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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책소개_book reviews

[서평] 삼켜야 했던 평화의 언어: 병역거부가 말했던 것, 말하지 못했던 것

by transproms 2012. 1. 28.

임재성 <삼켜야 했던 평화의 언어-병역거부가 말했던 것, 말하지 못했던 것>(2011, 그린비)


평화운동으로서의 병역거부운동을 말하다


수업 시간에 ‘양심적 병역거부’를 다루곤 한다. 몇 가지 배경지식을 소개하고 나면 교실은 술렁인다. 그 정도야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는 학생부터, 거부감을 표출하는 학생까지 반응은 다양하다. 하지만 병역거부자들의 ‘인권’을 언급하며 이야기를 풀어 가면, 논의는 의외로 쉽게 정리된다. 국제인권기준과 세계적인 현황이 ‘분단상황의 특수성’을 서서히 제압한다. “유엔 사무총장을 배출한 나라에서...” 이 한마디에 ‘글로벌 코리아’의 꿈돌이 학생들이 생각을 바꾼다. 군대보다 길고 힘든 대체복무제는 악용가능성도 거의 없다는 말로 안심을 시키고, 대체복무제를 도입해도 우리 국방에 전혀 지장이 없다는 말로 논의의 ‘쐐기’를 박는다. 글로벌 코리아의 압도적인 논거에 정연한 논리와 구체적인 대안의 제시! 이제 찜찜했던 마음까지 모두 사라진다. “그래... 이제 우리 사회도 소수자에게 그 정도 관용은 베풀어야지 ....”  

우리 사회의 논의 수준에 나의 강의실에서처럼 그렇게 순조롭게 진행되진 않겠지만, 결국 대체복무제의 논의는 그렇게 흘러 갈 것이다. 이번 정권 들어 정부정책이 후퇴한 듯 보이지만, 대세를 거스를 수는 없다. 사법부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2000년대 들어, 현행 병역법을 근거로 해서도 병역거부가 정당화될 수 있음을 인정한 하급심 판례가 두 건이나 나왔고, 위헌법률심판도 줄을 잇고 있다. 헌법재판소와 대법원도 합헌 또는 유죄판결을 내리긴 했지만, 이례적으로 대체복무 필요성을 권고했다. 전문가 여론조사는 물론이고, 대국민 여론조사 결과도 생각보다 호의적이다. 대체복무제 도입은 이제 시간문제일 뿐이다.  

지금까지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한 논의는 여기까지였다. 『삼켜야 했던 평화의 언어: 병역거부가 말했던 것, 말하지 못했던 것』는 바로 이 지점에서 논의를 시작한다. 병역거부자들에게 “삼켜야 했던 그 무엇”, “말하지 못했던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 “말하지 못했던 것”은 바로 반군사주의, 전쟁반대, 그리고 평화이다. 사실 평화주의자들이 대체복무제 도입을 주장하지만, 그렇다고 병역의무이행자들이 수행하는 전쟁이 옳다고 얘기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징병제보다는 모병제가 낫다고 얘기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직업군인들의 전쟁이 정당하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목소리는 자신들을 감옥에 보내지 말라는 것으로 제한될 수 없다. 그것은 평화의 목소리이다. 전쟁을 중단해야 한다는 반전의 목소리이다. 

하지만, 저자는 이를 위해 평화론이나 정전론을 끌어들이지 않는다. 대신, 그는 병역거부자들의 고통과 감정을 통해서 접근하는 “‘공감’이라는 평화학의 방법론”을 택한다. 이를 위해 그는 병역거부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그렇게 저자가 포착한 병역거부자들의 모습은 ‘투사’가 아닌 ‘인간’이다. 그에게 병역거부자들은 기자들 앞에서 당당하게 병역거부 기자회견을 하고, 세상 두려울 것 없다는 듯 경찰서에 자진 출두하고, 법정에서는 대체복무제 도입의 정당성을 멋지게 연설하는 전사나 투사가 아니었다. 아니 그들에게는 ‘전사’나 ‘투사’같은 피비린내 나는 수식어 자체가 부당했다. 그들은 그저 “사람이 사람을 어떻게 죽이나요?”라는 당연한 질문을 던지는 인간일 뿐이었다. 그들은 영혼을 가진 인간으로서, 다른 인간에게 총을 겨눌 수 없다고 절규하고, 침략전쟁에 힘을 보탤 수 없다고 분노하는 인간이었다. 그리고 그 인간적 모습에서 우리는 ‘전쟁 없는 세상’을 상상할 수 있다. 그것이야말로 그 어떠한 거창한 이론보다 강력한 평화운동과 반전운동의 ‘자원’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병역거부운동의 ‘평화운동’으로의 전환은 이미 진행 중이다. 그리고 저자는 그 역사적 전환을 병역거부자들의 목소리를 통해서 전하고 있다.  

그동안 병역거부운동에 함께 한 수많은 당사자와 운동가들의 싸움이 있었다. 그리고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한 훌륭한 책들과 논문들이 쏟아져 나왔다. 병역거부운동은 황무지에서 출발했지만 그들의 그런 노력 덕에 우리는 병역거부운동에 눈을 뜨게 되었고, 언젠가는 그 성과가 대체복무제라는 진전으로 이어질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대체복무제 도입을 주장하는 병역거부운동은 일단락될 것이다. 하지만 병역거부운동이 전쟁에 반대하는 인간 본연의 양심에 호소하는 평화운동이라면 대체복무제 도입은 또 다른 운동을 위한 시작이기도 할 것이다. 이 책은 그 ‘역사적 전환’을 예비하는 발제문이다.


출처: 인권연대, 사람소리

http://hrights.or.kr/technote7/board.php?board=hongsungsu&command=body&no=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