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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기고_mass media

[기고] 다시 일상으로

by transproms 2013. 3. 27.

다시 일상으로



홍성수 (숙명여자대학교 법학부 교수)



2007년 12월 겨울, 대선 결과를 놓고 많은 사람들이 실의에 빠져 있었지만, 나는 한껏 여유를 부리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 민주주의 수준에서, 그깟 대통령 한 사람 바뀌었다고 뭐가 그리 달라지겠소!” 자칭 ‘실용주의자’에게 나라를 맡겨보는 것이 나쁘지 않다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이것이 오판임을 확인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촛불시위를 경과하면서 정치적 반대파가 탄압을 받기 시작했고, 힘 좀 쓰는 자리는 측근들로 채워졌다. 그동안 힘들게 얻어낸 민주주의와 법치 질서가 속절없이 무너졌다. 1987년보다 더 큰 규모의 시국선언이 뒤따랐다. 나중에 알려진 일이지만, 그 와중에 민간인 사찰이 자행되고 있었다. 

 

다시 5년 후, 이번에는 반드시 정권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민주당이나 문재인 후보에게 큰 기대가 있어서가 아니다. 최소한, 후퇴한 민주주의는 복구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정권교체는 실패했다. ‘서로를 위로하기 위한’ 지인들의 모임에 나가봤다. 다들 2007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심각한 ‘멘붕(정신적 공황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런 그들을 앞에 두고 감히 “뭐가 그리 달라지겠소”라는 말을 꺼낼 수 없었다. 하지만 속내는 2007년 그때와 다르지 않았다. 박근혜식 리더십과 정치 노선은 퇴행적이라고 생각하고, 새누리당의 재집권은 충격적이기까지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이 제2의 유신시대를 열 것이라는 가정은 과도하다. 경제민주화가 ‘줄푸세’를 계승한 것이라는 해설은 여전히 아리송하지만, 어쨌든 당선자의 핵심 공약이 부족하나마 복지와 경제민주화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선거 결과를 두고 실의에 빠진 사람들의 심정은 이해할 수 있지만,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오버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겨우 3.6%를 더 얻은 후보가 모든 권력을 독식하는 대통령제는 분명 문제다. 하지만 민주주의가 정착된 사회라면, 대통령이 바뀐다고 세상이 그리 달라지지 않아야 정상이다. 통치권자의 정치이념에 따른 어느 정도의 변화는 자연스럽지만 그 진폭은 일정한 한계를 벗어나지 말아야 하며, 패배한 진영의 충격도 딱 그만큼이어야 한다. 물론 감내할 수 없는 수준의 진폭을 경험하게 해준 이명박 정부를 잊을 수가 없지만, 이번에는 설마 그 정도는 아니지 않겠는가? 


물론 이것은 희망 섞인 전망에 가깝다. 하지만 일단 이렇게 멘붕에서 벗어나고 다른 행동을 모색해야 한다. 벌써 5년 후를 기약하자는 분도 있지만, 내 생각은 좀 다르다. 5년 후에 원하는 대통령을 당선시키는 것보다는, 누가 대통령이 되어도 멘붕에 빠지지 않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려면 선거로 통치 권력을 교체하는 ‘큰 정치’가 아니라, 일상의 ‘작은 정치’에 주목해야 한다. 일상에서 자치와 민주주의를 심화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시민들이 학교·회사·마을·공공장소에서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누고 존엄하고 자율적인 삶을 위한 의제들을 찾고 함께 행동에 나서야 한다. 선거에서 승리하면 합법적인 국가 폭력을 행사할 권한을 얻겠지만, 아렌트(H. Arendt)에 따르면 ‘폭력’과 구분되는 ‘권력’은 “함께 행동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에서 나온다. 이 능력을 강화하고 실천에 나서는 직접 행동이 중요하다는 얘기다. 


선거로 인한 스트레스에서 해방되는 길


아렌트는 이렇게 일상에서 시민들의 상호작용을 통해 자율적인 자치 권력을 창출하는 정치를 ‘혁명의 잃어버린 보물’이라고 했다. 주위를 돌아보면, 이 보물들이 널려 있다. 학교나 동네에서 소소한 자치모임을 해보는 것, 공동 육아, 동네 도서관, 생활협동조합 등에서 협력적 행동을 실천해보는 것, 관심 있는 주제를 다루는 비정부기구(NGO)에 기부하거나 활동에 참여하는 것, 동네 신문이나 공동체 라디오 등 작은 미디어를 만들어보는 것, 학교운영위원회나 노동조합 등을 통해 학교와 직장에서의 자치민주주의를 구현하는 것, 지역 주민과 함께 기초의회 감시활동을 해보거나 주민자치 활동에 참여하는 것 등이 그것이다. 멘붕을 치유한답시고 술자리에서 한탄만 하고 있기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참으로 많다. 일상에서 시민의 권력이 강화되면, 통치권자가 누구이건 우리의 삶에 미치는 영향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게 선거에서의 승리와 패배로 인한 과도한 스트레스에서 점차 해방되어야 한다. 어쩌면 일상의 작은 정치에서 시민들의 권한을 강화하는 것이야말로, 작금의 ‘멘붕’의 원인인 ‘큰 정치’를 바꾸는 지름길일지도 모른다. 



*출처: 시사IN, 277호, 2013.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