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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기고_mass media

[기고] ‘통합’의 정치와 소수자

by transproms 2013. 3. 27.

‘통합’의 정치와 소수자



이번 대선의 핵심 키워드는 ‘통합’인가 보다. 한 후보가 “100% 국민대통합과 국민행복 시대를 열겠다”고 외치니, 또다른 후보는 “대통합으로 새 정치, 새 시대를 열겠다”고 응수한다. 나는 솔직히 이 통합이라는 말이 무섭다. 정치란 상충하는 이익의 적대를 전제하고 그것을 조정하는 과정인데, ‘통합’이라는 말이 이런 갈등의 조정 과정을 무시한 채 ‘하나가 되자’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물론 후보들이 내거는 통합은 극한 갈등을 피하고 서로의 의견을 존중하면서 지혜롭게 문제를 해결하자는 뜻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넉넉하게 선해하는 여유를 부릴 수 없는 이유는 통합을 얘기하는 후보가 내놓은 정책 때문이다. 예컨대 표현의 자유 보장, 양심적 병역거부자에 대한 대체복무제 도입, 소수자 차별금지법 제정 등의 문제가 시금석이 될 수 있다. ‘100% 국민대통합’을 외치는 박근혜 후보는 이 문제들에 대해 인터넷 통신 심의를 축소하겠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아예 입장이 없다. 정부 정책을 비판하는 사람들을 법정에 세워왔던 지난 5년을 ‘되풀이하겠다’는 것인지, 신념을 지키는 병역거부자들은 ‘감옥에 가라’는 것인지, 성소수자들을 ‘차별하겠다’는 것인지 묻고 싶다. 소수자 문제는 ‘공약’에 포함되어 있어도 반신반의할 수밖에 없는데, 이에 대한 구체적이고 명확한 입장 없이 어떤 ‘통합’과 ‘행복’이 가능한지 의아할 뿐이다. 문재인 후보는 표현의 자유 보장, 대체복무제 도입, 차별금지법 제정 등 상대적으로 진일보한 정책을 내놓았지만, 캠프의 유력 인사가 “동성애·동성혼을 허용하지 않도록 노력하겠다”고 약속하는 등 혼선을 빚고 있다. 여러 소수자 문제들에 대해 일관된 태도를 보이는 후보들은 유감스럽게도 당선과는 거리가 먼 김소연·김순자 후보다.


민주주의는 ‘다수의 지배’를 근간으로 한다. 자연스럽게 소수자의 인권이나 의견이 무시될 위험을 안고 있다. 의견진술의 기회가 보장되고 충분한 토론을 거친 뒤에도 합의에 실패하면 결국 다수자의 뜻에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 민주주의의 숙명이다. 이것이 민주주의가 소수자에게는 결국 불만일 수밖에 없고 민주주의의 위기가 심화되는 요인이기도 하다. 정치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이 “배제를 통해서만 정치에 포함”되는 역설을 날카롭게 지적한 것도 바로 이 대목이다.


민주주의가 그 위기를 돌파할 수 있었던 비결은 어떤 그럴듯한 제도가 아니라 현실의 정치 그 자체였다. 위험한 발언을 금지하자는 목소리가 높았을 때 소수의견을 존중하자며 다수자들을 설득한 정치가 있었기에 민주주의는 위기에 빠지지 않았다. 병역거부자에게 거부감을 갖는 다수자들의 이해를 구하고 대체복무의 길을 열어준 정치 덕분에 민주주의는 지속가능할 수 있었다. 한 표라도 더 얻기 위해 사투를 벌여야 하는 것이 현실의 선거다. 다수자의 눈치를 살피는 것이 민주주의에서는 당연한 일일 테다. 하지만 의견이 다른 자를 감옥에 넣고, 성적 지향이 다른 자는 차별을 감수해야 한다는 식의 정치라면, 그것은 배제와 포함을 통한 눈속임조차 생략한 노골적인 배제의 정치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이것이 결국 정치에 대한 불신을 초래하고 민주주의를 위기에 빠뜨릴 것이다.


통합을 내세우는 후보들의 공약 속에 소수자들이 어디에 위치해 있고 어떤 대접을 받고 있는지 눈을 부릅뜨고 살펴보자. 소수자들을 끊임없이 배제의 길로 내몰았던 지난 5년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도 꼼꼼히 살펴보자. 그리고 6개나 되는 선택지 중 딱 하나를 신중하게 골라야 한다. 우리의 민주주의가 위기에 빠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면 말이다.



한겨레신문, 2012.12.17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