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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기고_mass media

[시론] 사법권력도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한겨레)

by transproms 2012. 5. 31.


[시론] 사법권력도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전통적 관념에 따르면 법관은 불편부당하고 중립적이고 독립적으로 판결을 해야 한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법원의 판결이 모든 정치적 이해관계를 초월한 순수하고 중립적인 결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법관 개인의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배경에 따라 판결의 결론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은 이제 상식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법관, 특히 대법관들의 성향이나 배경에 관심을 갖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영국의 경우, 법관의 대부분은 사립학교와 옥스브리지(옥스퍼드대+케임브리지대) 출신의 중상위층 백인 남성들이다. 이들 법관의 정치성향을 분석한 한 연구에 따르면, 그들이 사유재산 보호, 질서·전통의 유지 등을 옹호하고, 노조, 소수의견, 집회·시위 등에 대해 반감을 갖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정치성향이 판결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분석한다. 영국 법원이 보수적인 이유를 법관의 사회적 배경에서 찾는 것이다. 한국의 경우는 어떨까? 현직 대법관 14명의 평균 나이는 57.9살, 여성은 2명, 11명은 고위법관 출신이며, 대법관들의 평균 재산은 21억원. 대부분의 대법관들은 같은 학교에서 공부하고, 같은 연수원을 다니고, 평생 법원에서 근무하다가, 50대 중반 무렵에 대법관이 된, 상당한 재력을 가진 남성들인 셈이다. 이쯤 되면 ‘대법관들은 한국의 전형적인 남성 기득권층’이라는 혐의를 벗을 길이 없다.


그런가 하면, 얼마 전까지 대법원에선 ‘독수리 5형제’라고 불렸던, 조금은 이질적인 배경(여성, 비고위법관, 비서울대)을 가진 대법관들이 활약했다. 이들이 설득력 있는 소수의견을 제출함으로써 대법원 판결에 다양한 의견이 반영될 수 있는 초석이 마련되었다. 실제로 <한겨레21>의 분석에 따르면, 다른 대법관들이 다수의견에 선 경우가 90% 이상인 반면, 이들이 다수의견에 힘을 보탠 경우는 83~88%라고 한다. 이들은 퇴임 후 변호사 개업 대신 후학 양성 등의 길을 택함으로써, 전관예우 근절을 위한 새로운 모범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실증적 자료들이 바로 대법원 구성이 다양화되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다른 배경을 가진 법관이 다른 결정을 내리는 경향이 있다면, 사회의 다양한 가치관들만큼이나 대법원도 다양한 성향의 법관들로 구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입법부, 행정부와는 달리, 사법부를 다수결(선거)로 선출하지 않는 이유는 사법부에 ‘소수자 보호’라는 특별한 임무가 부여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실제로 우리가 ‘역사적 명판결’이라고 부르는 판례들의 대부분은 행정부나 입법부가 해결하지 못한 정치·사회적 의제들을 법원이 소수자의 관점에서 해결한 것들이다. 이런 판결을 내릴 수 있는 사람들로 대법원이 구성되는 것은 사법권력의 정당성의 측면에서도 꼭 필요하다는 얘기다.


이제 곧 4명의 대법관이 한꺼번에 교체된다. 그런데 언론에서 물망에 오르고 있는 후보군을 보니 예의 그 비슷한 경력과 배경의 고위법관들 일색이다. 안타깝게도 그 후보군에는 국민들이 바라는 인물들은 눈에 띄지 않는다. 참여연대의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국민의 55.5%는 “대법원을 신뢰하지 않는다”고 답했고, 58.9%는 “판결에서 사회적 다양성을 반영하기 위해서는 판사 출신 이외의 법조인들도 대법관으로 뽑아야 한다”고 답했다. 헌법 제1조에 따르면,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오며, 사법‘권력’도 예외일 수 없다. 대법관 임명제청권을 가진 대법원장이 고민해야 할 지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홍성수 숙명여대 법대 교수



출처: 한겨레신문, 2012년 5월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