쪽), 인권의 윤리학과 인권의 사회과학(229쪽) 등의 구분을 제시하면서 ‘철학적 이념’과 ‘사회과학적 현실분석’ 사이에 놓인 긴장관계를 인지하지만, 그 긴장의 해소에 대해서는 미래의 과제로 남겨 두고 있다. 그런 점에서 최근 인권의 철학적 정당화에 깊은 통찰을 제시한 롤즈(Rawls)나 하버마스(Habermas)의 이론에 대한 검토가 빠져 있는 점 또한 아쉬움으로 남는다. 아울러 저자의 ‘법학이 주도해온 인권연구’에 대한 비판은 적절하지만, 인권법학이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면, 인권법학과 인권의 사회과학이 어떻게 협력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검토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인권연구자와 인권활동가를 위한 제언

이 책의 저자 마이클 프리먼은 대학에서 인권을 가르치는 학자이면서 동시에 국제엠네스티 영국지부장을 역임한 인권활동가이기도 하다. 그런 저자는, 사회과학이 이제 인권을 중시하게 되었음을 환영하면서, ‘인권활동가’들이 인권의 사회과학에 관심을 가져달라는 주문으로 책을 마무리 한다. 자신의 인권이론은 결코 ‘이론을 위한 이론’이 아니라 ‘보다 나은 실천을 위한 이론’임을 재차 환기시키고 있는 셈이다. 그의 제언이 우리 인권연구자들과 인권활동가들 모두에게 신선한 자극이 되길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