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잡문_comments

삼성 총장 추천제에 대한 조금은 다른 생각

by transproms 2014. 1. 28.

결론적으로는 당연히 이번 삼성의 조치는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근데 문제는 뭐가 문제가 되는 것이지가 분명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뭔가 생산적인 결론으로 나아가려면, “오만한 삼성이 이런 일까지 하네” 정도의 비난을 넘어서서 구체적으로 뭐가 문제인지 짚어봐야 할 겁니다. 아래 내용은 그것을 위한 생각의 단초들입니다.



1. 삼성이 대학 서열화 조장, 구체적으로 무엇이 문제인가?

먼저 삼성이 대학 서열화를 조장했다는데, 팩트부터 챙기자면, 삼성이 대학별 추천인원을 정해서 언론에 공표한 것은 아닙니다. 대학별로 추천인원을 각각의 대학에 각각 통보했는데, 누군가가(아마 언론?) 대학별로 일일히 전화를 해서 추천 인원을 취합해서 공개한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모아 놓고 나니까 문제가 커진 것이죠. 추측컨데, 삼성에서는 이런 식으로 문제가 될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을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번 서열화는 단순한 서열화가 아닙니다. 한마디만 여쭙죠. 삼성이 정한 대학 서열이 일반적인 대학 서열보다 더 심한 서열인가요? 서울대와 비서울대, SKY와 비SKY, 수도권대와 비수도권 대학 간의 격차가 이렇게 좁은 대학 서열 혹시 보셨나요? 삼성이 미리 숫자를 정해놓고 사전에 공표한 셈이 되었으니 이렇게 문제가 되는 것이지, 만약, 이미 채용된 삼성의 신입사원의 출신대학 비율이 ‘결과적’으로 이렇게 된거였다면 어땠을까요? “삼성은 대기업 중에서는 가장 ‘덜’ 서열화된 신입사원 채용 정책을 갖고 있다”, “지방대나 비명문대에 대한 차별이 가장 ‘덜’한 기업이다” 이런 평가를 받지 않았을까요? 실제로, “어라, 생각보다 여러 대학 출신자들을 골고루 뽑고 있네”라고 생각한 분들도 계실 겁니다. 이렇게 묻고 싶습니다. 우리는 대학 서열화 자체를 다 반대하고 있는 것인가요? 아니면 (다른 거의 모든 기업들에 제기하는 의혹인) 신입사원 선발이 결과적으로 서열화되는 것은 상관없는데, (이번 삼성처럼) 서열을 사전에 정해 놓으면 안된다는 것인가요? 아니면 삼성의 서열화가 다른 기업들에 비해 특별히 과도하거나 이상해서 문제를 삼고 있는 것인가요? 



2. 총장추천제는 황당한 발상인가?

삼성 측에 따르면, SSAT시험/삼성입사가 고시처럼 되고 있는 현실을 타파하고 싶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나온 안이라고 해요. 문제의식을 갖는 것은 좋았다고 봅니다. 그리고 대학의 추천권을 존중하겠다는 발상도 나쁘지 않다고 봅니다. 대학은 고등학교 교사들의 평가를 믿고, 기업은 대학 교수들의 평가를 믿어야 교육이 정상화될 수 있는 것이니까요. 물론 교육이 정상화되어야 교사/교수들의 평가를 믿을 수 있을 것이고요. 


그런데 삼성은 한국사회에서 총장추천제가 어떻게 실제로 운영될지에 대해서는 심각한 고민을 안한 것 같습니다. 대학에 몸담고 있는 입장에서 부끄러운 얘기지만, 저는 총장추천제가 합리적으로 운영될 가능성보다는 공정성 시비에 휩싸일 가능성이 훨씬 높다고 봅니다. 총장이 어떤 기준으로 추천을 하건, 많은 공정성 시비가 있을 겁니다. 아직은 총장이 추천한 자가 우수한 학생이라는 공감대가 전혀 형성되어 있지 않으니까요. "누구누구 아들이라서 이번에 총장이 추천한거라던데?" 등등등.... 무슨 문제가 생길지 눈에 뻔히 보이시죠? 대학 관계자로서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한국의 대학은 아직 이 문제를 해결할 준비가 안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건 삼성의 문제라기보다는 대학이 아직 많이 부족해서 벌어지는 문제가 아닌가 합니다. 


총장추천제가 '잘 운영되는' 상황을 한번 그려 봅시다. 오히려 훌륭한 총장이라면 소신있게 교육하고 소신있게 추천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제가 총장이라면, 사고력이 뛰어나고 책을 많이 읽고 글쓰기 능력이 출중하고 인격적으로 훌륭하지만, 영어를 잘못하고 대학생활이 좀 꼬여서 학점도 별로 안좋고 심지어 엑셀도 돌릴 줄 모르고 스펙도 변변치 않은 학생을 추천하겠습니다. 삼성을 골탕 먹이려는 것이 아니라, 삼성 정도라면 그깟 영어나 엑셀 정도는 자신들이 교육시킬 역량이 있으니까 (기업에서 저평가하지만 제가 보장하는) 이런 숨은 인재를 써 보라고 자신있게 권하려는 겁니다. 이 학생들이 당장은 기업에 별다른 도움이 안되도, 장기적으로 역량을 발휘할 거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학생에게도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저 같이 훌륭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총장으로 있는 대학이 별로 없다는 점에서 현실성은 없는 얘기입니다. 오히려 한국 대학의 현실은 정반대입니다. 총장추천권이 강해지면, 총장은 대학에서 학생들을 통제하기가 쉬워지겠죠. "삼성이 취업하기 싫으면, 대자보 붙이지 마세요" 이렇게 당당하게 요구하는 총장이 나타날지 모릅니다 ㅠㅠ 이것이 대학의 현실인 이상, 총장추천제가 이상적으로 돌아가는 것을 예상하긴 어렵습니다. 


하지만 총장추천제는 대학 인재상에 대한 주도권을 기업에게 완전히 빼앗기고 있는 지금의 상황에서, 대학에게도 자신이 생각하는 인재를 좋은 기업에 보낼 수 있고 대학이 생각하는 인재상을 재정립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고 봅니다. 물론 기업이 대학을 지배하고 현실을 깨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대학과 사회가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하는 일이죠. 그런 한계를 염두에 둔 상황에서, 총장추천제가 (잘 운영된다는 조건 하에서) 하나의 부분적인 대안 정도로서는 기능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렇게 잘 운영될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것이 우리의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언젠가는 총장(학장) 추천제도를 시행할 수 있는 날이 올 것이고, 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문화적으로 충분히 성숙되지 않았어도 제도가 문화를 견인하도록 하는 것이 더 나은 경우도 있으니 생각보다는 그 시기가 조금은 빨라질지도 모르겠습니다. 


종합하자면, 이 문제에 관련해서는 이렇게 묻고 싶습니다. 우리는 총장추천제 자체에 반대하는 것인가요? 삼성의 총장추천제를 반대하는 것인가요? 대학별로 숫자를 임의로 정하는 방식의 총장추천제에 반대하는 것인가요? 아니면 총장추천제가 우리 대학현실에서 공정하게 기능할리 없기 때문에 반대하는 것인가요?


* 참고로, 이번 총장추천제도 조금만 더 다듬었자면 그렇게 욕먹지 않았을 겁니다. 총장추천제로 신입사원 전원을 뽑는게 아니었고, 어차피 신입사원의 ‘일부’를 총장추천으로 뽑는다는 거였다면, 과감하게 모든 대학에서 총장 추천으로 ‘졸업생 숫자 비율’에 맞춰서, 똑같은 비율로 선발하겠다고 했으면 어땠을까요? 신입사원 전체를 그렇게 뽑을 수는 없겠지만, 일부라도 그렇게 뽑는다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발상이라고 봅니다. 총장 추천의 공정성에 대한 문제가 여전히 남겠지만, 저는 이렇게 갔다면 전혀 다른 평가를 받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3.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환기해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성이 이번에 실시하려고 했던 총장 추천제는 결과적으로 나쁜 제도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습니다. 하지만 삼성에게는 위기이자 기회입니다. 저는 무엇보다도 삼성이 삼성 입사 제도 자체가 이렇게 큰 사회적 논란이 된다는 점 자체를 무겁게 받아들였으면 합니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론(CSR)에서는 기업이 채용절차를 공정하게 운영할 책임이 있다고 봅니다. “사기업이 내가 일 시킬 사람 내가 뽑는데 뭔 상관이야?” 이런 말이 안 통한다는 세상이 왔다는 것이죠. 사회에 영향력이 큰 기업일수록 그 책임을 더욱 무겁게 느껴야 합니다. 이제 삼성은 자신들의 '사익'에 부합하는 인재를 뽑을 생각뿐만 아니라, '사회적 책임'에 걸맞는 신입사원 채용제도가 무엇인지를 고민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익'을 추구하는 것이 나쁘다는 말은 아니라, 사회적 책임'도' 고려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대학에서는 기회균등선발도 하고, 지역인재균형선발, 소수자할당제도 하고... 대학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 부족하지만 나름의 노력을 하잖아요. 이제는 대기업도 예외가 될 수 없고 비슷한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겁니다. 


해외 유수기업의 사회적 책임 보고서(CSR Report)의 첫 장(chapter)은 보통 종업원의 구성(profile)입니다. 환경, 소비자, 협력/하청업체 노동자, 지역사회 등에 대한 사회적 책임도 중요하지만, 기본적으로 기업이 고용하고 있는 노동자들에 대한 사회적 책임이 기본 중의 기본이기 때문이죠. 보통 그래프로 깔끔하게 표시해주기도 하는데, 남녀 비율은 기본이고, 노동자와 임원은 보통 따로 계산합니다. 뽑을 때는 문제가 없었는데 승진을 안시키면 말짱 도루묵이니까요. 장애인 비율을 공개하기도 하고요. 성소수자 비율을 공개하는 기업도 있습니다. 종업원 구성이 ‘평등’이라는 가치에 얼마나 부합하는지가 기업의 사회적 책임의 출발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경우에는 대학 서열화 문제가 심각하니까, 신입사원 출신대학비율, 임원 출신대학 비율을 공개해야 할 겁니다. 책임은 '공개'에서 출발하는 것이라는 점을 여기에서 확인해 둡니다. 이런 사례도 있어요. 한국IBM은 신입사원 채용에서 성소수자에게 가산점도 준다고 하죠. 우리는 이런 식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겠다고 나서는 기업 또 없나요? 참고로, 삼성전자는 지난해 장애인 의무고용 인원의 59%만 고용하여 62억원을 부담금으로 때운 기업(부담금 액수 1위)입니다. 삼성 입장에서는, 최소한 이번 기회에 ‘한국 사회의 대학 서열화와 삼성의 책임’에 대해서는 고민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바라건데, 이런 생각들이 이어져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특히 대학 서열화 문제와 관련하여) 다시 한 번 환기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