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들이 뽑은 필독서 10권이라고 합니다.
<가인 김병로 평전>, <블랙먼, 판사가 되다>, <블루 드레스>, <정의란 무엇인가>, <정약용, 조선의 정의를 말하다>, <레미제라블>, <설득의 심리학>, <어떻게 원하는 것을 얻는가>, <너의 내면을 검색하라>, <깊은 강>
http://www.huffingtonpost.kr/2014/06/05/story_n_5449885.html?utm_hp_ref=tw
<정의란 무엇인가>가 포함된 것이 눈에 띄네요. <정의란 무엇인가는 틀렸다>(미지북스, 2012)라는 책을 쓴 이한 변호사는 머리말에 이런 재밌는 일화를 적어 놓았습니다.
"어느 날 판사인 친구와 대화를 나누던 중에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화제에 올랐다. 그런데 놀랍게도, 친구뿐만 아니라 그 주위의 많은 판사들이 샌델의 책을 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대부분의 판사들이 그 내용에 공감하고 깊이 감화받았다고 한다. 한 판사가 '판결을 내릴 때 공동체의 미덕을 어떻게 진작시킬까를 기준으로 고민을 많이 한다.'고 말하자 다른 판사들도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샌델이 들었다면 무척 기뻤겠지만, 나는 큰 위기감을 느꼈다. 사법부의 판사들은 헌법과 법률에서 정한 ‘권리’의 공식적 수호자들이다. 그들이 특정 사안에 관련된 개인의 권리를 ‘미덕’을 진작시킬 목적에 맞추어서 주조하고 바꾸고 뒤집는다면, 더 나아가 입법부와 행정부, 그리고 일반 국민들은 시민의 권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심각하게 걱정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저도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개인적으로 센델의 정치철학은 우리 사회의 정치적 담론의 기초로 삼기에 너무 허술하고 위험한 사상이라고 봅니다. 특히, 한국 특유의 '직관적 사고'와 결합했을 때는 그 위험성이 몇 배 증가하죠. <정의란 무엇인가>는 정치철학 교양입문서로 위장되어 있지만, 사실은 센델 자신의 정치철학을 옹호하기 위해 치밀하게 계산된 책입니다. 뒷부분에 가면 그런 검은(!) 의도가 서서히 드러납니다. 하지만 이 책의 폐해를 그리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는, 100만부가 넘게 팔린 책이긴 하지만 실제로 끝까지 읽은 사람은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참 다행(?)스러운 일이죠 ... @.@ 근데 판사들 중에서는 읽는 것이 직업이라서 그런지, 이 책을 끝까지 읽은 분들이 많은 모양입니다. 이 책을 읽은 판사들이 "공동체의 미덕을 어떻게 진작시킬까를 기준으로 고민을 많이 한다"는 결론을 도출했다면, 그것이야말로 센델이 진정으로 이 책을 통해 주입시키고자 했던 교훈에 100% 일치합니다. 한국의 판사들이 이 책을 읽고 공동체의 미덕을 생각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센델에게 알리면, 아마 크게 기뻐할 거니다 ㅎㅎ 하지만, 저의 관점에서는 정말 위험한 교훈이 아닐 수 없습니다 ㅠㅠ 여하튼 판사들이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고, "공동체의 미덕"을 생각한다면 이건 정말 큰 일입니다.
저는 여전히 자유주의의 논법은 특히 판결의 논증구성에서 매우 큰 가치를 지닌다고 봅니다. 자유주의적 추론은 각 개인의 인권을 존중하면서도 정치공동체가 합의할 수 있는 최적의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고, 한계가 없진 않지만 웬만해서는 그 한계의 극단까지 밀고가기 힘들 정도로 자기정당화의 기제가 강력합니다. 그런데 센델은 자유주의가 매우 허약한 기반 위에 서 있는 것처럼, 대충 편파적으로 소개해 놓고, 신나게 비판을 가합니다. 전형적인 '허수아비 비판'이죠. 자유주의의 정당화 논리를 극대화시켜 놓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한계를 지적한다면 그건 의미가 있습니다. 근데 이렇게 허수아비 비판으로 공략을 해버리면 별 의미가 없고, 정치철학적 논증훈련에도 별 도움이 안됩니다. <정의란 무엇인가>는 그런 점에서 정치철학 입문서로서 그다지 적절치 않은 책이라고 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 정치철학의 3대 사조(공리주의, 자유주의, 공동체주의)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은 이 책의 큰 장점입니다. 실제로 킴리카의 <현대정치철학의 이해>(동명사, 2008) 같은 책도 매우 훌륭한 정치철학 저서이지만, 대중적으로 권하기는 어려운 책이거든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더라도, 롤즈나 드워킨 등 현대 자유주의의 정수를 보여주는 저자들의 책을 함께 읽는다던가, 위에서 소개한 <정의란 무엇인가는 틀렸다>와 비교해서 읽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 외에도 <무엇이 정의인가>(이택광 외, 마티, 2011)에 실린 일부 글과, 좀 더 학술적인 책이지만 <자유주의적 정의: 센델의 정의 담론 비판>(염수균, 조선대학교 출판부, 2012)도 읽어볼만 합니다.
센델의 저작 중 <왜 도덕인가?>왜 같은 칼럼집이나,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같은 대중저술도 무척 재밌긴 합니다. 이 양반이 책은 참 잘 써요 ^^ 강의도 참 잘하고요. 특히,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은 돈으로 환원될 수 없는 가치의 중요성에 대해 나름대로 잘 설명해놓고 있는 책이죠. 이 책을 읽고 '돈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현실'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는 것까지는 나쁘지 않습니다. 문제는 이 책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설득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좀 심하게 얘기하면, "왜 돈으로 사면 안되는데?"라고 물을 때, 센델은 "원래 돈으로 사면 안되는거야"라고 답하는 수준을 넘지 못하거든요. 좀 더 나가면, "돈으로 사면 안되는 것이 원래 존재하니까 그것이 무언인지 함께 토론해보자"는 정도? 이런 식으로는 공론영역에서 논쟁을 벌이는데 도움이 전혀 안됩니다. 정치철학이라는 것은 공적인 문제에 대해 합리적 토론을 해나가는 '방법'을 제시해주는 것인데, 센델의 주장에는 그 방법이 전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역시 좀 심하게 얘기하면, "하여간 우리는 관심을 갖고 토론을 해야 한다"는 식이거든요. 반면에 자유주의나 공리주의는 우리가 어떤 논점으로 어떻게 토론을 해야 할지를 나름대로 제시하는 이론체계입니다. 자유주의와 공리주의를 통해 정치철학적 논증과 추론의 방법을 시민들이 습득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민주주의의 수준을 높일 수 있는 길이라고 봅니다. 이 점에서 센델의 주장은 거의 기여하는 바가 없습니다. 기껏해야 자유주의가 처해있는 일부 난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참고로 이 점은 주로 <정의의 한계>라는 책에 서술되어 있습니다.
여튼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고, "우리 공동체의 미덕을 증진시키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겠다"는 식의 결론을 도출하는 것에는 많은 문제가 있다는 점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