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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기고_mass media

[기고] '법치'의 수난시대 (시사IN)

by transproms 2012. 7. 7.

'법치'의 수난시대



홍성수 (숙명여자대학교 조교수)


통치자들이 ‘법치’를 내세우는 것은 흔한 일이다. 노조의 불법을 강력하게 진압했던 영국의 대처 수상, 공권력 강화를 통한 법질서 확립을 내걸었던 프랑스의 사르코지 대통령, 미국 내외의 ‘악’에 대해 무관용 정책으로 일관했던 미국의 부시 대통령 등이 떠오른다. 우리에게도, 과거 권위주의 정권 시절 불법에 단호하게 대처한다며 ‘법치’를 외치던 풍경이 그리 낯설지 않다.


하지만 이들이 들먹이는 ‘법치’와 법치의 이념적 원형 사이에는 꽤 큰 간극이 있다. 법치는 말 그대로 ‘법이 지배한다’(rule of law)는 뜻이다. 그 대척점에 있는 ‘인간의 지배’(rule of man), 즉 ‘인치’와 비교해보면 그 의미가 더욱 생생하게 살아난다. 법치를 고안하게 된 것은 인치의 폭력성에 대한 역사적 교훈 때문이다. 


근대인들은 권력의 자의적 행사를 통제하고자 통치자의 손과 발을 국민의 대표기관인 의회가 제정한 ‘법’에 묶어두고자 했다. 이것이 성공하자, 인간이 통치하던 세상 대신 법이 지배하는 신세계가 열렸다. 통치자가 누구이건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졌다. 아무리 흉포한 통치자도 법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으니 국정이 예측 가능해졌고, 권력에 의한 인권침해도 제어할 수 있게 되었다. 민주주의가 법을 만들고, 법이 다시 민주주의를 통제하고, 그렇게 해서 인권이 보장되는 통치체제가 구축되는 절묘한 선순환이 가능해졌다. 이것이 법치가 근대 시민혁명을 통해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가 된 사연이다.


그런데 지금 한국 사회가 경험하고 있는 것은 반(反)법치의 현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법질서 파괴 행위에 엄정하게 대처하겠다”라며 법치주의 확립을 천명한 바 있다. 하지만 법치주의의 확립은 통치 권력이 법에 의해 통제될 때 비로소 가능하다. 실제로, 법질서를 파괴하는 것은 불법 시위꾼이 아니라, 도리어 국가권력이다. 


검찰부터 살펴보자. 미네르바·정연주·한명숙·김상곤·<PD수첩> 등을 한쪽 편에, 민간인 사찰·내곡동 사건 등을 다른 한편에 놓아보자. 이 양쪽 사건들에 대한 수사가 동일한 법의 잣대에 따라 공평하게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있을까? 만약 그 균형을 깬 것이 권력자의 ‘의중’이었다면 그것이야말로 법치를 정면으로 위배한 ‘인치’가 아니겠는가?


민간인 사찰도 마찬가지다. 국무총리실의 공직윤리지원관실은 국무총리의 지휘 아래 공직자를 감찰하는 기관이었다. 그런데 직제상 권한이 없는 청와대 사람들이 이 일에 관여했고, 민간인 사찰이라는 권한 밖의 일을 벌였다. 이 사건에 관련된 ‘인’(人)들은 법의 통제를 받지 않았던 것이다.



<PD수첩>과 민간인 사찰, 공평한 수사였나


이뿐만이 아니다. “물가관리에 신경 써달라”는 대통령의 주문을 받은 공정거래위원장은 “공정위가 물가기관이라는 점을 이해하지 못하는 직원은 색출해 인사 조처하겠다”라며 엄포를 놓았다. 그런데 관련 법령을 샅샅이 뒤져봐도, 공정위 소관 사무에 ‘물가관리’는 없다. 한창 논란이 되고 있는 국가인권위원회의 위원장 연임 문제도 마찬지다. 국가인권위원회법에 적혀 있는 인권위원의 자격 요건은 “인권 문제에 관하여 전문적인 지식과 경험이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청와대가 연임시키겠다고 나선 현재의 인권위원장은 인권 현장과 인권위에 대해서 잘 모른다고 자백함으로써, 스스로 불법 임명임을 인정한 바 있다. 통치자가 자신의 의중대로 법에 정해놓지 않은 일을 할 수 있었다면, 그것은 법치가 인치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는 얘기다.


통치가 법으로 순치되지 못하면, 통치 권력의 정치적 오류가 정치·사회 현실에 적나라하게 반영된다. 지금 우리 사회가 겪는 고통은 그 오류가 법에 의해서 걸러지지 못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것은 ‘법치’를 외쳤던 사람들이 가장 우려하는 일이기도 하다. 전문가들의 평가도 냉혹하다. 한 설문조사에서 헌법·형사법 교수의 68%는 “이명박 정부 들어 법치주의가 후퇴했다”라고 답했다. 법치주의 확립을 유난히 강조했던 정권의 성적표치고는 너무 초라한 결과다. 


사정이 이쯤 되고 보니, 이번 대선에서는 다른 기대를 모두 접고 법치를 약속한 후보에게 한 표를 던져야겠다는 생각이다. 법치가 수난을 겪는 만큼, 세상도 고난의 길을 걸어야 한다는 사실을 똑똑히 목도했기 때문이다. 중세의 무자비한 권력에 맞서 법으로 그 권력을 통제하고자 했던 근대 시민들의 심정도 이렇지 않았을까? 불행히도 우리는 지금 이런 시대에 살고 있다



출처: 시사IN, 250호, 2012년 6월 30일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