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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기고_mass media

[기고] 공약집에 빠진 표현의 자유

by transproms 2013. 3. 27.

공약집에 빠진 표현의 자유



유권자 처지에서, 각 대선 후보 홈페이지를 샅샅이 뒤져보고 공약집도 읽어보았다. 죽 훑어보니, 경제민주화와 복지가 최대의 화두인 모양이다. 


고개가 갸우뚱한 대목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부디 공약한 내용이라도 확실히 지켰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앞섰다. 그런데 조금 이상한 것은 ‘표현의 자유’에 관련한 공약이 거의 없다는 점이었다. 지난 몇 년간 가장 후퇴한 문제가 표현의 자유라고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불만일 수밖에 없었다.


안보나 국익 운운하며 표현의 자유가 반사적 이익 정도에 불과한 것처럼 여기는 사람들이야 논외로 하더라도, 스스로 진보라 여기는 사람들조차 표현의 자유는 부차적이거나 철 지난 문제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물론 사회권·환경권·평화권 같은 새로운 인권문제에 눈을 떠야 한다. 교육·주택·의료·일자리 같은 복지문제나 환경·평화 문제 등을 ‘인권’의 시각에서 재조명하는 것은 중차대한 과제이다. 그렇다고 해도 표현의 자유는 결코 철 지난 문제가 아니다. 


복지가 화두로 등장한 것은 좋은 일이지만, 복지정책이 수립되고 시행되는 과정에서 복지의 주인들이 소외되고 단순히 복지 서비스의 고객으로 전락한다면, 그 정책은 실패하거나 왜곡될 가능성이 높다. 일찍이 독일의 사회철학자 하버마스가 복지국가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자유 보장과 자유 박탈의 양면성”을 지적한 것이 바로 이 대목이다. 사회·경제적 약자들을 보호해 더 많은 자유를 주겠다면서, 그들의 ‘목소리’가 자유롭게 소통되고 사회·정치적 합의에 이르는 과정을 간과한다면 오히려 자유가 줄어드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경고였다. 그래서 복지정책은 시혜적인 관점이 아니라 주체의 관점에서 사고해야 하며, 복지의 수혜자이자 주체인 사회·경제적 약자들이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권리의 보장이야말로 복지정책의 중요한 선행조건이다. 즉, 복지의 구체적인 결과물도 중요하지만, 권리의 주체들이 자신의 절절한 목소리를 자유롭게 내고 그 과정을 통해 여론이 형성되고 의견이 집약되어 정책으로 구현되는 과정이 반드시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비정규직 노동자의 권리를 보장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비정규직 노동자가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권리를 부차적인 문제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 반값등록금으로 학생들의 부담을 덜어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학생들이 대학 문제에 대해 자유롭게 말할 권리가 경시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서 화려한 정책들을 제시하면서 최근 몇 년 동안 퇴행한 표현의 자유 문제에 무관심한 후보들을 신뢰할 수 없다. 지금도 그 기조는 바뀌지 않았다는 ‘줄푸세’의 ‘세’는 ‘법질서를 세운다’는 뜻이었고, 그 실체는 약자들의 무분별한 불법시위 등을 엄단하겠다는 것이었다. 


복지가 절실한 사람들의 절절한 목소리에 귀를 틀어막고 있는 사람들이 말하는 복지의 실체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사회·경제적 약자들의 목소리를 외면한 채 국가가 선물 주듯이 제공하겠다는 식의 복지의 실체 말이다. 


지난 몇 년간 가장 후퇴한 그 자유


물론 이념적으로 좀 더 왼쪽에 있는 후보들은 표현의 자유에 대해 상대적으로 진일보한 견해를 보이고, 몇 가지 눈에 띄는 공약이 없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인터넷 실명제를 추진했던 것이나 시위 농민이 사망했던 것, 그리고 언론사를 상대로 명예훼손을 제기하곤 했던 것도 역대 가장 자유주의적이었다는 참여정부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좌우를 막론하고 국가권력은 언제나 민초들의 목소리를 불편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표현의 자유가 지닌 가치에 대한 사회·정치적 합의와 정치권력의 확고한 의지가 없다면 이 문제는 언제든 뒷걸음질 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더 많은 복지를 약속하거나 경제민주화의 확고한 의지를 밝히는 후보보다, 복지와 경제의 주체인 시민들의 언로를 확실하게 보장하겠다고 약속하는 후보를 찾아보려 한다. 저잣거리 시민의 이야기가 국정에 반영되는 소통의 메커니즘이 확실히 보장된다면 복지나 경제민주화는 자연스럽게 따라오기 마련이다. 더 많은 복지와 단호한 경제민주화도 좋지만, 그것을 주장할 민초들의 ‘입’을 틀어막지 않겠다는 약속도 필요하다. 먹고 살기가 어려워서 거리로 내몰린 사람들이 인터넷에서 자유롭게 떠들고 청와대 앞에 가서 자신의 불만을 마음껏 이야기할 수 있는 바로 그 ‘자유’말이다. 



시사IN, 272호, 2012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