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위안부와 학문/표현의 자유> 


1. 표현의 자유에 대한 한계

표현의 자유에 대한 ‘한계’(limitation) ‘제한’(restriction), 또는 ‘예외’(exception)로는 보통 다음이 언급됩니다.


- 자유권규약: 타인의 권리(명예) 침해, 국가안보, 공공질서, 공공보건, 도덕
- 미국: 폭력(범죄) 선동, 실제 위협, 싸움을 거는 말(fighting words), 외설, 아동포르노, 명예훼손, 사생활침해, 감정적 스트레스에 대한 의도적 침해, 상업·정부·학생의 표현 중 일부, 국가안보, 군사기밀 관련 표현 등


이런 요건에 대해서는 넓은 의미의 규제(형법, 민법은 물론 대학 학칙 등에 의한 규제 등)가 가능하다는 것이지 죄다 형사처벌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실제로 명예훼손이나 사생활침해에는 형사처벌이 불가하다는 것이 국제기준과 인권단체의 입장이고요.


민사건 형사건, 명예훼손에 국가가 개입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타인의 ‘권리’인 ‘명예’를 훼손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인끼리의 문제라고 해도 권리 침해가 발생하면 국가 개입이 필요한거죠. 물론 타인의 권리 침해를 허울좋은 명분으로 삼아서 표현의 자유를 위축시킬 우려가 있기 때문에 (예컨대, PD수첩 보도에 대해 ‘장관’이 자기 명예가 훼손되었다고 소송을 제기한 적이 있죠) 명예훼손에 대한 개입이 무한정 허용되는 것은 아니겠고요. 실제로 이러한 남용 제약하는 원칙도 여러 가지 있습니다. 공적 관심사에 해당하고 공적 토론을 불러일으키려는 차원에서 제기된 표현이라면 명예훼손 적용을 배제하는게 대표적이죠.


즉, 학문적인 저술도 명예훼손에 해당하면 민사구제가 가능하다는 것이 국제기준이고 표현의 자유 NGO들의 입장도 다르지 않습니다. 물론 민사구제 ‘범위’에 대한 입장은 차이가 있습니다. 실제로 미국의 ACLU 같은 표현의 자유 근본주의자들은 민사배상의 범위도 매우 좁게 인정하죠. 저도 ACLU 정도는 아니지만, 연구자/일반인 평균에 비해서는 그 범위를 상당히 좁게 보는 편입니다.  되도록이면 학문의 자유에 유리하게 해석해야 한다는 생각이고요. 요컨대, 학문에 대한 법적 규제는 가능/불가능의 문제가 아니라, '범위'의 문제일 뿐입니다. 


2. 제국의 위안부: 학문/표현의 자유 vs. 권리 침해


<제국의 위안부> 건은 꽤 복잡한 사안입니다. 일단, 그동안 위안부에 대한 시각이 너무 고정적이고 단순했다는 비판이라면 학문의 자유에 해당할 겁니다. ‘위안부 문제를 다면적으로 보자’는 것은 학문적 문제제기일테니까요. 여러 위안부들의 감정/입장이 균질적이거나 일관되지 않는다는 지적, 시간이 지남에 따라 위안부들의 생각이 바뀌기도 했다는 지적, '위안부 중에는 일본의 협력자라고 생각한 사람도 있었다'는 점에 대한 환기 정도라면 얼마든지 학문의 자유에 해당할 수 있습니다. 일본국이 아닌 제국의 시각에서 봐야 한다는 것이나,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을 묻기 어렵다는 것 역시 ‘하나의 주장’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학문의 자유의 보호범위에 있습니다. 찬성하지 않아도 논박하면 되는 문제입니다. 저는 이 책의 결론과 전반적인 시각에 찬성하지 않지만, 의미있는 문제제기를 담은 책이라고 봅니다. 다만, 정영환 교수의 지적처럼 (링크) 이 책이  전제하는 위안부에 대한 '이미지'가 위안부 문제의 '본질'을 호도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원칙적,이론적으로 그렇게 봐야 한다는 것인지, (협상)전략상 일본을 설득하기 위해 그렇게 봐야 한다는 것인지도 불분명하고요. 하지만 이런 문제들은 모두 '토론'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들입니다.


하지만 “일본제국에 대한 ‘애국’의 의미”, "제국의 피해자이면서, 구조적으로 함께 국가 협력(전쟁 수행)을 하게된 '동지'의 측면을 띤 복잡한 존재", "피해자이자 협력자라는 이중적인 구도", "기본적으로 군인과 '동지'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식의 단정적인 서술은 학문의 자유에 입각한 표현이라고 하기에는 피해자(개인과 집단)의 명예를 지나치게 침해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소녀상으로 대표되는 위안부에 대한 이미지를 비판하면서, 위안부에 대한 나름의 이미지를 단정적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근데 이렇게 제시된 이미지가 이미 고통받고 있는 할머니들의 명예를 훼손하고 있다면, 바로 이 지점에서 학문/표현의 자유의 '한계'에 부딪히게 되는 겁니다. 또한 그런 그런 표현을 사용해서 위안부 생존자들을 모욕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저자의 주장(법적 책임 불가론 등)을 펼칠 수 있다는 점에서, 법적 개입이 학문의 자유를 침해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됩니다. 물론 저자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 있고 그 점은 연구자인 저로서도 이해못하는 바가 아닙니다. 하지만 다른 개인의 권리를 침해하면서까지 학문의 자유를 누릴 수는 없습니다. 


3. 법에 의한 해결이 최선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형사처벌에는 반대합니다. 보충성원칙에도 반하고, 형사처벌할 정도의 문제는 아니라고 보고, 무엇보다 형사재판 과정에서 사태의 본질이 왜곡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가처분 결정문과 검찰의 공소장에는 간극이 적지 않습니다. 가처분 결정문은 학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으면서 일부 표현만을 문제삼으려고 하는 노력의 흔적이 역력합니다만, 검찰 공소장에는 그런 구분이 희미합니다. 형사법정에서는 학문적 논의까지 다퉈지게 되면서 논의가 왜곡되고 협소해질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명예훼손에 대한 민사소송 자체는 문제가 아니지만, 민사구제 역시 문제가 없는 건 아닙니다. 또한 민사소송(출판금지 가처분 신청과 손해배상청구)도 안할 수 있었다면 ‘더’ 좋았다고 봅니다. 소송하지 않고 피해자의 상처가 아물고 명예가 회복될 수 있다면 그것이 여전히 최선이기 때문입니다. 형사소송은 말할 것도 없고, 민사소송도 부작용이 적지 않습니다. 소송은 이기면 좋고 져도 진게 아닐 때 하는게 최선입니다. 그런데 이 소송은 이겨도 무슨 이득이 있는지 분명치 않고, 지면 더더욱 문제입니다. 표현의 자유 옹호론자들은 표현에 대한 규제는 '순교자'(martyr)를 만들게 될 뿐이라고 경고하곤 합니다. 이 소송이 딱 그런 사례에 해당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소송은 다양한 논점을 합법/불법, 승/패 이라는 이분법으로 몰고 갑니다. 이 논의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누구든 한 쪽에 몸을 실을 수밖에 없습니다. '책의 주장에 반대하지만, 처벌에도 반대한다'고 외쳐봐야, 소송이라는 무대는 한 편에 선 사람들이 '하나'인 것처럼 몰아붙입니다. 설사 명예훼손이 인정되었다고 해도 그것이 이 책의 정당성을 훼손하는 것은 아닙니다. 판사는 명예훼손이라고 판결하는거지, 책의 학문적 가치가 부족하다는 판단을 하는게 아닙니다. 거꾸로 명예훼손이 인정되지 않았다고 해도, 그것이 이 책의 정당성을 보증하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그건 별도의 문제입니다. 하지만 만약 합법이라는 판결이 나온다면 사회는 "법원이 이 책을 지지했다"고 해석하겠죠. 판결문에는 명예훼손이 아니라고만 적혀 있는데 말이죠. 결국 소송이 진행되면 모든 논점을 빨아들여 법정만 쳐다보게 만들고, 수년에 걸친 공방 끝에 결론이 나와도 어차피 이 책에 대한 토론은 별도로 다시 해야 합니다. 이렇게 소모적인 일이 또 있을까요? 피해자의 심적 고통과 그로 인한 권리 충돌 문제 때문에 '당사자가 원하는 한 민사구제를 받겠다는 것을 뭐라고 할 수는 없다'고 하는 것이지, 소송은 어떻게든 피해야 맞습니다. 지금이라도 말이죠.


하지만, 어찌되었건 피해자 할머니들이 소송 의사를 밝힌 이상 그 자체를 문제 삼을 순 없습니다. 그건 피해자의 당연한 권리이고, 피해자의 고통이 충분히 인정될 수 있으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머니들께 소송을 권하거나 지원하는 대신, “저희가 함께 싸우겠습니다. 저희가 나서서 논박하겠습니다”라고 지지와 연대를 보내는 것은 왜 선택지일 수 없었는지 의문입니다. 저는 애초에 소송기획은 재고되었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이 소송에 관여한 분들께는 이 문제를 꼭 얘기해보고 싶습니다. 과연, 우리가 이 책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소송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을까요? 소송이 할머니들의 명예를 회복하는 최선의 길이었을까요?


제가 할머니들과 꾸준히 교류해온 사이였다면 소 제기 이전에 어떻게든 소송을 하지 마시자고 말렸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런 시기는 지나간 것 같습니다. 저자 측이 먼저 손을 내밀지 않는 이상 할머니들에게 소 취하를 제안하기는 힘들어졌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4. 법적 해결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책임감

법적 해결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책임감에 대해서도 꼭 생각해봐야 합니다. 법적 해결에 반대한다면, 

1) '학문의 자유가 우위에 있으므로 피해자의 명예가 훼손되어도 어쩔 수 없다’는 것인지

2) '명예훼손은 맞지만, 법이 아닌 다른 해법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것인지 

3) '이 책이 피해자의 명예를 훼손하고 있지 않다’고 보는 것인지


를 먼저 해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선택지이건 피해자 할머니들이 (그것이 왜곡해서 이해한 결과이건 아니건 상관없이) 심적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분들은 아마 없을 겁니다. 그렇다면 법적 해법이 아니라 다른 어떤 방식으로 그 고통을 함께 짊어질 것인지도 함께 고민해야 합니다. 그래서 '법적 해결에 반대한다'는 것은 결코 편안하고 ‘쿨’한 입장일 수 없습니다. 그 입장은 곧 피해자들을 지지하고 연대하면서 그 고통을 함께 나눠지겠다는 실천적 ‘결의’여야 하니까요. 실로 무거운 책임감이 어깨를 짓누를 수밖에 없는 실존적 결단이어야 하니까요.


그런 점에서, <제국의 위안부의 형사 기소에 대한 지식인 성명>(성명서1 - 링크1, 링크2)에는  선뜻 동의하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처벌에 반대한다는 데에 따른 윤리적 책임감을 느낄 수 없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정진성 교수 등이 참여한 성명서(성명서2 - 링크) 역시 형사처벌에 반대하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그 명의는 “형사기소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아픔에 깊이 공감하고, 위안부 문제의 정의로운 해결을 위해 활동하는 연구자와 활동가 일동”입니다. 성명서2는 그런 명의를 내걸고 형사기소에 반대하고 있습니다. 성명서2에 동참한 윤정옥 교수와 정진성 교수는 (책의 주요 비판대상인) 정대협 대표를 역임하셨던 분들이고, 그 외에도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헌신해온 분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글자 하나하나에도 기소에 반대하는데에 따른 고통과 무거운 책임감이 느껴집니다. 성명서2에 서명하자는 제안을 받았을 때, 저는 “정의로운 해결을 위해 활동하는 연구자”라고 참칭하기가 부끄럽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래도 결국에는 '그렇게 활동하겠다'는 ‘다짐’으로 이름을 넣어달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냥 가볍게 ‘처벌에 반대한다’고 말하기에는 무거운 책임감이 어깨를 짓눌렀습니다. 이 문제는 그런 사안이라고 생각합니다.


* 한 가지 더 덧붙이자면, 어떤 분들은 정대협의 입장이 졸속/편향되어 있고, 박유하 교수가 성실한 조사연구를 통해 새로운 사실을 밝혀냈다는 식으로 이해하시더군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물론 정대협의 활동은 ‘운동’이었기 때문에 문제를 다소 단순화시킨 측면이 있을 수는 있습니다. 저도 관련 연구자가 아니라서 섣불리 판단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제가 아는 한, 정대협 관계자들이 ‘대충’ 연구해 놓고 주장만 쎄게 한 것은 절대 아닙니다. 정대협 운동에는 엄청난 자료 수집과 치밀한 연구가 바탕이 되었음이 간과되어서는 안될겁니다. ‘공개토론’을 제안한 것은 이런 자신감에서 나온 것이기도 합니다.


** 본문에서는 '내용'과 '입장'이 아니라 '표현'이나 '수식'이 문제라는 식으로 구분을 했습니다만, 사실 이게 그렇게 날카롭게 구분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표현이나 수식을 문제삼는 것도 결국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거라는 지적은 예리합니다. 실제로 김인규 교사 음란물 판결 때도 대법원은 '저자의 의도는 이해하지만 굳이 그렇게 극단적으로 알몸을 내놓고 표현할 필요는 없었기 때문에 음란물'이라는 취지로 유죄판결을 했었죠. 저는 이 판결에 매우 비판적입니다. 내용과 의도 뿐만 아니라 '표현방식'도 표현의 자유에 속한다고 보기 때문이죠. 그런데 이 음란물 판결에는 권리를 침해당했다고 주장하는 피해자가 없습니다. 그냥 그 그림을 보고 막연히 기분이 나쁘다고 주장하는 불특정의 사람들이 존재할 뿐이고요. 그래서 이 문제에서는 표현의 자유가 우위에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표현의 자유는 막연한 불쾌감 따위의 논거로 제한되어서는 안됩니다.

하지만 제국의 위안부 사안에서도 표현만 문제삼는 것은 부당하다는 주장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안을 어떤 표현에 담는가 역시 저자의 표현의 자유니까요. 그 문제의 표현들은 아마 저자가 숙고를 거듭한 결과이고, 사태의 본질을 가장 적실하게 담고 있다고 판단되어 선정된  '표현'일 겁니다. 애착도 있을 것이고 쉽게 포기할 수 없을 겁니다.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그 표현이 피해자의 명예권을 침해하고 있다면, 그건 권리 충돌의 문제가 되고 어느 한쪽이 양보해야 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저는 웬만하면 표현의 자유가 우위에 있는 쪽으로 해석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지만, 이 사안에서는 피해자의 고통이 너무나 분명하다고 생각됩니다. 이 점을 도외시하고 학문의 자유만 배타적으로 적용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Posted by transproms

댓글을 달아 주세요

[한겨레 단독] 로스쿨·사시 출신 모두 ‘부유층 자녀’ 늘어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696927.html


이재협 교수님이 이 연구를 하신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드디어 결과가 나온 모양. 정말 중요한 연구라고 생각합니다. 빨리 원문 전체가 공개되었으면... 암튼 제 잠정적인 생각은 이렇습니다.


1. 이 문제에 관련해서 나의 추론은, "로스쿨에서 사회계층이동이 원활하지 않다는 것은 맞는 얘기지만, 이건 사시 막판에도 이미 나타났던 현상이라는 것"이다. 즉, 사회계층이동 문제는 로스쿨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사회 전반의 문제이며, 설사 로스쿨 도입 없이 사시가 유지되었어도 비슷한 문제가 나타났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이걸 입증하려면 사시/로스쿨 비교연구가 절실했는데, 이 논문이 바로 그 연구를 수행한 것이다. 그리고 내 추론과 같은 결과가 나왔다. 


* 이건 수능체제가 문제 많다고 학력고사로 회귀하면 사회계층이동 문제가 해결될까? 의 문제와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이 문제에 관련해 '자기 경험'을 절대화하곤 한다. 예컨대, "내가 연수원 다닐 때는 말이야...." 이런 식의 접근으로는, 사시와 로스쿨의 차이 못지 않게, 1990년대 사시와 2010년대 사시의 차이도 크다는 것을 간과하기 쉽다. 그래서 동일 시기의 양 제도를 비교하는 이런 연구가 필요했던 것.


2. 암튼, 이 연구의 결론에 따르면, 사회계층이동을 위해 사시로 회귀하자는 것은 타당한 얘기가 아니다. "로스쿨=귀족학교", "사시=계층이동 희망사다리"라는 공식도 전혀 맞지 않다. 제발 이 근거 없는 공식은 그만 사용했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로스쿨제도를 유지한 채 사시로도 일부 법조인을 양성하자는 주장"(사시 존치론)은 여전히 의미가 있다. 사시와 로스쿨 두 제도는 사회계층이동에 있어서 각각의 장점과 약점이 있기 때문에, 두 제도가 '병존'한다면, (다른 것은 차치하고) 사회계층이동의 측면에서는 가장 유리할 수도 있다. 서로의 약점을 보완해줄 수 있기 때문인데, 나의 가설에 따르면, 저소득층에게는 로스쿨이 유리하고, 중하위층에는 사시가 유리하다. (참조 http://transproms.tistory.com/130) 또한, '어느 대학을 나오건 변호사가 될 수 있는 세상'을 위해서는 로스쿨이 유리하지만, '어느 대학을 나오건 엘리트 법조인이 될 수 있는 세상'을 위해서는 사시가 유리하다. 

따라서 '사시체제로의 회귀'가 아니라, '로스쿨-사시 병존'은 충분히 검토해볼 가치가 있는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이 경우 사시 존치는 로스쿨 제도를 위협하지 않는 방향으로 셋팅되는게 매우 중요하다. 그런 조건 하에서만 말그대로 '병존'할 수 있다. 사시존치를 하려면, - 만약, 사시존치가 로스쿨을 흔들려는 목적이 아니라면 - 그 반대급부로 '로스쿨 정상화'를 보장해줘야 한다. (이와 관련한 얘기는 예전에 정리해둔 글 참조 http://transproms.tistory.com/129) 진정한 경쟁체제가 되기 위해서는, 로스쿨에서 원하는대로 해줘야 하며, 그렇게 해서 로스쿨은 로스쿨대로 그 장점을 극대화하고, 사시는 사시대로 그 장점을 극대화해야 한다는 얘기다. 더 복잡한 얘기로 흐를까봐 생략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사시보다는 예비시험이 여러모로 더 낫다고 생각한다.


3. 또한 이 논문의 결론이 "현재 로스쿨이 잘하고 있다"는 것으로 해석되는건 곤란하다. 논문의 결론은 "사시나 로스쿨이나 별반 차이가 없더라"는 것이지 로스쿨이 더 낫다는 것이 전혀 아니다. 그런데 로스쿨은 사시보다 '더 나은 제도'로서 설계된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로스쿨은 '사회계층이동'에 관한 획기적인 대안을 내놓아야 한다. 열심히 노력해도 될까말까한 문제인데, 로스쿨은 언제나 "취약계층 5% 선발'을 전가의 보도로 내세우며 이걸로 모든 책임을 다한 것처럼 이야기해왔다. 동의할 수 없다. 오히려 '사회계층이동'에 관련한 로스쿨은 사시보다 훨씬 유리'할 수도 있는' 제도다. 그렇게 운영을 한다면 말이다. 그렇게 하고 있지 않을 뿐이다.


4. 이 연구의 또다른 한계는 '전체 로스쿨'로만 통계를 냈다는 것이다. 이건 과거 참여연대 보고서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났던 문제다. 입학생의 '다양성 지표'는 전체 로스쿨로 놓고 보면 사시보다 오히려 우월하지만, 상위권 로스쿨만 놓고보면 완전히 달라진다. 예를 들어, '전체 로스'쿨을 놓고보면 다양한 학부 출신을 선발한 것 같지만, '상위권 로스쿨'만 놓고 보면 전혀 아니다. 서울대의 경우, 6년 내내 150명 정원을 서울대 약 100명, 연/고대 약 30명, 나머지 특수대(경찰대, 카이스트 등), 외국대학 출신 약 20명으로 채워왔다 (참조: http://www.lec.co.kr/news/articleView.html?idxno=33400). 나머지 상위권 로스쿨들도 별반 다르지 않다. 또한 연령을 봐도 2015년 입학생 중 31세 이하가 고려대 100%, 서울대 97.4%, 성균관대 97.6%, 한양대 96.3%이다(참조: http://www.lec.co.kr/news/articleView.html?idxno=37075). 이런 현실을 두고, '전체 로스쿨 평균을 내면 다양성이 증진되었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설득력이 있을지 의문이다. 이 부분은 이재협 교수님이 인터뷰를 통해 추가 연구를 한다고 밝혔다. 기대가 된다.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해보자. 지방대에 다니는 학생에게 "얼마든지 서울의 상위권 로스쿨에 갈 수 있으니 열심히 하면 좋은 결과 있을거다"라고 덕담이라도 건낼 수 있을까? 나이 서른이 넘은 한 직장인에게, "좋은 경력이 있으니 상위권 로스쿨에 지원해보라"고 조언할 수 있는가? 이건 정말 심각한 문제다.


5. 마지막으로 이런 통계는 연구/조사하기 이전에 로스쿨과 국가기관이 적극적으로 공개를 해야 한다. 공개를 해야 책임을 물을 수 있고 스스로 책임있게 행동하게 된다. 공개의 힘! 하버드 로스쿨 같은 데서 매년 입학생 프로필을 상세하게 홈페이지에 공개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필기시험 선발'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그걸 해체하는데에만 온 힘을 기울이고 그에 상응하는 공정성을 확보하려는 노력이 부족한 것은 정말 문제다. 비단 로스쿨 뿐만 아니라, 입학사정관제, 경력법관 선발, 공무원 경력자 특채 등 다 마찬가지.

Posted by transproms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 2015.06.22 11:2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현실적으로 사시 존치, 예비시험 가능성이 매우 낮지 않나요?
    야당이 동의해줘야 하는데 해줄지 모르겠습니다.

  2. ㅇㅇㅇㅇ 2015.06.22 13:0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예비시험은 빚좋은 개살구입니다. 결국 기록형 공부까지 학원에서 하게 될텐데요. 사법시험을 20년 정도 존치헤서 추후에 판단하는게 가장 나을듯 싶어요. 예비셤은 로스쿨 원트랙이지 결코 병존이 아닙니다.

  3. 2015.07.10 14: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영국 북아일랜드의 한 케익 회사가 "동성혼 지지" 메세지가 담긴 케이크 주문을 거절했는데, 법원이 '성적지향에 대한 차별'이라는 결정을 내렸다고 하네요.


Northern Ireland bakers guilty of discrimination over gay marriage cake

http://www.theguardian.com/society/2015/may/19/northern-ireland-ashers-baking-company-guilty-discrimination-gay-marriage-cake?CMP=share_btn_fb


기사에 보면, 판사가 이 케익 가게는 "a religious organisation"이 아니라고 설명하는 대목이 나오는데요. 그건 영국 평등법(차별금지법)이 성적 지향에 대한 차별에 대하여 종교조직을 면책하는 조항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회사가 가족회사고 가족들이 종교적 신념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종교기관'이라고 볼 수는 없다는 것이 판결의 핵심. 종교적 색채가 강한 사기업이 많은 우리 현실에서도 참고할만한 판례네요. 한국에는 이러한 차별금지법도 예외조항도 없어서 단순비교는 어렵습니다만....


Posted by transproms

댓글을 달아 주세요

서울대 로스쿨 신입생 18%, 가구소득 2000만원 미만  / 조선일보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5/05/16/2015051600011.html


흥미로운 기사네요. 한편으로 제가 주장하던 바와 일치합니다. "저소득자에게 로스쿨은 오히려 유리한 제도다." 하지만 여전히,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로스쿨은 중(하)위 소득자에게 심각한 진입장벽이 있다"라는 것도 입증하는 자료인 듯 합니다. 로스쿨 진학을 지도했던 제 경험상, 로스쿨 진학을 결심하는데 있어서 상당한 어려움을 겪는 것은 중(하)위소득자입니다. 저소득자들에게는 (특히, 고시에 비해) 오히려 기회가 있고요.


기사에 따르면, 신입생 152명 중 93명이 장학금을 신청했고, 이 가운데 가계소득이 2천만원 이하가 28명, 2천-3천만원이 7명, 3천-4천만원이 5명, 4천-5천만원이 5명, 5천-6천만원이 1명. 기사대로라면, 152명 중 106명의 가계소득이 6천만원 이상이라고 '추정'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예전부터 주장한, 소득 2천-5천만원 정도의 애매한 중하위 소득 가정에게 심각한 진입장벽이 있다는 것이 어느 정도 맞을 수 있을 겁니다. 전체 가구 중 소득 2천-5천만원 가구가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한 데에 비해, 이 가구에 속하는 학생의 비율은 훨씬 적은 것(152명 중 17명?)으로 추정되니까요.


예전에 썼던 제 글 참조: "로스쿨과 사법시험 - 중위소득자에 대한 진입장벽의 문제"
http://transproms.tistory.com/130


물론, 중위 소득자 가운데 사정에 의해 장학금 신청을 안한 사람도 있을 것이고, 기타 여러 변수가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은 잠정적인 추론에 불과함을 감안해주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이 정도의 자료를 놓고, 기사 제목처럼 "서울대 로스쿨 신입생 18%, 가구소득 2000만원 미만"이라는 사실에만 주목하는 것은 곤란하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오히려 이런 자료라면 "서울대 로스쿨 신입생 중하위 가구소득자 거의 없어..."라는게 더 핵심인 것 같은데 말이죠. 가구소득 2천만원 미만인 사람이 18%나 차지하는 상황에서  '귀족학교'라는 식으로 공세를 퍼붓는 것은 어이 없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현재 로스쿨이 사회계층이동문제에 있어서 사회적 책임을 다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지 않나 합니다. 적어도 저 기사에 나온 자료를 토대로 보면 말이죠.


Posted by transproms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ghtn 2015.06.01 14: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현재 사법시험통과자의 소득수준에 대한 조사가 없어 유감스럽네요.
    이런 사실은 로스쿨은 돈스쿨이다란 것을 입증하기 위한 데이터로 삼기 위한 기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3%의 관문을 통과하기 위해 저소득층에서 아무런 부담없이(경제적 부담, 실패후 취업에 대한 부담) 정말 부자들과 경쟁할 수 있을까요? 절대 못합니다. 시험장까지는 가는 것이야 가능하겠지만, 거기까지의 과정이 결코 공정하지 못합니다. 아마도 저소득층의 사시패스는 3%에도 미치지 못할 겁니다. 그 과정을 통과한 가난한 자가 있다면 그것은 기적이고 영웅입니다. 왜 가난한 사람들은 기적같은 삶을 살아야 합니까? 물론 그런 분들 많이 있습니다. 로스쿨은 사회적 배려를 위한 특별전형을 의무화하고 있고, 장학금도 그런 사람들을 위해 집중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니 가난하지만 법조인이 꼭 되고 싶은 사람은 평소에 열심히 공부해서 로스쿨에 가는것이 훨씬 쉽고, 확률도 높습니다. 사법고시와 달리 대학수업을 때려치지 않아도 되고 오직 학부과정을 열심히 공부하면 됩니다. 위에 기사는 통계적으로 로스쿨의 구성분포가 특별하지 않으며 오히려 다소 저소득층이 많다는 의미입니다. 이 기사를 비판하기 위해서는 사법고시통과자의 소득을 끌어내서 비교해야 합니다. 사실에 근거한 비판.... 그것을 말해야죠. 그것도 몇몇을 인용한 통계가 아니라 전체통계에 근거한....

    • transproms 2015.06.02 05:5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사시와의 비교연구가 중요하다는 것은 저도 크게 공감합니다. 그래야 제대로된 조사/연구가 되겠지요. 안그래도 저도 동료 연구자들이 서도 사법시험 합격자와의 비교연구를 추진했었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관련 자료를 얻기가 쉽지가 않더군요;;

      하지만, 저 통계가 "저소득층이 많다는 의미"라는 분석에는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불완전한 통계지만, 저 통계에 따르면, 저소득층은 인구비례만큼 합격하지만, 중하위소득자는 인구비례보다 많이 부족하다고 해석하는게 맞다고 봅니다. 그렇지 않으면 중하위소득자들이 장학금 신청을 거의 하지 않았다는 것인데 (외부 장학금을 받는다거나 하는 이유로...) 그럴 가능성은 많지 않아보입니다. 암튼 저도 잠정적으로밖에 말씀드릴 수 없고요. 이 문제에 대한 정확한 자료는 서울대 로스쿨이 내놓아야 한다고 봅니다.

  2. ghtn 2015.06.02 17: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서울대 로스쿨에서 자료를 내놓을 것이 아니라... 사시존치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사법시험합격자의 소득분포를 제시하고 비교분석해야 하지 않을까요? 법무부에서 제출해야 하겠죠. 사법연수원에서 연수생들한테 비용을 부담시키고 운영한다면 어떤 사람들이 다닐 수 있을까요? 님말씀대로 사시나 로스쿨이나 사회구조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그과정을 통과하기는 양쪽이 다 어렵습니다. 이미 대학입학때부터 많이 걸러졌을 겁니다. 차라리 대학입시때보다 불평등이 심화되었는 데이터를 제시함이 옳은 방향입니다. 로스쿨도 사시처럼 비용대주면 어떨까요? 연수원처럼.... 정책적으로 못할 이유도 없습니다. 연수원에 1년에 800억을 넘는 돈을 써도 지금까지 아무말 없었잖아요. 로스쿨의 핵심은 돈문제가 아니라 법학교육의 정상화입니다. 평소에 열심히 준비한 사람들만 갈 수 있는 .... 이것이 입시의 이상적 모습 아닌가요? 국가에서 로스쿨비용을 부담할때, 아니면 절반이라도 부담한다면 이런 논쟁은 사라질 겁니다. 연수원에 들어가던 절반의 비용만 부담한다해도... 로스쿨 비용문제는 출발점에서 정책적 실수로 빗어진 문제입니다. 우리도 서울근교에서 월세살면서 등록금 대출로 감당하면서... 대학다니는 동안 자기관리, 과외로 생활비 벌면서 서울대로스쿨 합격했습니다. 합격자들 대부분은 재산의 결과가 아니라, 자기관리와 노력의 결과입니다. 문제들을 잘못 짚었습니다. 정말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다면 국가지원부터 논해야 합니다.

    • transproms 2015.06.03 00:0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는 로스쿨이 그런 취지로 추진되었고 또 그렇게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현실이 그 본래 이상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일 뿐이죠. 제도 자체를 무너뜨리려는 비판과 제도 자체를 개선하려는 비판을 구분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대학 입학 때부터 문제를 짚어야 한다는 말씀에는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이미 한국사회는 전 생애주기를 통해 눈에 안보이는 불평등을 극복하기 어려운 상황으로 돌입했습니다. 저는 이 책임을 마치 로스쿨에'만' 있는 것처럼 비판하는 것은 맞지 않다고 봅니다.

      저는 로스쿨 비용을 국가에서 부담하는 것은 반대입니다. 진입장벽은 낮춰야겠지만, 변호사양성교육은 당사자 부담으로 하는 것이 맞다고 봅니다. 변호사양성교육을 국가가 부담해야 한다면, 거의 유사한 수준의 공익성을 갖는 다른 직업교육(예컨대 의사)도 모두 국가가 비용을 부담해야 형평에 맞을 겁니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후불제나, 공익활동 조건부 등록금 면제 등 자기부담원칙을 유지하면서도 진입장벽문제를 해소할 수 있는 좋은 방안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리고 자료 공개 문제는 사법연수원보다는 로스쿨의 책임이 훨씬 큽니다. '성적'으로만 뽑는 곳에서야, '우린 성적으로 뽑았다'고 하는 항변이 타당할 수 있습니다. 시험관리가 철저했음만 증명하면 어느 정도 면책이 됩니다. 하지만 성적 이외의 다양한 요소를 고려해야 하는 전형을 실시하는 곳에서는 불필요한 차별적 요소가 개입하지 않았음을 스스로 증명해야할 사회적 책임이 있습니다. 예컨대 전체 인구 대비 소득 분포, 여성 비율, 장애인 등 소수자 비율 등이 입학생 분포와 비슷하다는 것을 보여주거나, 다양한 대학 출신들이 차별없이 입학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자료를 공개해야 합니다. 하버드 대학 등 해외 유수 대학들이 홈페이지에 그런 자료를 상시 공개하는 이유가 다 있습니다. 이 블로그의 "잡문" 카테고리에 있는 저의 다른 글들을 참조해주시기 바랍니다. "학술논문" 카테고리에서 다운 받을 수 있는 "로펌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글에도 관련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판사들이 뽑은 필독서 10권이라고 합니다.


<가인 김병로 평전>, <블랙먼, 판사가 되다>, <블루 드레스>, <정의란 무엇인가>, <정약용, 조선의 정의를 말하다>, <레미제라블>, <설득의 심리학>, <어떻게 원하는 것을 얻는가>, <너의 내면을 검색하라>, <깊은 강>


http://www.huffingtonpost.kr/2014/06/05/story_n_5449885.html?utm_hp_ref=tw


<정의란 무엇인가>가 포함된 것이 눈에 띄네요. <정의란 무엇인가는 틀렸다>(미지북스, 2012)라는 책을 쓴 이한 변호사는 머리말에 이런 재밌는 일화를 적어 놓았습니다.


"어느 날 판사인 친구와 대화를 나누던 중에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화제에 올랐다. 그런데 놀랍게도, 친구뿐만 아니라 그 주위의 많은 판사들이 샌델의 책을 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대부분의 판사들이 그 내용에 공감하고 깊이 감화받았다고 한다. 한 판사가 '판결을 내릴 때 공동체의 미덕을 어떻게 진작시킬까를 기준으로 고민을 많이 한다.'고 말하자 다른 판사들도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샌델이 들었다면 무척 기뻤겠지만, 나는 큰 위기감을 느꼈다. 사법부의 판사들은 헌법과 법률에서 정한 ‘권리’의 공식적 수호자들이다. 그들이 특정 사안에 관련된 개인의 권리를 ‘미덕’을 진작시킬 목적에 맞추어서 주조하고 바꾸고 뒤집는다면, 더 나아가 입법부와 행정부, 그리고 일반 국민들은 시민의 권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심각하게 걱정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저도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개인적으로 센델의 정치철학은 우리 사회의 정치적 담론의 기초로 삼기에 너무 허술하고 위험한 사상이라고 봅니다. 특히, 한국 특유의 '직관적 사고'와 결합했을 때는 그 위험성이 몇 배 증가하죠. <정의란 무엇인가>는 정치철학 교양입문서로 위장되어 있지만, 사실은 센델 자신의 정치철학을 옹호하기 위해 치밀하게 계산된 책입니다. 뒷부분에 가면 그런 검은(!) 의도가 서서히 드러납니다. 하지만 이 책의 폐해를 그리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는, 100만부가 넘게 팔린 책이긴 하지만 실제로 끝까지 읽은 사람은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참 다행(?)스러운 일이죠 ... @.@ 근데 판사들 중에서는 읽는 것이 직업이라서 그런지, 이 책을 끝까지 읽은 분들이 많은 모양입니다. 이 책을 읽은 판사들이 "공동체의 미덕을 어떻게 진작시킬까를 기준으로 고민을 많이 한다"는 결론을 도출했다면, 그것이야말로 센델이 진정으로 이 책을 통해 주입시키고자 했던 교훈에 100% 일치합니다. 한국의 판사들이 이 책을 읽고 공동체의 미덕을 생각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센델에게 알리면, 아마 크게 기뻐할 거니다 ㅎㅎ 하지만, 저의 관점에서는 정말 위험한 교훈이 아닐 수 없습니다 ㅠㅠ 여하튼 판사들이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고, "공동체의 미덕"을 생각한다면 이건 정말 큰 일입니다.


저는 여전히 자유주의의 논법은 특히 판결의 논증구성에서 매우 큰 가치를 지닌다고 봅니다. 자유주의적 추론은 각 개인의 인권을 존중하면서도 정치공동체가 합의할 수 있는 최적의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고, 한계가 없진 않지만 웬만해서는 그 한계의 극단까지 밀고가기 힘들 정도로 자기정당화의 기제가 강력합니다. 그런데 센델은 자유주의가 매우 허약한 기반 위에 서 있는 것처럼, 대충 편파적으로 소개해 놓고, 신나게 비판을 가합니다. 전형적인 '허수아비 비판'이죠. 자유주의의 정당화 논리를 극대화시켜 놓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한계를 지적한다면 그건 의미가 있습니다. 근데 이렇게 허수아비 비판으로 공략을 해버리면 별 의미가 없고, 정치철학적 논증훈련에도 별 도움이 안됩니다. <정의란 무엇인가>는 그런 점에서 정치철학 입문서로서 그다지 적절치 않은 책이라고 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 정치철학의 3대 사조(공리주의, 자유주의, 공동체주의)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은 이 책의 큰 장점입니다. 실제로 킴리카의 <현대정치철학의 이해>(동명사, 2008) 같은 책도 매우 훌륭한 정치철학 저서이지만, 대중적으로 권하기는 어려운 책이거든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더라도, 롤즈나 드워킨 등 현대 자유주의의 정수를 보여주는 저자들의 책을 함께 읽는다던가, 위에서 소개한 <정의란 무엇인가는 틀렸다>와 비교해서 읽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 외에도 <무엇이 정의인가>(이택광 외, 마티, 2011)에 실린 일부 글과, 좀 더 학술적인 책이지만 <자유주의적 정의: 센델의 정의 담론 비판>(염수균, 조선대학교 출판부, 2012)도 읽어볼만 합니다. 


센델의 저작 중 <왜 도덕인가?>왜 같은 칼럼집이나,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같은 대중저술도 무척 재밌긴 합니다. 이 양반이 책은 참 잘 써요 ^^ 강의도 참 잘하고요. 특히,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은 돈으로 환원될 수 없는 가치의 중요성에 대해 나름대로 잘 설명해놓고 있는 책이죠. 이 책을 읽고 '돈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현실'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는 것까지는 나쁘지 않습니다. 문제는 이 책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설득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좀 심하게 얘기하면, "왜 돈으로 사면 안되는데?"라고 물을 때, 센델은 "원래 돈으로 사면 안되는거야"라고 답하는 수준을 넘지 못하거든요. 좀 더 나가면, "돈으로 사면 안되는 것이 원래 존재하니까 그것이 무언인지 함께 토론해보자"는 정도? 이런 식으로는 공론영역에서 논쟁을 벌이는데 도움이 전혀 안됩니다. 정치철학이라는 것은 공적인 문제에 대해 합리적 토론을 해나가는 '방법'을 제시해주는 것인데, 센델의 주장에는 그 방법이 전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역시 좀 심하게 얘기하면, "하여간 우리는 관심을 갖고 토론을 해야 한다"는 식이거든요. 반면에 자유주의나 공리주의는 우리가 어떤 논점으로 어떻게 토론을 해야 할지를 나름대로 제시하는 이론체계입니다. 자유주의와 공리주의를 통해 정치철학적 논증과 추론의 방법을 시민들이 습득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민주주의의 수준을 높일 수 있는 길이라고 봅니다. 이 점에서 센델의 주장은 거의 기여하는 바가 없습니다. 기껏해야 자유주의가 처해있는 일부 난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참고로 이 점은 주로 <정의의 한계>라는 책에 서술되어 있습니다.


여튼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고, "우리 공동체의 미덕을 증진시키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겠다"는 식의 결론을 도출하는 것에는 많은 문제가 있다는 점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습니다.

Posted by transproms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2014.06.17 01: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 transproms 2014.06.27 03:3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감사합니다^^ 조언에 따라 적절히 수정했습니다 ㅎㅎ 어쨌거나 센델은 비판적으로 읽기 어렵게 만드는 탁월한 재주를 갖고 있습니다. 그것도 능력이긴 합니다 ㅋ

  2. 약간의여유 2014.11.08 21:1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도 셀던의 책을 읽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정의에 관해서라면 존 롤즈의 책이 더 볼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공동체주의보다는 개인주의가 미래의 발전방향에 맞을 것입니다. 공동체의 가치를 위해서 개인을 희생해도 된다가 아니라 공동체는 개인의 행복을 최대한 보장하기 위해서 존재한다는 관념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자유론과 정의론은 아주 밀접하게 관련이 있습니다. 역시 법학적 사고에서는 벤담의 최대 다수에게 최대 행복이라는 공리주의가 통하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사고는 현재 경제학의 깊은 뿌리를 형성하고 있고요.
    많은 사람이 경제학을 비판하기도 하지만, 우리가 경제적 풍요를 누리고 있는 것도 어찌 보면 경제학의 사상적 자유옹호 덕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과거 독재시대는 자유를 억압했습니다. 또한 경제도 개인의 창의와 자유가 존중되지 않았고 정부가 주도하고 계획경제적인 성격이 강했습니다.
    진정한 민주주의자는 자유주의자였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말씀 잘 읽었습니다.


세월호 사건과 법의 역할


홍성수


세월호 사건. 저는 제가 평소 연구하던 시각에 따라 나름의 분석을 제시하는 것이 제가 이 상황에서 기여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인 것 같아, 일단 단상만 끄적거려 봅니다. 모든 사회문제와 범죄문제가 다 마찬가지지만 사법적인 접근은 중요하지만 거기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보여집니다. 


검찰수사가 본격화되고 있는데 수사도 당연히 중요하지만, 이외는 별도로 초당파적이고 거국적인 차원의 '진상규명위원회'가 설치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특히 대통령으로부터 독립적인 기구가 되어야 할 것이고요. 이 기구에서 사고의 원인이 된 모든 것들을 수십개건 수백개건 다 낱낱히 밝혀내야 합니다. 그에 따라 그 모든 원인들을 하나하나 제거할 수 있는 대책도 마련해야 하고요. 수사는 '개인'을 처벌하는 문제에 한정될 수밖에 없는데, 범죄는 아니지만 개인에게 책임을 물어야 하는 부분도 있고, 개인 책임 외에 '구조'의 문제인 부분도 적지 않을겁니다. 물론 강제수사권이 있는 검찰이 수사과정에서 밝혀내는 부분도 중요합니다. 예컨대, 수사에서 사고의 원인은 선장/선원의 개인적 책임을 밝히기 위한 목적으로 밝혀내는 것이긴 하지만, 수사과정에서 사고의 원인이 규명되는 것 자체도 의미가 있는 것이니까요.


언제부턴가 사회문제가 터지면 검찰이 최전선에 서는 일이 잦은데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닙니다. 이런 문제에서 수사기관과 사법부가 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지만 그건 문제해결의 일부일 뿐입니다. 사법적 처벌은 전체 문제의 한 단면만을 해결하는 것일 뿐입니다. 실제로 이번 사건도 '불법은 아니지만 고쳐야 할 관행'이 문제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것은 수사를 한다고 잡아낼 수 있는 부분이 아닙니다. 대책 마련에 있어서도, 처벌되지 않는 영역의 문제까지 파헤쳐야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할 수 있는 것이고요.


그렇다고 사법적 처벌이 덜 중요하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매우 중요합니다. 단, 그 접근방향을 잘 잡아야죠. 일단, 사고를 낸 사람을 '사후'에 처벌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사고 이전'에 안전예방규범을 어긴 사람을 처벌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번에 드러난 것처럼 여객선 관리가 이렇게 허술한데도, 사고는 자주 일어나지 않습니다. 사후에 처벌을 해봐야, "설마 내 배가 사고나겠어?"라는 생각이 만연되면 소용이 없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가끔 있는 그러나 그 피해가 엄청난 사고를 막기 위해서는 '사고 이전'에 안전예방규범을 어기는 단계부터 철저히 규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안전책임자가 일반인의 책임의식만도 못한 수준의 행동을 보였으니 개인적 차원의 엄벌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하지만 몇몇 개인에 대한 '강한 처벌' 못지 않게 여러 사람에 대한 '넓은 범위의 처벌'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눈에 뻔히 보이는 극소수의 사람에게 강한 형벌을 내리는 것에 집중하다가, 작지만 큰 책임이 있는 여러 사람의 책임을 놓치는 우를 범해선 안된다는 것이죠. 형사처벌로 범죄억제효과(deterrence effect, 위하/겁주기 효과)를 내려면, 작은 규칙이라도 어기면 관계된 모든 사람이 반드시 처벌된다는 것이 공지되어야 합니다. 예컨대, 가장 큰 책임이 있는 사람이 혼자 중형을 받는 것 못지 않게, 작은 책임이 있는 모든 사람이 빠짐없이 작은 형벌이라고 받는 것이 더 효과적일 수 있다는 얘깁니다. 그래야 나도 예외가 아니라는 생각에 안전에 책임있는 모든 사람이 경각심을 가질테니까요. (비슷한 맥락에서, 성범죄에 대한 처벌도 마찬가지입니다. 몇몇 적발된 성범죄자에게 더 중형을 내린다고 범죄가 줄어드는게 아니라, 모든 성범죄자들이 예외없이 처벌되는 것, 즉 성범죄 저지르면 무조건 잡히고 확실히 처벌되도록 하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 성범죄예방에 더 효과적이라는 것이죠.)


개인에 대한 책임뿐만 아니라 '조직적인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얘기하고 같은 맥락입니다. 특히 가장 위에 있는 책임자를 면책해선 안될겁니다. 그래야 조직적 차원에서 정신을 차리고, 조직적 차원에서 대책을 마련하게 되는 것으로 사회가 '반응'하게 되니까요. 안전문제에 관한 한 위험한 일을 다루는 모든 '조직'이 조직적 차원에서 경각심을 갖고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봅니다. 그러려면 직접 실행한 사람 외에도, 내부(관리자), 외부(감독기관)의 관리감독 책임이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책임을 묻는 구조가 되어야 하는 것이고요. 다만 형사법적 한계 때문에, 조직적인 책임을 묻는 것에는 일정한 한계가 노정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서두에 말씀드린, '불법은 아니지만 잘못된 관행'의 문제에 대한 '비사법적인 접근'이 또한 중요한 것이고요.


조직에게 책임을 묻는 문제와 관련해서는 입법적인 손질도 필요할 겁니다. 영국의 '기업과실치사 및 기업살인법'[Corporate Manslaughter and Corporate Homicide Act 2007]처럼 재해에 책임이 있는 기업 자체를 강하게 벌하거나, 미국의 '징벌적 손해배상제도'(punitive damage)를 도입하는 것도 필요해 보입니다. "안전규범을 지키지 않는 기업은 문 닫는다"는 인식이 개별 기업들에 강력히 자리잡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안전문제에 관해서는 '규제'가 반드시 필요한데, 기업의 이익에 반하지만 강제되어야 하는 '명령통제식 규제'(command and control Regulation)와 합리적으로 행동하는 기업의 경제적 유인(economic incentives)을 이용하는 '강제된 자율규제'(enforced self-regulation)가 적절히 병행될 때 최적의 효과를 낼 수 있습니다. 즉, 한편으로는 안전규범을 어긴 행위자들을 처벌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경제적 이익을 얻기 위해서는 안전규범을 지켜야 한다는 동기가 제도적으로 부여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 형사처벌이 갖는 표퓰리즘에 대해서는 "형벌 포퓰리즘"에 대한 저의 글 참조.

http://transproms.tistory.com/140


* 마지막 단락의 '규제론'에 대해서는 저의 논문 (“규제학: 개념, 역사, 전망”) 참조.

http://transproms.tistory.com/37




Posted by transproms

댓글을 달아 주세요

형벌포퓰리즘에 대한 제 글입니다. 발표용으로 제출된 미완성 초고이니, 참고만 하시고 인용은 저자와 상의해주시기 바랍니다. 두 글은 포인트가 살짝 다를 뿐 취지는 유사합니다. 아래 텍스트는 특강 내용이고, 두 글은 각각 pdf 파일로도 보실 수 있습니다.


1. 홍성수, 한국의 형벌 포퓰리즘과 사형제도, <세계 사형폐지의 날 세미나> 토론문, 사형폐지 국회의원 모임 주최, 2012년 10월 30일, 국회의원 신관 2층 소회의실 

Penal Populism and Death Penalty in Korea (Hong).pdf


2. 홍성수, 형벌포퓰리즘: 언론-정치-여론의 삼각연대, 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 특강, 2012년 11월 7일 

Penal Populism - Inha Univ (Hong).pdf






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 특강, 2012년 11월 7일



형벌포퓰리즘: 언론-정치-여론의 삼각연대*



* 이 글은 <세계 사형폐제의 날 세미나: 법의 이름으로 행하는 사형을 폐지하라>(유인태 의원실 주최, 2012.10.30, 국회 의원회관 소회의실)에서 발표된 글을 수정보완한 것임. 인용은 저자와 상의바랍니다 (sungsooh@gmail.com).



홍성수 (숙명여자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1. 한국의 범죄현실


언제부터인가 한국에서는 흉악범죄가 발생할 때마다 동일한 스토리가 반복된다 (*이하의 4개 단락은 다음의 글 참조. 홍성수, “괴물을 없애는 방법”, 시사IN, 261호, 2012.9.19).  “사형시키자!” “거세시키자!” 범죄에 대한 대중의 분노가 하늘을 찌른다. 분노는 당연하다. 이 상황에서 이성적인 대응을 주문하는 것은 전혀 이성적이지 않다. 이 때 언론이 나선다. 언론은 범죄에 관련한 여러 가지 사실들을 선정적으로 보도하면서 특히 범죄자의 개인적 배경을 상세히 보도한다. 그리고 이러한 괴물들을 사회에서 격리시켜야 한다고 선동한다. 언론보도는 대중들의 분노에 기름을 붓는다. 언론은 시민들의 분노를 더욱 자극하고, 괴물들을 사회에서 격리시키자고 선동한다. 차분하게 사태를 직시하고 건설적인 대안을 제시해야 할 언론의 사명은 온데간데없다. 그들에게 범죄는 판매 부수나 페이지뷰 수를 늘리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슬픔에 잠긴 피해자 가족에게 ‘얼마나 슬픈지 얘기해보라’고 재촉해 헤드라인을 뽑는 언론이 우리의 현실이다. 언제부턴가 성폭력 관련 보도가 언론지상에 빈번히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한 연구에 따르면, 2008년 이후 아동성폭력 사건 보도가 급격히 증가하여, 2007년까지 100건에서 200건이다가, 2008년 이후 두 배 이상, 2010년 다섯 배 이상 증가했다 (*권인숙/이화연, “성폭력 두려움과 사회통제: 언론의 아동 성폭력 사건 대응을 중심으로”, 아시아여성연구, 50-2, 2011 참조).


 단순히 사실보도만이 문제가 아니다. 대부분의 보도는 언론의 정도에서 벗어난 말 그대로 ‘선정보도’였다. 실제로 한국여성민우회가 2012년 8월 31일부터 1주일을 선정하여 성범죄 보도를 모니터한 결과, 신문은 평균 30건, 방송은 평균 20건 정도를 보도했는데 그 중 절반의 기사가 한국여성민우회가 제정한 ‘성폭력 보도 가이드라인’을 따르지 않은 것이었다(“기자들, 성범죄 보도 부끄럽지 않습니까?”, 미디어오늘, 2012.10.16.  여성민우회의 성폭력 범죄 보도 가이드라인은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61026171834 &Section= 참조. 그 외에도 한국성폭력상담소가 만든 “성폭력 피해 생존자의 보도과정에서의 권리” http://www.sisters.or.kr:8000/violence/rights_04.php; 이외에도 한겨레신문사에서는 “범죄 수사 및 재판 관련 취재보도 시행세칙”을 제정한 바 있으며 (http://blog.naver.com/jirirang?Redirect =Log&logNo=20097692402), 얼마 전 경향신문에서도 “성범죄 보도준칙”을 제정하여 발표했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10162224485&code=990403; 해외의 범죄보도 가이드라인에 대해서는 김한균, “강력범죄 보도와 피해자보호를 위한 가이드라인”, 형사정책연구, 122권, 2012, 2-6쪽 참조).


“‘짐승’을 다스리지 못한 나라” (중앙일보)

“미안하다 나영아” (조선일보)


어처구니 없는 일이지만, 흉악범죄는 정치권에 ‘호재’로 기능한다. 언론이 불을 지른 대중의 분노가 극에 달했을 때, 정치권이 나서서 나서 강경 대응을 천명한다. “사형 집행을 검토하겠습니다!” “물리적 거세 법안을 제출합니다!” 정치권이 모처럼 대중의 요구에 화답하는 순간이다. 땅에 떨어진 지지율을 단숨에 올려놓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여아는 앞다투어 강경대응책을 내놓는다. 법정형은 계속 상향 조정되고, 화학적 거세, 물리적 거세, 신상공개제도, 전자발찌 등 신종 형벌들이 쉴 새 없이 제시된다. 언론이 정치권이 이렇게 성의를 보이고 나니, 이제야 국민들은 안도의 한숨을 쉰다. 그놈 면상이라도 봤으니 속이 시원해졌고, 분 단위로 자세히 묘사된 범죄 보도를 보며 욕을 퍼부었더니 그제야 마음이 좀 풀리는 것 같다. 정치권에서 경쟁하듯 범죄대책을 내놓는 것을 보니 이제야 공포와 분노로 가득했던 마음이 좀 누그러지는 것 같다. 

하지만 문제는 이제부터다. 언론은 신문 몇 장을 더 파는데 성공했고, 정치권은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는 성과를 얻어냈고, 시민들은 안도할 수 있었다. 시민-언론-정치의 ‘삼각 연대’가 형성된 것이다. 하지만 그 성과는 ‘사이비’였다. 실제로 이런 식의 문제해결은 문제를 해결한 것이 아니고, 사회를 안전하게 만든 것도 아니다. 그저 안전하다는 ‘느낌’만을 선사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 불온한 삼각 연대의 최대 피해자는 ‘안전한 사회’를 원했던 시민이다. 


삼각 연대의 결말이 비극으로 끝난 이유는 간단하다. 괴물 몇 명을 사회에서 추방해봤자, 그 괴물을 낳은 구조가 바뀌지 않는 한 새로운 괴물이 또 등장하기 때문이다. 돌봄을 받지 못하고 각종 범죄에 무방비로 노출된 ‘나 홀로 아동’이 70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벌써 몇 년째 지적되고 있는 문제지만 뚜렷한 진전은 없다. 성폭력 가해자들은 대부분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조차 모른 채 “억울하다”고 말한다고 한다. 이런 자들에게 중형을 선고하고, 전자 발찌를 채우고, 신상공개를 하고, 화학적 거세를 해봐야, 어차피 그 집행기간이 끝나면 다 무용지물이다. 재범을 막는 가장 확실한 길은 교도소에서 어떻게든 교화해서 내보내는 것이다. 교도소 교화 프로그램의 중요성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성범죄 신고율이 10% 남짓이고, 아는 사람에 의한 성폭행이 80%에 육박한다. 성폭력은 몇몇 악마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일상이라는 얘기다. 성범죄자에 대한 강경 대응에 사람들이 호응하는 내막에는 자신의 일상이 그 악마들과는 분리되었음을 애써 확인하려는 몸부림이 숨어 있다. 그렇다면 이 일상의 성폭력을 수면 위로 드러나게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쉽지 않은 문제지만, 성교육 등 다양한 기제를 활용하여 지속적인 노력을 해야 한다. 범죄학은 사회의 빈곤과 불평등이 범죄의 근본 원인이라는 점을 일관되게 지적해왔다. 가장 효과적인 형사정책은 좀 더 평등한 사회를 만드는 일이라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러한 구조는 비단 성범죄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범죄와 형사정책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권위주의 정권에서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며 조폭과의 전쟁을 벌였던 것이 최근에는 “주폭과의 전쟁”으로 계승되고 있으며, 최근 십수년 동안, 성수대교 붕괴, 삼풍백화점 붕괴, 대구지하철 방화사건 등 대형 참사에 대한 대응에서도 우리는 항상 범죄자를 호명하고 그들을 공개처형장에 끌어냄으로써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좀 더 넓게 보면, 신용카드 연체나 가사분쟁, 개인채무 등에서까지 ‘형벌’을 투입해온 역사와 무관하지 않다.)


 현대사회의 위험은 대개 ‘구조적 위험’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형사사건화하여 범죄를 저지른 개인에게 모든 문제를 집중시키는 전략이었다. 이것이 때로는 응징과 보복의 감정을 충족시키는데 효과적이고 정치적으로도 일정한 효과를 거두지만,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문제해결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2. 형벌 포퓰리즘의 등장


서구의 범죄학에서는 이러한 현상을 이른바 “포퓰리즘적 형사정책”(populist penal policies) 또는 “형벌 포퓰리즘”(penal populism)이라고 부른다. 포퓰리즘은 가치중립적으로는 민중주의, 즉 민중들의 생각을 따르는 정치노선을 말하지만, 부정적인 의미로는 대중추수주의 또는 인기영합주의, 즉, 민중의 즉자적 감정과 단기적 이익을 이용해서 정치인이 자신의 정치적 이익(당선, 지지율 상승)을 얻지만 그것이 민중의 궁극적이고 장기적 이익에 반하는 것을 말한다. 형벌포퓰리즘은 후자의 부정적인 의미, 즉, 국민들이 진정으로 바라는 형벌을 통한 범죄예방보다는 정치인들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복무하는 형사정책을 통칭한다. 그러니까 형벌포퓰리즘을 추구하는 정치인들은, 정의를 실현하거나 범죄율을 낮추려는 것에는 관심 없고 오로지 선거에서의 승리를 목적으로 하는 일련의 형벌정책을 사용한다(*J. V. Roberts, Penal Populism and Public Opinion, Oxford University Press, 2003, 5쪽)형벌포퓰리즘은 범죄의 원인에 대한 과학적 분석보다는 감정과 직관에 호소하여 분노를 자극하고, 이를 미디어를 통해 극대화시키고, 합의보다는 불화와 적대에 근거하여 범죄자와 시민을 대립시킨다(*J. Pratt, Penal Populism, Routledge, 12-13쪽). 포퓰리즘이 단기적으로 국민들의 지지에 편승하지만, 궁극적이고 장기적인 국민들의 요구를 거스르는 것이라면, 형벌포퓰리즘 역시 시민들의 진정한 바램(범죄예방과 범죄척결)에 부합하지 않는 정책이라는 것이 문제의 본질이다. 형벌포퓰리즘의 진정한 수혜자는 언론과 정치권이지 국민이 아니다. 중요한 점은 최근 몇 년 동안 한국에서도 이러한 형벌포퓰리즘의 징후가 확실하게 감지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형벌포퓰리즘은 ‘법치’, ‘질서’를 강조하는 흐름과 일맥상통한다. 이종수, “이명박 정부의 "법질서 정책" 평가”, 법과 사회, 36권, 2009 참조). 엄벌주의 경향은 이미 군사정권 시절부터 배태된 것이었지만 (*김일수, 전환기의 형사정책: 패러독스의 미학, 세창출판사, 2012, 64쪽 이하.)언론, 시민, 정치의 삼자연대를 통해 기능하는 전형적인 형태의 형벌포퓰리즘은 최근 몇 년 간 더욱 뚜렷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형벌포퓰리즘이 영국과 미국에서는 “법질서 정치”(law and order politics)라는 이름으로 등장했다(*김한균, “법질서정치와 형사사법의 왜곡”, 민주법학, 제37호, 2008 참조). 법질서 정치는 범죄로 인한 위기를 과장하고 범죄에 대한 두려움을 정치적으로 이용했다. 범죄현실을 범죄자의 잘못으로 단순화시키고, 피아를 구분하여 적을 배제함으로써 국민들의 사이비 통합을 강화하는 정책을 실시했다. 미국에서는 1960년대, 영국에서는 1980-90년대 보수정당권이 주로 활용했던 정책이다. 한국의 법질서정치는 1990년 이전에도 이미 초보적인 형태로 등장했다. 통행금지, 복장/두발 단속, 연예인 마약사건, 경범죄처벌법, 불심검문 등으로 공포분위기를 조성했던 것이 대표적이다. 구체적으로는 5.16 이후의 깡패 소탕, 1980년 삼청교육대, 1990년 범죄와의 전쟁 등이 대표적이었다. 이것은 형사특별법의 제정으로도 나타났는데, 폭력행위처벌 등 처벌에 관한 법률 (1961), 특정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1966),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1983), 특정강력범죄의 처벌에 관한 특례법 (1990), 사회보호법 (1980, 2005년 폐지, 치료감호법 신설), 경범죄처벌법 (1954) 등이 대표적인 법률이다. 1990년 대 이후에도 환경범죄의 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법 (1991), 마약류관리에 관한 법률 (2000), 법죄수익은닉의 규제 및 처벌 등에 관한 법률 (2001), 성폭력범죄의 처벌 및 피해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 (1994), 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 (2000), 아동∙청소년 성보호에 관한 법률 (2009), 성매매알선 등 행위의 처벌에 관한 법률 (2004), 성매매 방지 및 피해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 (2004), 가정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법률 (1997), 가정폭력방지 및 피해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 (1997),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2001),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소비자 보호에 관한 법률 (2002), 기타 경제관련 범죄 등이 입법화되었고, 신상공개제도, 전자발찌, 화학적 거세 등 새로운 강성형벌정책이 등장했다. 특히 이명박 정권 들어서는, 유난치 법치를 강조하곤 했는데 (*“우리사회에서 법과 절차를 무시하고 떼를 쓰면 된다고 생각하는 의식도 가시지 않고 있다” “어떤 이유에서든 법치를 무력화하려는 행동은 더 이상 용인하지 않을 것” [이명박 대통령 2008년 8월25일 한국법률가대회 축사]; “법치를 바로 세워 일류국가로 가는 기반을 다질 것” [이명박 대통령 2009년 1월2일 신년 국정연설]), 몇몇 법정형을 상향 조정하고 공소시효제도를 축소하는 조치가 뒤따랐으며, 용산참사, 미네르바 사건, 유언비어(연평도, 천안함, 촛불시위), G20, 불법집회시위 대응, 불법파업 대응 등에서 복면착용금지 (집시법), 불심검문 거부시 지문 채취 (경찰관직무집행법), 불법집단행위에 관한 집단소송법, 비영리민간단체지원법, DNA 신원확인정보의 이용 및 보호에 관한 법률, 국정원법/통신비밀보호법/테러방지법, 사형제와 사이버모욕죄 도입 논란 이른바 무관용정책(zero tolerance)이 등장했다 (*자세한 것은 이종수, “이명박 정부의 "법질서 정책" 평가”, 법과 사회, 36권, 2009 참조).

 


2. 형벌포퓰리즘의 문제점


형벌포퓰리즘은 이른바, 강벌주의(punitivism), 엄벌주의, 중형주의라는 경향과 연결된다. 이것은 언론, 여론, 정치가 더 강한 형벌을 요구하고, 이에 따라, 합리적 형사제재의 수준을 일탈하는 경향을 말한다 (*김일수, 전환기의 형사정책: 패러독스의 미학, 세창출판사, 2012, 29-30쪽 참조).

 범죄와 형벌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은, 범죄가 많아지고 강력해질수록 형벌을 더욱 더 가혹하게 집행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강한 형벌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일종의 악순환의 구조를 갖게 된다: “범죄 → 형벌 → 범죄 증가 → 강한 형벌 → 범죄 증가 → 더 강한 형벌 → 범죄 증가”. 그리고 그 정점에는 바로 사형제가 있다. 형벌포퓰리즘이 공포심을 자극하여 진정한 문제해결책이 아닌 강한 형벌로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국민들을 현혹시키는 것이라면, 그 ‘강한 형벌’ 중 가장 강한 것이 바로 사형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국에서의 사형집행은 1997년이 마지막이었으나, 최근 들어 사형집행을 재개하려는 흐름이 끊임없이 형성되고 있다. 2009년 2월에는 강호순 사건을 빌미로 정부여당이 사형제를 재개하려는 논의를 한 바 있고, 2010년 3월에는 이귀남 법무부 장관이 사형 재개를 시사하는 발언을 해서 논란이 커진 바 있다. 그리고 2012년 9월에도 나주 초등생 성폭행 사건 등 성범죄가 발생하자, 청와대 차원에서 사형제에 관한 논의를 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청와대 ‘사형집행 재개 초보적 논의 중’”, 조선일보, 2012.9.4.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09/04/2012090400102.html). 동시에 한 대선 유력후보가 반인륜적 흉악범에 대해 사형을 집행할 수 있다는 뜻을 내비추기도 했다 (*“‘대통령 되면 사형집행?’ 묻자…박근혜 “예전에도 그렇게 주장”, 한겨레신문, 2012.9.4. http://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550219.html)

 

문제는 사형의 형벌포퓰리즘의 사이비 효과를 더욱 강화할 것이 분명하다는 점이다. 형벌포퓰리즘을 비판하는 이유는 전자발찌, 신상공개, 거세법안 등의 일련의 강벌주의 형사정책이 범죄의 진정한 예방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형 역시 이 여러 연구가 밝힌 바와 같이 사형의 범죄억제력은 입증된 바 없다. “대부분의 사회과학연구는 사형과 종신형을 비교한 결과, 사형이 범죄를 억제한다는 증거를 찾지 못했다” (*S. C. Hicks, “Death Penalty”, Encyclopedia of Law & Society, Sage Publications, 2007, 388쪽; 홍기원, “사형제도의 범죄억지력에 관한 최근 미국 법경제학의 연구성과에 대한 검토”, 고려법학, 제57호, 2010; 김도현, “헌법재판소의 사형제 결정과 사회과학적 논증: 사형의 억제효과를 중심으로”, 법과사회, 41권, 2011 참조). 그리고 이들 강성형벌은 오히려 진정한 문제해결을 가로 막는 역할까지 한다. 대중의 관심이나 정부의 범죄대책에도 일정한 ‘총량’이 있을 수밖에 없는데, 강성형벌정책에만 매몰되게 되면 범죄가 발생하는 구조적인 문제의 해결에는 아무래도 관심이 떨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순혁, “범죄 포퓰리즘”, 한겨레신문, 2012.9.4.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 /550135.html) 그런 식으로 사형은 정부정책의 실패를 은폐하는 기능을 한다 (*박주민, “사형, 국가의 실패 숨기는 가장 쉬운 방법”, 프레시안, 2012.9.27.,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20120927102422). ‘사형’은 그런 사이비 효과를 더욱 극대화시킨다. 미국에서 사형장면이 언론에 보도되는 모습을 보면, 그것은 마치 이벤트와도 같다. 신문지면은 사형 소식으로 도배되고, 9시뉴스의 톱기사는 당연히 사형집행 소식으로 채워진다. 그러한 언론보도는 분노의 총량을 상당 부분 흡수해 버릴 것이며, 그에 비례하여 진정한 범죄대책에 필요한 여유분은 더 소진될 것이기 때문이다. 



3. 형벌포퓰리즘의 악순환을 끊는 방법


이른바 ‘강성 형벌정책’을 주문하는 정치권과 언론은 엉뚱하게도 그 포퓰리즘적 폐해를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반론을 제기한다.


“... 그런데 의외로 이 사건에 침묵하고 있는 곳이 있다. 4년 전 '전자팔찌법' 도입을 반대했던 일부 '인권' 단체들이다 ... 전자팔찌 정도에 성범죄자의 인권 보호를 걱정했던 사람들이다. "징역 12년은 너무 약하다"고 분노하며 '피해보상'을 촉구하는 청원에 찬성 댓글을 단 국민 수십만 명을 "파시즘 같은 여론재판"이라고 앞장서 비판해야 앞뒤가 맞을 것이다. '나영이 사건'을 보고 그들이 무슨 말을 할지 몹시 궁금하다.” (*정우상, “기자수첩: '나영이'엔 침묵하는 '인권단체'들, 조선일보, 2009.10.02.)

 


(전자팔찌제도 도입과 관련하여) "더 이상 얼마나 더 우리 아이들이 희생을 당해야 그 한가한 가해자 인권 타령을 그만둘지 되묻고 싶다" "인권 선진국이라고 하는 미국과 유럽에서도 이 제도를 도입하고 있다" (진수희 의원)


그런데 형벌포퓰리즘에 반대하는 것은 범죄대책에 무관심하자는 얘기도 아니고, 범죄현실에 무책임한 태도를 보이는 것도 전혀 아니다. 범죄자의 인권을 이야기하는 것은 범죄자의 인권이 어떠한 경우에도 제한될 수 없는 불가침의 영역이라서가 아니라, 필요한 수준을 넘어서 과잉침해되어서는 안된다는 것 뿐이다. 흉악범죄를 저질렀다고 해서 범죄아의 인권이 아예 없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헌법 제10조)고 되어 있는데, 범죄는 인권이 없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고, 흉악한 범죄를 저지른 것에 비례하여 강한 처벌이 필요하겠지만, 그것은 필요최소한이어야 하고, “모든 자유와 권리”는 본질적인 내용까지 침해될 수 없다는 것(헌법 제37조)이 엄연한 헌법정신이기 때문이다. 


형벌포퓰리즘에 반대하는 것은 오히려 범죄현실에 대해 무거운 책임을 지자는 것이다. 쉽게 가자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려운 길을 가자는 것이다.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해서 문제를 해결하자는 것이다. 사형을 통해 문제가 해결된 것 같은 사이비 효과에 만족하지 말고, 사형이 아닌 다른 범죄대책을 세우자는 얘기다. 사형이라는 손쉬운, 그러나 별 효과가 없는 중형 대신에 다른 범죄대책들을 모색해 보자는 것이다. 


범죄피해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이른바 피해자 가족들의 격한 분노와 함께, 사형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김성규, “유족 恨 덜어주는 것도 사법부 역할인데”, 동아일보, 2012.10.21., http://news.donga.com/3/all/20121019/50249130/1; “수원 오원춘 사건 유가족 인터뷰”, CBS <김현정의 뉴스쇼>, 2012.9.5., http://www.nocutnews.co.kr/show.asp?idx=2291320) 사형폐지론을 주장한다고 해서 이들의 분노에 무관심한 것이 결코 아니다. 그렇다고 피해자들로 하여금 관용을 베풀고 가해자의 인권을 존중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도 아니다. 가해자를 용서하지 않고 사형을 내려달라고 간청하는 피해자들의 요구가 잘못되었다고 하는 것도 아니다. 그들의 요구는 그 자체로 정당하며 범죄피해자들을 하루 빨리 사회에 복귀시킬 수 있는 사회정책이 꼭 피룡하다. 요구한다. 다만, ‘사형’이라는 수단을 통해 이루어져서는 안된다는 점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도리어 사형제도가 존치하고 사형이 집행된다면 이들 범지피해자들의 사회복귀문제에 더 무관심해질 수 있다. 실제로 엄벌주의의 정당성을 강하게 강조했던 여론, 언론, 정치 중 범죄피해자의 문제에 진지한 관심을 가지는 이들은 많지 않다. 오히려 사형에 반대하고 강성 형벌정책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범죄피해자의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는 경우가 더 많다 (*예컨대, 이호중, “엄벌주의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 33호, 2008년 7-8월호).



중형주의와 형벌 포퓰리즘에 대한 반대는 보다 우리를 과학적인 형사정책의 길로 이끈다. 첫 번째는 범죄는 어디까지나 ‘사회구조’에서 기인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범죄원인에 대한 복합적인 사회과학적 이해는 범죄의 원인을 단순히 ‘범죄자’로 원원시키는 우를 범하지 않는다. 불평등하고 억압적인 사회가 범죄의 가장 큰 원인이라는 범죄학의 기본 테제를 다시 한 번 확인한다. 그리고 범죄를 줄이는 데 직접적으로 기여한다고 평가되는 검거율 개선이나 최근 각광을 받고 있는 범죄예방환경설계(CPTED: Crime Prevention through Environmental Design)나 공동체 치안(community policing) 등의 중요성을 다시 확인한다. 예컨대, 아동성범죄와 같은 범죄예방환경설계나 공동체 차원의 돌봄시스템의 마련은 그 어느 범죄대책보다 효과적인 대안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법적 차원에서 또 하나의 대응은 형법에 대한 법치국가적 제한원리인 책임원칙과 비례성원칙을 공고히 하는 것이다. 법치국가 형법원리를 공고히 하는 것은 형사피의자의 인권이 부당하게 침해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형법이 권력에 의해 남용되고, 정당하지도 효과적이지도 않은 형벌의 강성화와 포퓰리즘화를 막는 것에도 기여한다. 

Posted by transproms

댓글을 달아 주세요

셧다운제 합헌, 진짜 문제는 사법부에 대한 의존 / 잉여인간
http://ppss.kr/archives/20232


법철학/법사회학 전공자로서, 최근 몇 년 동안 꾸준히 밀고 있는 (그러나 별 반향은 없는) 질문입니다. 이 주제에 관한 논문을 거의 완성했습니다.

"합헌인지 위헌인지를 논하기 이전에, 왜 이 문제를 헌법재판소가 가려야 하는지 물어라"
"합법인지 불법인지를 논하기 이전에, 이 문제를 합법/불법으로 나눠서 논하는게 합당한 것인지를 의심하라"

링크한 글은 이런 논점에서 쓰여진 보기 드문 글이라 제 눈에 확 들어왔습니다. 내용 구석구석에는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예컨대, 헌법적 타당성과 가치판단을 대립시키는 것)이 조금 있지만, 이런 논점을 제시했다는 것 자체가 고무적이네요. 블로그 가서 보니까 저자가 법하시는 분은 아닌 것 같은데, 어쩌면 법에 문외한인 분들이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릅니다. 이런 자연스러운 질문이 제기되지 않는 현실이 문제일 뿐이죠.

다만, 셧다운제 위헌소송은 이런 논점을 제기하기 그다지 적절한 사안은 아니라고 봅니다. 다수결 민주주의에 의해 해결하기 어려운 전형적인 소수자 사안이고, 헌재의 의견을 구해보는 것은 충분히 유의미했다고 보여집니다. 헌법재판과 2명의 지지를 이끌어낸 것도 성과라고 할 수 있겠고요. 일단 패소했지만, '패소 이후'가 또 중요한 문제라고 보여집니다.

Posted by transproms

댓글을 달아 주세요

사법시험과 로스쿨제도에 관련하여 

(법)전문직과 계층이동에 대한 영국의 보고서 두 편


요 며칠 동안 로스쿨과 공정성 문제에 완전히 꽂혀서 꽤 많은 자료를 수집했네요^^;; 다행히, 논문이 될 수 있는 아니 당장 써야 하는 주제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영국정부가 최근 두 편의 보고서입니다. 영국 정부는 2009년과 2012년 각각 "전문직과 사회계층이동"에 관련된 두 편의 보고서 작성을 의뢰하여 출판했습니다. (참고로, 국가보고서는 영국이 참 잘 만듭니다. 민간연구소 보고서가 훌륭한 미국과 대비되는 점이죠)


이 보고서는 "국민 누구나 전문직이 될 수 있는 공정한 기회가 열려 있어야(fair access to the profession) 한다"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1) 현재 전문직과 사회이동 현황

2) 전문직에 대한 접근성을 가로 막는 걸림돌이 무엇인지에 대한 분석

2) 그 개선을 위한, 대학, 국가, 전문가(단체), 민간단체(재단) 등의 과제


대충 읽어봤는데도 무척 흥미진진하네요.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이런겁니다. 로스쿨과 법전문직에 대한 접근성은 한국사회에서도 중요한 문제로 떠올랐잖아요. '공정성'과 '저소득층을 위한 희망사다리'를 내세우며 로스쿨을 비판하고 사법시험을 존치하자는 목소리까지 나온 상태입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선택의 기로에 놓인 겁니다.


1) 사법시험을 존치시킴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

2) 아니면, 로스쿨체제 하에서 (영국의 사례처럼) 다양한 사회계층이 로스쿨/법전문직에 진입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모색할 것인가?


제가 사법시험 존치론자들과 반대론자들에게 갖는 불만은 이런겁니다.


- 사법시험 존치론자들이 '공정성' 문제를 들고 나온 것을 환영합니다. 그런데 왜 이 문제의 해법이 사법시험 존치에만 있다고 가정하는 걸까요? 이미 그 문제가 드러나서 이미 수년 전에 사회적 합의에 의해 폐지하기로 한 (OECD급 국가 그 어디에도 없는) 사법시험의 존치 외에 다른 해법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은 왜 안하는 걸까요?


- 반대론자들이 고시제도의 부활을 경계하고 있는 점은 저도 동감합니다. 그런데 로스쿨시대의 공정성과 사회이동의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지도 않고, 그 개선책을 적극 모색하지 않는 이유를 알 수가 없습니다. 로스쿨이 자랑하는 특별전형 5%와 총액대비 장학금 40%만으로는 결코 해결될 수 없는 문제인데 말입니다. 이대로 가다간 사법시험 존치로 문제를 풀자는 목소리가 힘을 얻을 수밖에 없습니다.



관심있는 분들을 위해 언급한 보고서를 링크합니다.


Unleashing Aspiration 2009 (by the Panel on Fair Access to the Professions)

file:///C:/Users/Lenovo/Desktop/unleashing_aspiration_full_report.pdf


Fair Access to Professional Careers 2012 (by Independent Reviewer on Social Mobility and Child Poverty, Rt. Hon Alan Milburn)

https://www.gov.uk/government/uploads/system/uploads/attachment_data/file/61090/IR_FairAccess_acc2.pdf

Posted by transproms

댓글을 달아 주세요

로스쿨은 과연 공정한(정의로운) 제도인가? 

로스쿨 시대의 새로운 공정성에 대하여 



지난 주에 썼던 글에 이어서 씁니다. 이게 마지막 글입니다. 사실 논문을 쓰려고 준비했던 주제인데, 아무래도 논문 수준이 되려면 좀 더 이론적으로 다듬어야 할 부분이 많고 자료도 더 수집해야 해서, 언제 쓸 수 있을지 기약이 없을 것 같아요. 그래서 일단 단상이라도 여기에 끄적거려 놓습니다.

 

먼저 사법시험은 공정한 제도냐? 일단 저는 어떤 측면에서는 대단히 공정한 제도라고 봅니다. 물론 최근에는 재정적인 뒷받침이 없으면 쉽지 않은 시험이 되었다는 비난을 받기도 하고, 상류층의 전유물이 되어가고 있다는 얘기까지 들립니다만... 제가 볼 때 그런 경향이 일부 있다고 해도, 여전히 공정성 면에서는 매우 우수한 방식이라는 점은 인정해야 한다고 봅니다. 여기서 공정하다는 것은 각종 차별적 요소들, 소득, 성별, 학력, 학벌, 출신지역 등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사법시험에서는 그 성적이 거의 절대적인 기준이라, 검사, 판사 임용은 물론, 사기업이나 로펌에서조차 함부로 무시할 수가 없으니, 사회 전반에서 실력대로라는 목표를 충족시키는데 매우 유용한 도구임은 분명합니다.

 

* 여기서 두 가지 논점을 배제하겠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즉 실력대로라는 말에 표상하는 한국의 능력주의’(meritocracy)가 다른 차별문제 못지않은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고 생각합니만, 일단 이 논점은 배제하겠습니다. 또한 사법시험이 과연 실력을 평가하는 정확한 도구인지에 대한 의심도 접어 놓습니다. 저는 주위에서 출중한 법학실력에도 불구하고 사법시험에 연달아 낙방하는 여러 동기 선후배들을 보아왔습니다. 그들이 과연 사법시험에 합격한 사람들보다 실력이 떨어지는가? 변호사로서의 역량이 부족한가? 저는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이 봤습니다. 지독히 시험운이 없는 경우도 있고, 또 단 번에 승부를 겨루는 시험이라는 평가방식에 끝내 적응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이 봤습니다. 다만, 일정한 경향 시험 잘 본 사람이 대체로 실력도 좋다 까지 부정할 수는 없을 겁니다. 사법시험 1등한 사람이 5등 한 사람보다 낫다고 하거나, 1000등으로 합격한 사람이 1001등으로 불합격한 사람보다 우수하다고 보기는 어려워도, 1등한 사람이 불합격한 사람들보다 실력이 뛰어날 것이라는 점은 누구나 인정할 수 있으니까요. 저는 재밌는 실험을 하나 제안해 보고 싶어요. 과거 사법시험 2차 답안지를 채점했던 채점위원에게 다시 채점해 보라고 해보는 거에요. 과연 얼마나 비슷한 결과가 나올까? 제 추측으로는 유사하게 나오긴 하겠지만, 당락을 뒤엎을 정도의 오차도 꽤 많을 겁니다. 60점 짜리 답안지에 38(과락)을 다시 부여하진 않겠지만, 58, 59점을 부여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는 것이죠. 그런 미세한 차이가 수많은 사람들의 인생을 좌우한다면 과연 이 채점이 공정한 것인가 하는 문제를 제기해보려는 것이죠. 여튼 여기서 이런 능력주의 문제는 논점에서 제외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사법시험은 실력대로라는 이상을 실현하는데 있어 유용한 제도다는 점을 유보 없이 인정하고 넘어갑니다.

 

반면, 법조인이 되는 관문인 로스쿨 입시는 사법시험과 매우 다릅니다. 학점, LEET, 영어성적, 서류전형(자기소개서), 면접이 이른바 5대 요소입니다. 문제는 이런 식의 평가에서는 평가자의 주관과 재량이 개입된다는 점입니다. 그것 자체는 문제가 아닙니다. 이 재량이 공정한 방향으로 발휘될 수도 있고, 학교별로 특유의 전통이 되기도 하고, 사회적 약자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재량이 발휘되기도 하거든요. 서열이 분명한 영미 명문대학의 입학사정에서는 입학생의 인적 구성을 사실상 조정'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정확하게 어떻게 조정하는지는 저도 모릅니다). 정량지표에 따라 단순히 줄을 세워가지고는 도저히 그런 결과가 나올 수가 없기도 하고요. 한국에서는 이 기준을 미리 정해 놓지 않으면 입시부정이 되지만, 영미권 대학에서는 이것을 대학의 재량이라고 보는 것 같습니다. 대학은 사회적 정의에 반하지 않는 한, 자신이 뽑고 싶은 사람을 (심지어 정량지표와 무관하게) 마음대로 뽑을 수 있다는 것이죠. 일례로 미국에서 랭킹 20위 쯤 되는 대학에 떨어졌는데, 하버드나 예일에 합격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걸 가지고 입시부정이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죠. 그냥 그건 합리적으로 결정된 대학의 입시방침이라고 보는 겁니다. 어느 학교를 가건 그 학교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면 추후에 역전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측면도 있고요 (*실제로 미국의 대법관이나 노벨경제학 수상자 등의 출신학교를 살펴본 적이 있는데, 의외로 출신 학부가 정말 다양합니다. 반면 (전문)대학원은 거의 예외 없이 명문대고요. 무식하게 정리하면, 어떤 대학을 졸업하건 명문 대학원에 진학하는 것으로 만회가 가능하다는 얘기죠. 그래서 하버드 로스쿨에서 171개 대학 출신이 합격한다는 얘기를 일전에 말씀드린 겁니다). 또한 학교 서열이 있긴 하지만, 한국보다는 다소 느슨하다는 점도 있고요.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그렇게 대학이 어떻게 학생을 선발하건, 부당한 차별적 요소들이 작동하지 않았을거라는 사회적 신뢰가 있는 것이죠. 즉 자신이 불합격했어도 그건 그 학교가 원하는 인재상에 자기가 부합하지 못했을 뿐이지, 대학이 나를 사회적 신분이 낮아서, 여자라서, 유색인종이어서, 떨어뜨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외에도 여러가지 사회, 정치, 문화적 이유에서 대학의 입시정책을 사회가 승인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에도 대학의 사명과 관련한 챕터에 이런 미국식 사고가 잘 드러나 있죠)

 

그러니까, 영미권에서 학생을 선발하는 방식과 유사한 우리의 로스쿨식 선발방식이 한국사회에서 무리 없이 작동하기 위해서는 한국사회에서도 위와 같은 여러 가지 조건들이 충족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우리에게는 아직 그런 준비가 미처 안되어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저만 해도 제가 지도한 학생이 어떤 로스쿨에 불합격한 것에 대해 도저히 납득할 수 없을 때가 몇 번 있었습니다. 전국의 어느 학생보다도 우수한 정량수치를 가지고 있고 아주 훌륭한 비전을 가지고 있는 학생이라, 정말 제 이름을 걸고 어디에 내놓아도 자신있는 그런 학생인데, 로스쿨의 입시에서는 불합격을 하는 겁니다. 면접 비중이 들어가는 2차에서 떨어졌다면 면접에서 실수를 했을거라고 자위하면 됩니다 (사실 그 학생의 역량상 면접을 못봤을리 없다고 생각되는 경우도 있었지만요). 그런데 사실상 정량수치로 판가름이 나는 1차에서 불합격을 하면 정말 납득할 수가 없어집니다. 그 학교에 찾아가서 도대체 무슨 기준으로 떨어뜨린거냐고 항의하고 싶은 심정이 들 때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저 같이 로스쿨에 대한 깊은 신뢰가 있는 사람들은 자기소개서(서류전형)에서 비전을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에 떨어진 것이라고 생각하고 넘어갑니다. (그런 신뢰가 없으면 제가 로스쿨 준비반 지도교수를 할 수 없겠죠) 그런데 저 같은 사람이 아니고, 일반인이라면 단박에 무언가 부당한 요소들이 개입했을거라고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학벌, 성별, 연령, 외모 등등 우리가 그동안 근절하려고 그토록 싸워왔던, 그리고 사법시험제도에서는 아주 손쉽게 배제할 수 있었던 차별적 요소들이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실제로 일부 학생들은 자기 부모나 친인적 친척이 사회유력인사라는 사실을 자기소개서에 적어낸다고 합니다. 물론 저 같은 사람은, 그런 것이 입시결과에 영향을 주지 않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실제로 저는 학생들이 자소서에 부모님이 누구신지를 적으면 도움이 될까요?”라고 문의하면, “그런 것을 적어내는 것을 오히려 부정적으로 보는 교수님들이 더 많을 것이니 적지 말라고 진지하게 조언하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과연 보통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하겠냐는 겁니다. 올해부터는 로스쿨 자소서에 '부모직업'을 못쓰게 하는 정책이 실시된다고 하니, 아마 그동안 이 문제가 꽤 심각하게 제기되었던 모양입니다. 그것이 실제 영향을 주건 안주건 상관 없이 말이죠.

 

여하튼 이 모든 문제들은 그런 요소들을 손쉽게 통제할 수 있었던 사법시험체제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문제입니다. 고시반 지도교수를 할 때는 "학생이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성적만 받는다면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확신에 찬 어조로 얘기해줄 수 있었지만, 로스쿨 준비반 지도교수를 하면서는, "경우에 따라서 노력대로 되는 것만은 아닐 수도 있다"는 점을 솔직히 인정하고 얘기를 시작해야 합니다. 이런 현실이 보통 사람들에게 그리고 입시생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는가가 문제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실제로 입시가 공정하게 진행되고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 사회에서는 아직 입시제도에서 발휘되는 여러 가지 주관적 요소를 대학의 재량'으로서 승인하고 있지 않는 것 같습니다 (사실 대학입시도 수시전형 등이 그런 편인데, 제가 종종 친구들한테 요즘 대학의 변화된 입시전형을 얘기하면, "말도 안된다. 그래 가지고 공정성이 보장되겠냐"는 식으로 비판적으로 보는 경우가 꽤 있습니다). 아직 정치, 문화, 사회적으로 충분히 성숙하지 못했기 때문에 벌어지는 문제일 수도 있고, '능력주의'에 대한 환상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현실이 그렇다는 겁니다. 여기에 검사, 판사, 주요 로펌에서까지 사법시험 성적 없이 서류와 면접으로 선발하다 보니, 입시에서 뿐만 아니라 취업에서도 동일한 문제가 계속 터져 나옵니다. 저는 이미 이 점을 예견하여(!) “로펌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화두를 제시하려고 관련 논문을 두 편이나 썼습니다. 로펌과 같은 사회적 영향이 큰 집단은 취업의 공정성에도 강력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었는데요. 불행히도 사회에 전혀 방향을 일으키지 못했고(!!) 현실은 여전합니다판검사 임용방식도 단순히 '실력대로'를 넘어서야 한다고 틈만 나면 얘기했지만, 뭐 제 말이 영향력이 있을리가 없죠 ^^;;

 

문제는 이러한 현실을 타파할 노력조차 잘 안보인다는 겁니다. 로스쿨 시대의 공정성은 사법시험 시대의 공정성과는 다른 지점에 놓여야 합니다. 시험성적으로 줄을 세우는 공정성이 아니라, 각종 차별적 요소들을 철저하게 배제하는 제도적인 개선과 소수자를 우대하는 적극적인 조치가 그것입니다. 그리고 스스로 어떤 자구노력을 하고 있고 그 결과가 어땠는지를 투명하게 공개함으로써, 스스로 시민사회의 통제를 받겠다고 나서는 것도 중요합니다. 이런 노력을 통해 로스쿨 입시가 사회적으로 공정하다는 것을 승인받아야 합니다. 이런 노력이 충분치 않은 상황에서 '사법시험 존치'라는 반격이 나오는 것에는 그동안 로스쿨이 자초한측면도 있다고 봅니다.

 

저번에 하버드 로스쿨이 입학생의 인적 구성을 홈페이지에 자발적으로 공개하고 있는 점을 소개했던 것도 그래서입니다. 하버드에선 우리는 이렇게 뽑고 있다고 자신있게 얘기하고 그 점에 대한 시민사회의 통제를 받고 있습니다. 로펌도 마찬가지입니다. 해외유수로펌들은 변호사들의 인적 구성을 사회적 책임보고서에 담아 자발적으로 공개합니다. 왜 해외 유수 로펌들은 우리는 신규변호사 중 성소수자 비율이 **%라는 사실까지 공개하고 있을까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점은 제가 최근 논문 두 편에서 자세히 적어 놓았습니다)

 

그래도 희망은 있습니다. 서울대 로스쿨 정상조 학장의 인터뷰 내용입니다.

 

"교수들도 사회적 약자, 지방대 학생들을 많이 뽑고 싶은데 지원자 자체가 너무 부족하다 보니 뽑고 싶어도 뽑지를 못하고 있다. 이번에 취약계층 신입생 9명을 선발했다. 특히 새터민 학생 두 명이 입학했는데 대한변호사협회가 운영하는 사랑샘재단에서 생활비 50만원을 포함한 희망 장학금을 받는다. 현재 15명이 희망장학금을 지급받고 있다." (링크)

 

서울대 로스쿨에서 이런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정말 다행스럽고 반가운 일입니다. 일부 로스쿨과 로펌에서는 이미 블라인딩 면접을 실시하고 있기도 합니다. 지역균형채용을 실시하는 로펌도 있습니다. 다 같은 맥락입니다. 로스쿨 시대의 공정성이 무엇인지, 시대의 흐름을 읽고 정확하게 읽고 있는 징표로서 유의미한 것들입니다. 하지만 좀 더 적극적인 조치가 필요합니다. 서울대 로스쿨에 사회적 약자, 지방대 학생 지원자 자체가 너무 부족하다는 것은 아마 사실일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놔두면 "뽑고 싶어도 뽑지 못하는 상태"가 계속 될거라는 것이 문제입니다. 좀 더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현재 상황은 달라지지 않을겁니다. 예컨대, 뽑고 싶다는 사회적 약자와 지방대생에 대한 쿼터제를 둬서, 일정 비율에 미달하면 추가모집을 해서라도 뽑겠다는 식으로 적극 나서지 않으면 문제는 결코 해결되지 않을 겁니다. 저는 이렇게 사회적 신뢰 회복을 위해 로스쿨이 적극 나서야 한다고 봅니다. 로펌들도 '공정한 채용정책'을 놓고 새로운 경쟁에 나서야 합니다.

  

저는 여건만 성숙한다면 고시제도보다는 로스쿨제도가 훨씬 더 좋은 제도라고 확신합니다 (외국과 비교하는 거 별로 안좋아하지만, OECD국가 중 도대체 '고시제도'로 법조인을 선발하는 나라가 어딨냐고요? ㅠ 우린 도대체 언제까지 이걸 고집할 거냐고요? ㅠ) 하지만 현재까지 로스쿨제도가 고시보다 못한 측면도 계속 드러나고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사법시험시대의 공정성과는 다른 로스쿨시대의 공정성이 승인받고 잇지 못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들입니다. 로스쿨 시대의 새로운 공정성이 사회에서 연착륙하지 못하고 헤매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이 제도를 밀어붙이는 것이 능사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사회적 신뢰를 쌓기 위한 충분한 노력을 보여주지 못하는 한, 아마 로스쿨제도는 사법시험 존치라는 반격을 감당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고 이미 수많은 문제가 드러나 용도폐기된 사법시험을 존치함으로써 문제를 풀겠다는 것에도 선뜻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사법시험만의 공정성이 순기능하는 측면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사법시험만의 고유한 문제도 많았기 때문에 지금 여기까지 온 것이니까요.

 

다만 어느 쪽 입장에 서건 사실에 기반해서 유의미한 논점을 치열하게 논쟁해야 한다는 점만큼은 꼭 강조하고 싶습니다. 저번 글에서 말씀드렸듯이, “저소득층 희망사다리같은 근거없는 주장 말고, 지금 지적한 이런 문제들을 가지고 논쟁이 더 심화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과연 로스쿨은 지금 제기되고 있는 여러 가지 공정성 문제에 대해 자신있게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가? 여러 가지 의혹이 사실이 아니라고 해도, 그런 세간의 의혹을 불식시킬 수 있는 제도적, 실천적인 대안을 진지하게 마련하고 있는가? 그렇게 체제내적인 대안을 마련해서 개선할 수 있는 문제인가, 아니면 사법시험을 존치시켜서라도 보완책을 만들고 로스쿨을 자극하지 않으면 풀릴 수 없는 문제인가? 저는 이런 논점으로 좀 더 활발한 논쟁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램입니다. 


한말씀 더 덧붙이자면, 위에서 제가 제기한 문제에 대한 로스쿨 관계자들의 답변은 대개 "우리는 매년 100명의 사회적 소수자를 특별전형으로 입학시키고 있다" 정도입니다.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것은, 왜 이러한 대답만으로는 로스쿨 시대의 공정성을 담보하는데 불충분한 것인지를 설명해 보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법시험이 나름의 공정성으로 사회통합적 기능을 발휘했다는 사실을 애써 무시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저는 사법시험은 나름대로 우리 사회가 공정하다고 믿게 하는데 매우 훌륭한 기능을 해왔음을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사시체제를 고수해야 하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사법시험시대의 공정성을 대체하는 로스쿨의 새로운 공정성을 사회적으로 승인받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죠. 한마디로, 로스쿨체제는 사법시험과 또 다른 의미의 새로운 공정성으로 사회의 승인을 받고 사회통합에 기여하고 있냐고 묻는 것입니다. 



* 친절한 세 줄 요약

사법시험 존치론에 대해서 개인적인 의견은 유보적이지만, 로스쿨 시대의 공정성은 사법시대의 공정성과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 우리 사회는 로스쿨 시대의 새로운 공정성을 만들어내는데 성공하지 못했고, 그것이 '사법시험 존치'라는 반격을 받게된 이유이다.

- 지금처럼 로스쿨 시대의 새로운 공정성을 승인받기 위한 노력에 무심하다면, 사법시험 존치라는 파고를 막을 수 없을 것이다.


** 지금까지 세 번에 걸쳐 쓴 블로그의 글은 이미 제가 발표한 로펌의 사회적 책임(공정성)에 대한 논문들에 대한 속편, "로스쿨시대의 공정성과 로스쿨의 사회적 책임"을 쓰기 위한 단상입니다. '정의'와 '공정성'이라는 법철학적 이론틀을 가지고 접근해보려고 하는데, 블로그의 글은 이론에 의존하지 않고 쉽게 풀어 써 본 것입니다. 또한, 로스쿨시대의 공정성은 로스쿨뿐만 아니라 법조문화 전반에 대한 새로운 혁신으로서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로스쿨, 로펌, 법원, 검찰의 공동노력이 절실한 것이죠. 법원, 검찰의 책임은 너무 자명한 것이라 굳이 논문으로 쓸 내용은 아니고, 왜 사기업인 로펌도 그런 노력을 해야 하는지(이건 이미 썼음), 왜 사립대학인 로스쿨도 그런 노력을 해야 하는지(이걸 쓰려고 함)는 나름 '논문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도 반향이 없어서, 이미 쓴 논문의 링크라도 걸어 둡니다 ㅎㅎㅎ


홍성수, “로펌의 사회적 책임을 위한 시론”, 『법과사회』, 제43호, 2012, 297-328쪽.

http://transproms.tistory.com/92


홍성수, "로펌의 성장과 변호사윤리의 변화: 개인윤리에서 조직윤리로, 공익활동에서 사회적 책임으로", 법과사회, 41호, 2011, 145-172쪽.

http://transproms.tistory.com/51



Posted by transproms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김재원 2014.05.12 13:0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1. 앞의 포스팅에서 이번에는 '학벌차별'과 '연령차별'에 대해서 논의하실거라고 하셨는데, 그 부분은 없는 것 같아 아쉽습니다. 참고로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장의 인터뷰에서 희망을 얻고 계시는데 찬물을 끼얻는 것같아 죄송하지만 2013년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합격자 중에서 30세 이상은 0명이었습니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6309258). 학벌차별에 대해서는 교수님께서 더 잘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2. 학벌과 연령으로 차별하면 한번 법학전문대학원에 진학을 실패하면 다음기회는 없습니다. 앞의 포스팅에서 말씀하셨다시피 법학전문대학원에 실패하고 재수, 삼수 해봐야 학벌도 그대로, 학점도 그대로, 법학적성시험 성적도 그대로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자기소개서는 다른 길을 찾아 경력 좀 쌓고 오면 만회되는 부분이 있을 것입니다만 이때는 나이에 걸리기 때문에 이또한 법학전문대학원진학에 재도전 하는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되면 다양한 경험을 가진 인재를 선발하여 법조인으로 만든다는 법학전문대학원의 설립취지에도 반하게 됩니다.) 이러한 부분이 사법시험과 가장 극명한 차이를 나타내는 것 중 하나입니다. 사법시험 합격수기들 중에는 매년 최고령 합격기가 나오는데 물론 이들 중에는 고시에만 매달리다가 나이를 먹은 경우도 있지만, 많은 경우는 사법시험을 포기하고 다른 직업에 종사하다가 사법시험에 재도전하거나, 전혀 사법시험과 무관하게 살다가 사법시험에 도전하여 합격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떠한 경우든 사법시험에서 학벌은 물론이고 나이를 문제 삼지는 않습니다.

    3. 이렇게 사법시험에서는 돈은 물론이고 학벌 학점 연령을 문제삼지 않기 때문에 우리에게 많은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었고 그리고 그러한 이야기는 많은 이들에게 꿈과 희망이 되었습니다. 잠시 접었다가도 언제든 돌아오면 받아주는 그것, 전혀 다른 길을 걷다가도 한번 걸어보고 싶은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걸어볼 수 있는 길, 그것이 바로 사법시험인 것입니다. 법학전문대학원 입시전형이 현재와 같은 상태로 계속된다면, 법조계에서는 7전8기의 드라마 따위는 옛말이 되고 말 것입니다. 변호사가 되고싶다면 형편이 어려워 또는 다른 어떤 사정이 있어 대학에 진학하지 못한 고졸자에게도, 학창시절 도전과 열정으로 학점을 날려먹은 자에게도, 제2의 인생을 꿈꾸는 50대에게도 그 기회를 주는 것이 공정한 것이 아닐까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 transproms 2014.05.31 03:5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1.2. 반복해서 말씀드리지만, 저는 '현재의' 로스쿨이 문제가 없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법시험이 학벌이나 나이를 문제 삼지 않는 것은 사실이지만, 현실은 그다지 만족스러운 수준은 아닙니다. 직장경험이 많은 사람들이 사법시험에 도전하려면, 생업을 중단하고 몇년 동안 시험에 뛰어 들어야 한다는 엄청난 장벽이 있지 않습니까? 오히려 로스쿨 제도가 잘 운영되면 이런 부분에 있어서는 훨씬 더 좋은 해법이 될 수 있습니다. 학벌 문제도 그렇습니다. 실제로 전체적으로 보면, 학부 출신 다양성은 사법시험보다 로스쿨이 '현재'에도 더 잘 확보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른바 '상위권 로스쿨'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는 점이 문제라고 봅니다. 바로 그 점이 개선되어야 할 지점이지. '현재' 기준으로도 로스쿨의 학부 다양성은 사법시험에 모든 면에서 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사법시험에서 학벌과 나이를 문제삼지 않지만, 실제로 학벌과 나이 문제를 획기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것은 오히려 로스쿨제도입니다. '현재' 로스쿨이 이 점에 대해서 만족스러운 결과를 보여주지 못해서 문제인 것이죠.

      3. 마지막 말씀은 잘 이해가 안가네요. 7전8기 드라마를 만들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낙오해야 만 하는 상황을 왜 그대로 두자고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역설적으로 고시에서의 '드라마'는 낙오하는 사람이 반드시 있어야 만들어지는 거 아닌지요? 그런 문제를 간과하면서, '드라마'가 필요하다고 하는 것은 납득이 잘 안갑니다.

  2. 김재원 2015.03.10 03: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1. 나이가 많은 사람이 사법시험에 도전하려면 생업을 중단해야 한다는 장벽이 있다고 하셨는데, 2014년 사법시험 수석 합격자가 현직 경찰입니다. 뿐만 아니라 과거 공익근무요원, 공중보건의 등이 사법시험에 합격사례도 있습니다. 즉 사법시험은 생업을 포기하지 않고도 도전이 가능한 제도입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지만 '가능성'이라도 열린 제도와 애초에 불가능한 제도와는 차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법학전문대학원은 출석을 전제로 하고 있어서(출석을 전제하지 않고는 교육을 통한 법조인 양성이라는 제도취지 달성이 어려우므로, 그리고 방송통신대학이나 야간대학원도 없으므로) 그야말로 생업을 포기해야만 도전할 수 있는 제도입니다. 최소한 휴직이라도 해야 하는데 3년이나 휴직할 수 있는 직장이 있는지 의문입니다. 게다가 휴직은 사법시험 도전을 위해서도 고려될 수 있으니 법학전문대학원의 장점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2. 학벌 문제는 사법시험은 한 해 합격자의 최대 인원이 1000명이 고작이었고, 법학전문대학원은 한 해에 2000명씩 뽑고 있기 때문에 다양한 학부출신이 법학전문대학원에 입학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법시험 합격자 1000명시대에 그 합격자의 학부 다양성이 늘고 있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만약 사법시험을 통해 1500명의 법조인을 배출할 경우 학부 다양성(또는 고졸출신, 대학재학 중 합격자=고졸)이 훨씬 늘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번에 서울변호사회장에 당선된 김한규 변호사의 말을 빌리자면 김 변호사의 모교인 가천대에서는 판사는 나왔지만 로스쿨 입학생은 없다고 합니다.

    3.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시장경제질서를 근간으로 하는 국가에서 돈이 되거나 권력에 가까운 자격, 직업은 당연히 경쟁이 치열할 것이고 그에 대한 부작용으로 당연히 경쟁에서의 패배자가 생깁니다. 이것은 당연한 것이고 비단 사법시험에만, 우리나라에만 있는 현상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매년 대학에 떨어지는 사람, 취업에 실패하는 사람이 수십만 명에 이르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법학전문대학원 입시에서도 매년 70~80%의 응시자가 경쟁에서 져서 패배자가 됩니다. 결국 7전8기의 드라마는 경쟁사회에서 자연히 발생하는 것이고 그것은 일반인들이 희망을 갖도록 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4. 물론 사법시험의 경우 사회적으로 엘리트로 분류되는 이들이 사회에 대한 기여없이 수년의 세월을 수험에 매달리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 문제가 됩니다. 그러나 이들을 최소화 하거나 사회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다른 분야로 유도하는 방법은 경쟁을 공정하게 하는 가운데에서 다른 자격, 직업군의 장점을 높이는 쪽으로 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법학전문대학원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학력, 경제력 등 경쟁요소를 개인적 역량보다는 사회적 신분으로 삼아 법조계 진입희망자를 다른 분야로 돌리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변호사 수의 급증시키는 정책(법학전문대학원 출신 변호사가 대거 배출되었기 때문인 것은 사실이지만 사법시험으로도 달성 할 수 있었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은 법조직역에 대한 메리트가 급감하게 하여 인재들이 법조계가 아닌 다른 분야로 가게 한 정책으로는 성공이라고 생각합니다. 변호사 수 급증에 대한 부작용은 논외로 하겠습니다.

    • transproms 2015.03.10 15:5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1. 극히 드문 예를 가지고 일반화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고 봅니다. 일반적으로 보면, 휴학이나 생업의 중단 없이 입학이 가능한 것이 로스쿨제도의 분명한 장점이고 사시제도와 차별화되는 지점입니다. 저는 사법시험 존치도 무조건 반대하는 입장은 아닙니다만, 그렇다고 로스쿨의 장점을 애써 무시할 필요도 없습니다.

      2. 글에서도 밝혔듯이 저는 일부 상위권 로스쿨의 학벌 편중 문제는 매우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하고 지극히 비판적입니다. 하지만 전체 로스쿨을 놓고 보면 다양성이 증대된 것은 사실입니다. 이 점은 2013년 참여연대의 로스쿨 점검 보고서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3. 당연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좀 산다는 나라 중에, 한국의 사시제도와 같은 유사한 제도를 운영하고 있는 나라가 있는지요. 그 정당성을 옹호하려면, 차라리 한국의 특수성 때문에 유의미하다고 주장하는 편이 나을 겁니다. 저는 차라리 그런식의 정당화는 일견 타당한 면이 있다고 보는 편입니다.

      4. 제도 자체를 건드리지 말고, 다른 자격/직업군의 장점을 높이는 쪽으로 방향을 잡자는 것은 원칙적으로 맞는 얘기고, 그런 방향도 적극 추진해야겠지요. 근데 그게 너무 힘든 일이니까, 제도 자체에도 손을 댈 필요가 있는 것이지요. 다만 현실의 로스쿨제도가 그런 기능을 제도로 수행하지 못하도 있다는 지적은 저도 동의합니다.

    • 지나가던 이 2015.05.29 21:03  댓글주소  수정/삭제

      가천대(경원대) 출신 로스쿨생 보여드립니다.
      http://www.lec.co.kr/news/articleView.html?idxno=34201
      http://www.lec.co.kr/news/articleView.html?idxno=34053

      경원대 개교 1982년. 33년간 사시합격자 총 5명
      로스쿨 개교 7년 현재 확인자만 3명(더 있을 것으로 추정)

  3. 김재원 2015.03.11 05: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 참여연대의 자료는 1000명 중 200명(20%)과 2000명 중 200명(10%)을 동일하게 평가하여 법학전문대학원의 성과를 과대포장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법학전문대학원이 생긴 후 학부의 다양성이 늘었다는 사실자체는 인정하지만, 위에서도 말씀드렸다시피 한 회에 2000명이라는 사법시험의 몇 배나 많은 인원을 뽑는데서 오는 효과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즉 사법시험도 2000명 뽑으면 비슷한 수준의 학부다양성 뿐만 아니라 전문대, 고졸 출신의 법조계진입이 가능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3. 경쟁이 있는 곳에 패배자가 있다는 것이 당연하지 않다는 말씀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사법시험의 경우 경쟁에서 패배한 사람들이 유독 다른 분야로 진로를 바꾸지 않는다는 특이점이 있으나, 크게 보면 외식업에 실패했다가도 다시 외식업에 도전하는 사람과 사법시험에 도전하는 사람은 차이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일단 좀 사는 나라 중 일본에 신사법시험이 있습니다. 일본이 로스쿨체제라고는 하지만 예비시험의 도입과 사법연수소의 존재로 실상은 신사법시험-사법연수소 체제인 것을 교수님도 아시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좀 사는 나라라고 하기는 그렇지만 명실공히 세계 넘버 2인 중국에도 전국통일사법고시가 있는 것으로 압니다.

    또한 제가 알기로는 법조인 선발 방식은 영국, 독일, 프랑스 등 모두 제각각입니다. 심지어 같은 영미법계로 분류되는 영국과 미국도 다른 것으로 알고있습니다. 비록 이들 국가 대부분이 일정학력 이상의 자들에게만 변호사자격시험 응시기회를 주고 있습니다만, 그 학력을 취득하는 데 비용이 거의 들지 않아 우리가 수용할 수 없거나(독일, 프랑스), 매우 큰 비용으로 우리와 같은 문제를 겪고 있습니다(미국).

    문득 소위 서양국가들이 사법시험제도를 경험해보았다면 어땠을까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그렇다면 아마 사법시험제도를 채택하는 나라도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 transproms 2015.03.11 14:1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2. 글쎄요. 뭐 이건 서로 근거를 뚜렷하게 내세울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 더 말씀드리는게 별 의미는 없어 보이네요. 물론 숫자가 늘어나면 다양성이 증대되겠지만 그런 방식으로는 한계가 있고요. 마치 300명에서 1000명으로 늘어나면서 다양성이 증대된 것이 사실이지만, 한계가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3. 경쟁이 있는 곳에 패배자가 있다는 것이 당연하지 않다고 얘기한 적은 없습니다. 어떤 체제에서도 불가피하죠. 다만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걸려내냐가 문제겠죠. 외식업 종사자들의 실패를 막는 것은 불가피하지만,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것을 포기하지는 말아야 하는 것과 마찬가집니다. 그런 점에서, 로스쿨제도가 하나의 대안일 수 있다고 봅니다. 물론 저는 '지금 한국에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로스쿨제도는 그런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여러 나라 말씀을 해주셨지만, 여전히 사법시험제도는 전세계적으로 매우 특이한 제도라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특이하다고 해서 무조건 나쁜 건 아닙니다. 그 나라의 사정에 맞으면 아무리 특이해도 해야죠. 하지만 많이 특이하다면, 그 특이한 만큼 좀 더 높은 수준의 정당화가 필요합니다. 위에서도 말씀드렸지만, 그것은 "우리나라는 이러저라하게 매우 특수한 상황이기 때문에 그런 매우 특수한 제도가 필요한 상황이다" 이런 논거가 필요한 겁니다.

      그리고 누차 말씀드리지만, 저는 예비시험이나 사법시험제도가 우리 현실에서 어느 정도 필요하다고 보기 때문에, 예비시험 도입이나 사법시험 존치에 반대하지 않고요. 다만 그렇게 할거라면, 로스쿨 제도가 나름의 장점이 있다는 것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고, 따라서 로스쿨이 로스쿨 답게 운영될 수 있는 여건은 마련해준 상태에서 예비시험/사법시험 제도를 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진정한 '경쟁'체제가 되는 것이고, 그런 식으로 한 10년 정도 운영해보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입니다.